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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정신이 들어있는 이름.."늑대와 춤을"



"삶이란 신비로운 것이다. 죽으려고 한 건데 뜻밖에 영웅까지 됐다"

존 던바 중위는 말을 타고 가면서 독백한다.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은 첫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마치 야외 푸줏간 같다. 앞치마를 걸친 두명의 남자가 식칼을 들고 있다. 그들의 치마는 피로 얼룩졌다. 그들 밑에는 한 중위가 누워있다. 부츠를 벗겨내자 피가 철철 흐른다. 손에 칼을 든 두 남자가 그를 쳐다보며 이야기한다. 다행이도 살은 썩지 않았네. 그래도 잘라내야지. 그런데 미안, 난 지금 너무 피곤하다. 커피라도 마시고 와야겠다. 두남자의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는다. 중위가 누워있는 천막에는 다리를 잘리고 목발을 짚은 부상병들이 보인다. 


중위는 군의관들이 자리를 피한 다음, 그들이 벗겨낸 부츠를 끌어온다. 이를 악물고 그 신발을 신는다.


그가 던바 중위다. 그는 전투장으로 돌아가, 대치중이던 두 진영 사이를 말을 타고 달린다. 상대 전선에서 총성이 울린다. 때는 남북전쟁이 치열하던 1863년의 일이다. 북부연합군이었던 던바중위는 다리를 잘라내고 살아남느니, 장렬한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 그의 도발에 힘을 얻어 북부연합군이 이긴다. 그리고 그는 장군의 눈에 띄어 전쟁영웅이 된다. 물론 다리는 잘라내지 않고, 치료를 받게 된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던바중위는 자원하여, 개척지 전방인 프론티어 근무를 자청한다. 미군들이 휩쓴 동부에 비해서 서부지역의 미개척지역에는 인디언들과의 싸움이 있었다. 누구도 있기 싫어하는 그런 지역.. 그가 발령받은 곳에 가니, 전임자들이 한명도 없다. 그는 광활한 초원지대에 홀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는 첫 부임지에서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 이런 곳은 없다. 그지 없이 아름답다. 내가 바라던 곳이다."


보급품들이 있어서 사는데 문제는 없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요새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그의 친구는 시스코라는 말과, 늑대뿐이다. 30일 정도 혼자 생활한날, 그는 여느날처럼 요새 근처의 연못에서 옷을 빨아 널고, 발가벗고 수영도 하고 논다. 그날 인디언 한명이 나타나, 요새를 들여다보는 것을 발견한다. 인디언이 말을 훔치려하자, 벗은 몸으로 그에게 접근한다. 인디언은 바로 내빼게 된다. 그들의 만남의 시작이다.


그날 인디언 부족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백인이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가 대해서. 언제나 다혈질인 "머리속의 바람"은 "미개한 백인을 두려워할 것 없다. 내가 처단하겠다"고 한다. 


아하, "머리속의 바람"이라고?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인디언들의 이름말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본 기쁨에 젖을 수 있다.


"늑내와 춤을"이라는 영화제목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야생의 동물과 춤을 추는가? 늑대들과 춤을 춘단 말이지? 뭐 이런 정도일 것이다. "늑내와 춤을"에는 그런 뜻도 있지만, 존 던바 중위의 인디언 이름이다. 존 중위가 늑대와 재밌게 노는 것을 보고, 그에게 선사해준 이름이다.


"늑대와 춤을"과 사랑하게 되는 "주먹쥐고 일어서"는 그녀가 어렸을때 그녀를 놀리던 여자를 주먹쥐고 일어서서 한대 갈겨주어서 생긴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에는 그녀의 "생명의 활동"이 들어가 있다. 존 던버 중위와 친구가 되는 "발로 차는 새", 그 이름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그런 이름으로 불려진다. 



이 사람이 중위와 가장 친하게 되는 "발로 차는 새" 


홀로 요새를 지키다가, 스스로 인디언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그곳에서 자해하려는 인디언 여자를 만난다. 그녀의 모습은 머리가 헝클어진 백인이다. 존 중위는 그녀를 데리고 인디언촌으로 들어간다. 인디언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자, "발로차는 새"가 그들을 저지한다.  부족에선 다시한번 회의가 일어난다. 백인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기로 하고, 대표를 뽑는다. 다혈질, "머리속의 바람"과 인내심과 분별력이 있는 "발로차는 새"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다.


영화는 중위와 인디언들이 친해지는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담아낸다.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들 사이, 첫번째 대화 대상이 버팔로였다. 인디언 말로는 "타탕카"가 버팔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들은 버팔로를 놓고 한가지 공감대를 갖게 된다. 버팔로는 인디언들의 사냥감이지만,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중위가 커피를 대접하는 장면, 그리고 인디언촌에 초대받아 간 중위.. 중위는 새로 생긴 인디언 친구들에게 빠져가고 있다. 어느날 지축을 흔드며 무언가 마구 뛰는 소리가 들린다. 버팔로떼가 나타난 것이다. 중위는 인디언 마을에 이 사실을 알리러 간다. 때마침 제를 올리고 있던 인디언들에 의해 주먹질을 당하지만, 그의 버팔로 소식에 인디언들이 환호한다. 그리고 버팔로 사냥, 이 사냥으로 중위와 인디언들은 비로소 믿는 사이가 된다.


그 와중에 "발로차는 새"는 "주먹쥐고 일어서"에게 영어를 기억해보라고 요구한다. 아주 어릴때 인디언 마을에 들어온 그녀는 그 남자에 의해 백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한다. 그녀를 데리고 왔던 "발로차는 새"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부족을 위해 영어통역을 해주기를 원한다.



중위는 "이토록 잘 웃고 가족들에게 헌신적인 사람들은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조화" 그 자체이다"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는다. 이런 수우족은 또다른 인디안인 포니족과 오랜 동안 싸우며 살아왔다. 잔인한 그들에 의해 중위를 요새로 안내해준 농부가 처참하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수우족 용사들은 포니족과의 싸움을 위해 무장하고 떠나려고 한다. 함께 싸우려는 중위에게 당신은 부락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부터 중위와 여인의 사귐이 시작된다. 중위는 라코다말(인디언말)을 그녀에게서 배운다. 그녀는 남편이 죽어서 "추모"하는 기간이다. 그녀의 자해행위도 남편이 죽은뒤에 일어날 일이었다. "추모" 기간은 "발로 차는 새"가 명령할때까지 계속된다. 둘은 급속도로 친해진다.



용사들이 떠난 부족에 포니족이 쳐들어온다. 중위는 요새에서 총을 가져와 이들을 막아낸다. 여자들과 노인들만 있는 이곳을 목숨을 걸고 지킨다. 용감한 수우족 여인들도 최선을 다해 싸운다. 중위는 싸움이 끝난후 "나는 이런 싸움은 처음이다. 정치적 음모나 영토확장 때문이 아니라, 겨울양식과 아녀자들을 위해 싸웠다는 것에 자부심이 들었다." 그는 비로서 수우족의 "늑대와 춤을"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장에서 돌아온 "발로 차는 새"는 그 백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먹쥐고 일어서!

그만 울어라."


그녀의 "추모"기간이 끝난 것이다. 수우족의 방식대로 둘의 결혼이 주선된다. 수우족의 남자는 한 여자만을 사랑한다는 약속을 해야 결혼 허락을 받는다. 


이 마을의 추장은 "열마리 곰"이다. "늑대와 춤을"은 드디어 모든 것을 들려준다. "수많은" 백인이 몰려올 것이라고.

"몇명이나"

"하늘의 별만큼 셀수 없이"

"우리는 스페인 강도도 몰아냈고, 멕시코인도, 텍사스인도 쫓아냈지. 그들은 허락도 없이 자꾸 온다."

그러면서 "열마리 곰"은 

"우리는 우리땅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겨울 캠프로 이동하자"고 말한다.


겨울캠프로 가는날, "늑내와 춤을"은 짐을 꾸리다가 요새에 그동안 정성들여 작성한 "일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만류하는 그들을 뒤에 두고 요새로 갔는데, 그곳엔 미군이 부임해 있었다. 그를 발견하곤 말도 없이 총을 쏘아대는 미군들. 인디언과의 관계에선, 손짓 발짓을 통한 소통으로 시작했는데, 말이 통하는 그들은 그에게 총을 겨눈다. 인디언과 미군이 극명하게 달라보인다.


결국 "늑대와 춤을"은 잡히고, 그들에게서 인디언 부락을 알려주면 용서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러고는 그가 사귀었던 늑대에게 총을 겨누고, 반항하는 그를 쇠수갑을 채우고 사정없이 다룬다. 


한편 인디언들은 오지 않는 그를 걱정해서, 요새를 살피게 한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한다.  존 중위가 교수형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행렬에 인디언들이 나타난다. 필사의 싸움을 벌이고 백인들을 몰살시킨다.





인디언들의 겨울캠프에서 "늑내와 춤을"이 말이 없다. "열마리 곰"은 "괴로운가?" 묻는다.


그는 "백인 군인들을 죽인 건 잘한 일이지만, 아마도 미군들이 나를 찾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여러분도 몰살될 것이다. 내가 떠나야 한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보겠다"고 말한다.


열마리곰은 " 네 생각이 틀렸다. 미국들이 찾는 존 던바 중위는 없다. 단지 존재하는 건 수우족의 "늑내와 춤을"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족과 함께 있길 바랬다.


한번도 흥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발로차는 새"가 씩씩댄다. 딸처럼 키운 "주먹쥐고 일어서"와 "늑대와 춤을"이 부족을 떠나기로 한 날이다. 그 둘이 부족마당에 만나,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눈다. 가장 귀중한 것을 교환하는 것, 그들은 곰방대를 서로 교환한다.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며.


눈이 그칠 즈음 그는 아내와 캠프를 떠난다. 그리고 자막이 올라온다.


"13년후 그들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수우족은 네브라스카 로빈슨 요새에서 백인에게 항복했고, 평원의 위대한 기마민족 문화는 사라지고 서부는 역사 속으로 소리없이 묻혀갔다"라고....


영화는 장장 3시간 정도에 걸쳐 방영됐다. 1991년의 작품. 케빈 코스트너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라 적혀있다. 1863년의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영화를 다시 켰다. 3시간 다시 볼 자신은 없었으므로, 잠시 확인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끝까지 봤다. 바닥에 등을 곧추세우고 앉아서 3시간을 숨도 쉬지 않았던 것만 같다. 그만큼 영화의 완성도가 훌륭했다. 


영화는 초원의 광활함과 아름다움을 잘 드러냈다. 인디언들의 사냥에서는 야성적이고 저돌적인 통쾌함이 있었다. 영화는 많은 말을 담지는 않았지만,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줬다. 인디언들도 여러 부족이 있다는 것, 그들안으로 들어가는 키를 제공했다. 그 당시의 미군들중에는 교육이 전무한, 얼치기들이 섞여있어서 군기문란, 질서교란들이 자주 일어났다는 것도 알수 있었다.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담아낸 이야기가 있을까. 대강의 내용을 훑은 것은 영화줄거리 모음에 가까운 나의 습관 때문이기도 했지만, 줄거리에서 인디언들을 느껴보라는 의도였다. 버팔로 가죽을 걸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회의를 하고, 조급히 생각하지 않으며, 위계질서가 분명한 한 부족의 삶을. 백인들은 이들의 평화를 깨는 반칙자들이다. 


"존 던바" 중위에서 "늑대와 춤을"이 되어가는 과정이 정말 실감나게 그려졌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가 된다. 

그에 비하면 미군들은 언어는 통하되, 정신이 통하지 않는 대화할 수 없는 이들이다. 


인디언들은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말, 심금을 울리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순박했고, 소중했다. 말이 없으나, 그들의 표정에서 더 많은 말들을 읽을 수 있었다. 부족민중엔 "웃음이 많은(smile a lot)"도 있었고, "들송아지"도 있었다." 검은 쇼울"도 있었고. 이름에서 "정신"이 느껴진다. 사물 하나하나에 정성과 애정을 들인 그들의 삶이 이름에 담겨있다. 


이 당시는 미국이 노예문제로 남북전쟁이 벌어졌던 때다. 그런 와중에 인디언들과의 싸움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대체 몇명이나 쳐들어오는 것인지" 잘 모른다. 다른 부족 포니족이 50여명을 이끌고 가끔 습격하니,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숫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아메리카 온 영토를 차지하기 시작한 백인들이 인디언들만의 구역을 휩쓰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소설가의 머릿속에서만, 그리고 낭만적인 영화제작자에 의해서 현실화될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가슴을 후벼판다. 침략자와 침략을 당하는 자, 언어의 불통, 문화의 상극관계, 그리고 생긴 것까지 어느것 하나 그들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늑대와 춤을"이 벽지를 자원했던 그 이상한(?) 성격과,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는 무모한 용감스러움 등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역사속에 한 페이지다. 깊고 깊은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이름을 생각해본다.  "생명활동"이 드러날 수 있는 내 이름이 있으면 어떨까, 그런 망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