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언니에게서 본다...시카고 여행기(1)
강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타고 휩쓸려 먼곳을 다녀오긴 했는데, 그리 쉽지는 않았다.
바람의 정체는 “미국 시카고”였다. 큰언니가 이번 연휴에 시카고 방문을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유있는 바람이었다. 캐나다 가족의 숫자가 많다보니, 최근 몇년간은 “노는 곳”의 무대가 캐나다였다. 그래서 매년 캐나다를 방문하는 동생은 헤어질때마다 미국에 놀러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오랜 시간 선교사로 외국에서 살다온 동생네 가족이 제부는 박사과정을 동생은 석사과정을 공부한다고 모든 가족을 이끌고 시카고 트리니티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초중학교 3아이와 함께 온가족 학생이라는 주목받는 삶을 시작했다.
시카고살이 25년이 넘는 세째언니네는 젊었을때는 자주 캐나다 방문을 했는데, 세째형부의 기력이 쇠해지셨는지,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와서 미국에 있는 한인과 결혼해 이주한 동생까지 시카고에 3가정이 진을 치게 되었으니, 우리 모두 그들의 형편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가족이 움직이는 것이 만만치 않다. 숫자상, 시간상, 사업상 여러가지 이유로 캐나다 선발전을 미리 치러야했다.
선발전에서 쉽게 밀려나는 사람이 우리 남편같이, “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과 2세들이다. 선발전에서 안타깝게 탈락한 사람은 막내동생으로 그녀의 어린 3자녀 때문에 눈믈을 머금어야 했다는 뒷이야기. 밴 1대에 탈수 있는 사람은 모두 7명, 그렇게 선발된 팀이 의견조정하는 일이 남았다. 가면 가는 것이지, 뭔 의견조정이냐,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는데, 말도 마시라. 거의 못갈뻔 했다.
봄바람을 주도한 큰언니의 남편… 새벽형인 큰형부의 의견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종화언니가 강하게 부딪쳤다. 큰형부는 먼거리 여행을 하려면 새벽 3시, 약간 양보하면 새벽 5시에는 움직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데, 모두 떨어져 살아 캐나다 한군데서 만날려면 새벽3시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연장자이신 큰형부의 의견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지만, 사태는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새벽에 떠나느니 밤에 차에서 자면서 가는 것에 찬성표를 던지던 언니는, 그 의견도 여러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큰형부 말씀대로라면 “자신은 빠질테니, 잘들 갔다오라”고 선언했다. 가까이에 살아서, 그 언니의 몸의 형편에 민감하던 나는 약간 언니쪽으로 의견이 기울었고, 밤도 새벽도 아닌, 아침에 떠나는 것으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시대가 변해서 일까, 그렇게 “완강”하시던 큰형부가 마지막 전화에서 거의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아침 9시 집결) 따르기로 하셨다. 그래서 출발하기 하루전에야, 시카고에 몇시쯤 도착하게 될른지, 그쪽에 통보할 수 있었다.
사실 계획 초기단계에만 해도,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 문제도 아니고, 새벽이냐, 아침이냐에서 합의하지 못해 한사람이 빠지게 되면, 가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 뒷끝이 있게 된다. 이왕 작정한 일, 합의를 이끌어내니, 의견조율의 퍼즐을 완성한 기쁨이 솟는다. 이렇게 해서 최종 여행자 명단은 엄마를 포함, 네명의 딸들과 한명의 사위, 그리고 한명의 조카아들로 큰언니집에서 두명이 참가한 것을 빼면 각 집안의 대표 한명씩 포함된 “캐나다팀”이 형성되었다. 이들중 시카고땅을 처음밟는 사촌오빠가 끼어있어, 그의 기대감을 우리들도 나눠가질 수 있었다.
부활절 연휴라 미국으로 향하는 많은 차량으로 연체가 됐고, 모든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미국 이민국에서 또 좀 지체하여서, 미국에 들어갔을때는 미국쪽 시간으로 8시가 넘어있었다.(캐나다 시간으론 밤 9시)
평균 연령 59세. 찍사를 뺀 미국여행팀. 글쓴이가 막내 "딱까리"였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미국에 있는 모든 가족이 세째언니의 집에 모여있었는데, 비단 3자매 가족뿐이 아니라, 세째언니의 두 아들의 가정까지 모두 5가정이 모여서 우리를 환영하였다. 조카가 일가를 이루고 그들의 아이들이 벌써 똘망똘망하게 “이모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를 바라보는데.. 심장의 박동수가 높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이 오랜만에 만나니, 내안의 피가 흥분으로 소용돌이 치는 가 보다.
서울서 유학할때 나와 함께 살았던 세째언니의 두 아들이 이제는 “능글능글한” 미국시민이 되어, 예쁜 아내와 아이들에 둘러싸여있는 모습은 약간은 감격이었다. 큰조카는 핸드폰 가게를 16개나 운영하는 비지니스맨이 되어 있으니, 함께 늙어간다는 말이 맞는 말일게다. 세째형부가 일군 핸드폰 가게를 아들이 물려받아 경영하면서 규모도 꽤 커진 것 같다.
큰언니는 세째언니네 오면, 옛일을 말하곤 한다. 한국에서 고생하고, 처음 이민와서 흑인촌에서 장사하면서 어려웠던 일… 그런 일들이 옛일이 되어, 언니 형부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경제력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의 큰집과 옷장의 많은 옷들과 그리고 이멜다 구두장을 방불케하는 많은 구두들로 그것들 자체로 입이 벌어진다. (형부말씀으로는 언니가 구두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그래서 언제나 구두를 사곤 한댄다. 나도 이번에 두켤레를 얻어왔다.) 보이는 것은 그런 물질뿐, 그 물질에 밴 그들의 땀과, 고민은 전연 보이질 않으니, “진실”은 항상 더 먼곳에 있다쳐도, 어쨋든 언니 형부의 성공은 우리를 으쓱거리게 했다.
조카 승현, 주현의 아이들. 큰아이 솔아(왼쪽)를 빼고는 이번에 처음봤다. 얼마나 귀엽든지..
손자와 며느리들에 둘러싸여 기뻐하시는 엄마.
왼쪽이 둘째 주현이와 남희, 그리고 오른쪽은 첫째 승현이와 수윤이.
내게도 며느리가 되나?
세째언니는 자신을 “부자”로 표현해주는 것에 반대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단한 부자들에 비하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언제나 모든 비교는 상대적이라는 걸 잊지 말자) 언니는 그렇다고 놀고먹는 마나님은 아니고, 형부와 함께 세탁소 디포를 하고있다. “용돈벌이” 정도 된다는데, 작은 수선은 언니가 하고, 물건이 많으면 맡기면서 소일거리로 하기에 안성마춤해보이기도 했다.
살림규모가 커졌으니, 아들의 회사에서 매달 보조를 받아 쓰신단다. 형부는 “아들의 사업”이라 생각지 않고, “아들 매니저”에게서 보고를 받는 것처럼 표현하셨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그런데 웬걸, 일요일 저녁에 열렸던 가족 노래방에서 형부는 땅을 치며 통곡하셨다.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노래방 가사가 화면에 흘러나오고, 형부는 신발을 하나 찾아오시더니, 땅바닥을 내리치며 부르신다. 한국방문때 지인으로부터 배우셨다는데, 우리들도 형부를 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믿었는데, 이미 청춘은 간곳이 없어진 것이 맞다.
그나마 형부 언니는 골프광으로 나이보다 젊게 살고 계셨다. 그러니 그런 노래를 재미로 부를 수 있었다는 데서 위로를 받아야 할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