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그리고 우리

해외 독립운동가 큰별 박용만 조명..경술국치 100년

mindylee 2010. 9. 19. 09:40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넘겨준다”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 선포된 그날은 우리 겨레가 수몰되는 통한의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영구히 멸망하고 한국민은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식민지가 시작된다. 경술년에 일어난 일로 이날을 경술국치라 부른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역사적 참극을 조명하는 활발한 작업들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여기에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박 용  만.

 

 

 

군복차림의 박용만.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대학 소년병학교 교장 박용만. 1910년 

 

이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같다. 그러나 그는 미국 망명 독립운동가로 이승만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리고 안창호와 더불어 3대 해외 독립운동가의 한사람으로 매김되어진 인물이다. 이와같은 사실이 토론토 교민 이상묵씨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어서 주목을 끈다.

 

이상묵씨는 현재 본국에서 야당지로 유명한 인터넷 신문 Oh my News에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연재하고 있다. 오마이 뉴스는 다음과 같이 박용만을 소개하고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이 글이 연재되면서 한 독자는 “박용만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습니다. 이승만하고의 관계가 매우 흥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사라져간 인물이 발굴, 평가되는 연재물을 기대합니다”라고 적고있다. 이 독자의 발언은 역사에 정통하지 않은 평범한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상묵씨는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등 1백년전 고신문들을 참조한 글에서 박용만뿐만 아니라 동포 사회를 주름잡았던 지도자들의 모습과 민중들의 모습을 현실로 재현하고 있다. 

 

 

최초의 한인 이민들을 싣고 하와이에 도착한 갤릭호.

 

인터넷과 현대교육으로 무장한 현대인들도 외지에 오면 문화충격에 휩싸이는데, 1백년전 한인들이 미국에서 본국의 문화를 고수해, 야만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였던 점들까지 적나나하게 파헤쳐진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

 

 

한인들은 서양의학도 수용하지 않았다.

죽은 노동자의 시신을 백인의사가 부검을 하려고 하자 일부 한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병원으로 가 의사를 살해하고 동료의 시체를 빼앗아 왔다. 널짝으로 관을 만들 수 없던 그들은 하는 수 없어 에나멜 광이 번들거리는 서양식 관 속에 시신을 눕혔다. 이어 반쯤 벌어진 시신의 입에 쌀알을 채웠다. 그리고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동전도 한 개 입에 물렸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백인 루나(십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잘 다림질된 양복을 입고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손에 쥐고 얌전히 누어 있는 백인 시신들만을 보아오던 그의 안면근육은 굳어졌다. 그들은 대충 모양을 흉내낸 상여도 만들었다. 상여를 메고 떼를 지어 사탕수수밭을 가로질러 갔다.

 

"가자 가자 어서가자.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출처 : 박용만과 그의 시대 2,  한국인들은 무지하고 자치가 불가능한 자들.  오마이 뉴스  

 

  

박용만과 그의 시대 2편에 실린 그 당시의 신문기사는 그 장면이 그려지면서 웃을수도 울수도 없는 씁쓸함을 보여준다.

 

나라를 잃은 국민들이 외국에서 세운 우후죽순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하는 의미에서 설립된 대한인 국민회의가 창설되는 과정도 보여준다. 이때 박용만이 사장으로 있던 신문사에 총무로 일했던 김종학이 지방총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친목회장이 아니라 동포들이 자기손으로 뽑은 정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위엄의 상징성을 지녔다고 볼수 있는 인물이다. 그 김종학이 후에 누명을 쓰게 되어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그가 남긴 유서에 보면, 이승만에 대한 원한이 서려있다.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도 연재내용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맨왼쪽 죄수복을 입은 이승만. 한성감옥으로 면회온 친지들과 찍은 사진.(독립기념관)

 

 

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분열식 행진을 하고 있는 대조선국민군단.

 

서로간에 합심해서 하나의 적 “일본”에 대항해야 하는데, 동포들끼리도 이런 분열이 있었으니, 내부의 적을 소탕는데 너무 큰 소모전을 벌이게 된 것을 보게 된다.

 

크고 작은 한인단체들의 불협화음을 자주 목격하는 현재의 이민자들은 100년전 첫 이민지에서 한인들이 나라를 잃고서도 하나로 뭉치지 못했던 역사적인 사실앞에 뜨끔해진다. 지금은 그만큼 절박한 시대가 아닌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우리들의 잠재력이 그렇게 상채기가 나고, 그것들을 봉합하는데 많은 시간들이 걸리며, 어떤 것은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박용만은 1914 6월에 대조선국민군단이라는 군사학교를 설립한다. 학병들은 낮에는 파인애플 농장에서 노동하고 저녁에는 군사훈련으로 무장한다. 현재 Oh my News에는 박용만에 의해 조직된 군사학교까지 연재되었다.

 

 

일본군과 맞서싸운 의병들(1907년경)

 

같은 내용으로 캐나다 한국일보에도 연재가 시작됐다. 이 신문은 연재를 시작하면서, "비운의 미주 3대 독립운동가" "무장항일 주창, 1928년 중서 동포손에 암살"이라고 중간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그의 투쟁노선은 다음 글에서 잘 알수 있다.

 

 

'영토' '주권'을 잃었으므로 '유형국가'는 소멸됐으나 '국민'이 단결하여 '무형국가'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게 그의 유명한 '무형국가론'”이.  또 그의 전 생애를 통한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다.

 

그렇다고 오직 칼에만 의지하는 '무력투쟁론'이 아니었다이성의 눈으로 시대를 꿰뚫고 암담한 독립운동의 지평에 정치적 이정표를 세웠던 그는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생애 내내 광복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승만의 '외교에 의한 독립론'과 평행선을 달려 두 사람의 대결은 하와이 동포들을 테러의 공포 속으로 밀어넣었다.

 

출처 : 이승만과 옥중에서 결의형제까지 했는데... - 오마이뉴스

 

이상묵씨가 참고한 것들 중에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이란 항목이 눈에 띈다. 다음에 없는 카페가 없다싶다. 그리고 이렇게 학술적,역사적 자료로 소용될 정도로 방대하다니, 지하에 묻히는 자료는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어쨋든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돌아보게 된 것은 행운이다. 감춰진 것은 드러내지게 되어 있는가 보다.

 

이상묵씨는 시인이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절구를 생각하며" 외 9편으로 데뷔했으며 1993년 첫 시집 "링컨 생가에서"를 펴냈다. 그의 시어들은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따뜻함이 있다. 또한 캐나다 한국일보 고정 칼럼니스트로 시사적인 것을 꾸준히 올려 독자들의 무딘 지성을 쪼아댄다. 그가 쓴 "아는 만큼 더보이는 유럽여행"이란 글은 예전에 필자가 소개한 적도 있다. 

(참조: http://blog.daum.net/mindyleesong/13722004) 

 

박용만의 독립투쟁기는 그의 암살까지 진행될 것 같다. 이 연재물은 박용만뿐 아니라, 1백년전 한인 이민자들의 실상까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승만과 결의형제까지 맺었던 그가 어떻게 이승만과 정적이 되었는지, 이제 연재물이 이어지면서 밝혀질 것 같다.

 

오마이 뉴스(http://www.ohmynews.com, 맨 하단 민족국제란)와 캐나다 한국일보(http://www.koreatimes.net/)에 가면 박용만을 만날 수 있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운동으로 몸을 태웠던 박용만이란 이름 석자가 자리잡기를 바래본다. 그것이 비명에 간 그를 위로하는 유일한 길이며, 한국민으로 또한 한인이민자로서의 최소한의 예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