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6 (끝) .. 대서양에 둘러싸인 긴 섬, 롱 아일랜드
"이번 길에서 우회전..."
"..."
"지났잖아. 다시 돌아가야 해"
"..."
"저기에서...옆길로! 으휴!!"
옆에 앉아서 길을 일러주던 루미의 억양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울퉁불퉁하다. 미덥지 않은 엄마 운전사를 짜증섞인 표정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그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낯선 곳에 가면, 운전하는 남편옆에서 방향이 틀리다며, 길을 일러주는 내 말에 제깍제깍 반응하지 않던 그에게 불평했던. 그러게 사람은 처지가 바뀌어 봐야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나는 어쩌다 한번 이런 일을 겪지만, 일생을 어깨에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가야하는 남자들은 참 안됐다.
차를 렌트하면, 어느곳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줄 알았다. 그러나 초행길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집에서 들고온 GPS를 믿고, 지도도 손에 들지 않고 무작정 덤빈 것과 조수 노릇을 이번길에 처음 해본 딸에게 의지한 것등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맨하턴을 빠져나오는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으니, 우리들은 다음 목적지인 롱아일랜드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지친 상태였다.
맨하턴에서도 그랬지만, 때때로 GPS가 작동하지 않을때가 있었다. 이럴때는 참으로 난감해진다. GPS를 너무 만지작거리는 딸의 손의 온도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나,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본다. 점심쯤 떠났는데, 맨하턴으로부터 150km쯤 밖에 안되는 거리인 목적지에 오후 5시경 도착했다. 때는 세인트 패트릭 데이라 호텔에도 초록 옷으로 치장한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했던 성 패트릭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는데, 요즘엔 젊은이들이 모여 술마시고 즐기는 축제의 날로 변해간다는 게 루미의 설명이다.
평소, 거리에 술취한 사람이 없는 것이 북아메리카의 문화라면, 이렇게 축제일에 공식적으로 술마시고 파티하는 것이 또다른 북미 문화의 일면이다. 오죽하면 우리 동네에서 매년 하는 "Beef Fest(소고기 축제)"가 "Beer Fest(맥주축제)"로 자조하듯 바꿔 부르며 맘놓고들 술을 마실까. 세인트 패트릭 데이의 맨하턴도 대낮부터 술기운이 오른 젊은이들이 패를 지어 다녔다. 센트럴 공원에 휴식을 취하러 갔다가, 멀리서 집단 패싸움이 벌어진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조금 후 경찰차가 도착하고, 그 중간에 몇은 황급히 도망간다.
롱아일랜드 호텔, 우리 옆방에 들었던 술기운이 오른 젊은이들의 눈동자도 사냥감을 찾는 동물의 그것을 닮았다. 나는 어미의 보호본능으로 방밖에서 들리는 그들의 잦은 발자욱 소리에도 귀를 세운다. 그런 것 빼고는 깨끗하고 단아한 호텔의 모습이다. 우리 동네 여행왔던 마이클과 타마라가 인적없는 시골길에서 차사고가 났던 것처럼 낯선 곳에서의 운전은 긴장의 연속이다. 결혼식 참석차 왔다가 똑같은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할테니, 어깨가 뻐근하다. 도착해서 잠시 동안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틀 남겨둔 여행, 호텔에서 시간을 다 보낼 수는 없다. 맨하턴 동쪽에 붙은 롱 아일랜드는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긴 섬이다. 지도상으로 보니, 우리가 있는 곳은 롱아일랜드중에서도 서쪽 Woodbury로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대서양을 만날것 같은 중간 지역쯤이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휴론 호수에 가려면 서쪽으로 열심히 달리면 된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GPS가 있으니, 호텔로 돌아오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고, 북쪽으로 한참 달려보자는 것이었다. 그곳의 어느 해변가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자, 그렇게 결정하고 루미와 밖으로 나갔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길을 잘못 잡아 남쪽으로 달린다 해도 30분 안에는 해변에 도착하리라 그렇게 나선 길인데, 달려도 달려도 그런 곳이 나오지 않는다. 지도상으론 시퍼런 대서양이 이 섬을 싸고 있는데, 물 냄새조차 맡지 못하니, 기운이 빠진다. "이쪽으로 조금 더 가보자.." 하면서 열심히 달리다 보니, 웬걸, 우리들이 묵는 호텔모습이 보인다. 결국 호텔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더이상 운전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날은 남은 음식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하루를 마무리 했다.
두번째날에는 신랑집에서 잡아준 호텔에 투숙하기 위해 열쇠를 가지러 신랑집으로 가기로 했다. 결혼 플래너인 신랑 이모가 보내준 청첩장에 YES 사인을 해서 보낸 것밖에는 일면식이 없는 그들을 만나는 게 약간 긴장이 되었다. 또한번 땀나는 운전을 하여 신랑집을 찾았는데, 그집에는 먼곳에서 결혼식 때문에 왔다는 신랑의 삼촌과 숙모가 있었다. 신부와 미리가 금방 올것이라고 들어오라 하였다.
밖에서 볼때 집은 아담했는데, 들어가니 넓고 아늑했다. 손때가 묻은 장식장을 꾸민 감각부터 밖의 정원까지 꽤 아름다운 집이었다. 싹싹한 숙모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기로 그전날 도착했다 하였다. 맨하턴에서 세인트 패트릭 데이 퍼레이드에 참여했는데, 그날 맨하턴에 있었느냐고 묻는다. 맨하턴에 갇혀서 고생했다고 하니, 그녀가 웃는다. 자신은 오래전부터 세인트 패트릭 퍼레이드에 동참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몇시간 동안 퍼레이드를 구경했단다.
조금 있다 신랑의 엄마, 이모, 신부와 미리가 도착했다. 신랑의 엄마인 조앤이 "와줘서 너무 고맙다. 미리는 잘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인삿말을 해준다. 그들의 평범함이 나를 많이 기쁘게 했다. 며느리의 인터넷 친구, 그리고 그의 엄마와 언니 얼마나 이상한 인연인가? 루미와 나는 바로 호텔로 들어왔다. 결혼식까지는 5시간 정도 남았지만,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니 4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
루미와 내가 여행자로서 해야할 마지막 숙제가 있다. 바로 대서양 물을 봐야 하는 일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물어보니 가까운 곳에 있는 해변가를 소개해준다.
이번 길도 쉽지 않았다. 거의 포기하고, 동네 공원에서 싸들고 간 음식을 먹고 돌아올뻔 하였다. 작동을 안하던 GPS가 협조해줘서 그 안에 입력되어 있던 로버트 모세스(Robert Moses) 공원을 찾아냈다.
로버트 모세스 공원
로버트 모세스 공원에서 한가롭게 노닐던 사슴들. 공원 표지판에는 아무런 음식물도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놓았었다.
때이른 수상스키를 타는 이들도 있었고, 모래밭에서 잠을 자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모래밭가의 풀들의 언덕은 PEI해변가를 연상시켰다. 바다의 파도가 만들어낸 자연 층계와 잡초들.
뉴욕에 오길 잘했어. 사진도 찍어주고, 길도 잘 찾는(?) 엄마같은 사람이 여행 동료로서는 최고야!! 비행기 태우기도 하는 둘째.
롱 아일랜드 남쪽 실처럼 가느다란 또 다른 섬에 가기 위해선 긴 다리도 지나야했다. 지도에선 한줄로 나와있는 흰선은 실제론 끝도없이 펼쳐진 백사장이고 대서양물이 찰랑거린다. 가는 길엔 사슴들이 뛰노는 자연공원이다. 무언가에 의해 움추러들고 구겨져있던 모든 것들을 활짝 펼치고 바람에 말릴 수 있는, 거칠 것 없는 물이 있는 풍경을 드디어 만났다.
기념품들도 있고, 사진용품을 파는 맨하턴의 한 가게에서 산 편광필터를 써먹을 수 있는 기회다. 사진용품을 기웃거리다 편광필터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작은 필터 하나에 129달러인 것을 85달러에 판다고 세일가격이 적혀있는 것을 준다. 다시 돌려줬더니, 중동사람같아 보이는 그가 65달러까지 줄수 있댄다. 그러면서 밖에서 한번 찍어보라고 내 사진기에 부착해준다. 밖에서 하늘을 찍었더니 좀 달라보이는 것도 같다. 제품 브랜드도 믿을 수 없고, 한 50달러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려주려고 빼달라고 했더니, 어디서 주인인듯한(사실 주인이 아닐수도 있다) 키작은 남자가 오더니, 에이, 35달러에 줄께, 한다. 그래서 속는셈치고 하나 샀다. 흥정이 되는 곳, 맨하턴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쨋든 이 편광필터를 끼우고 사진촬영을 한다. 그렇다고 뭐 달라지겠는가? 제 세상 만난듯 이리저리 뛰고 구르고 물구나무서는 딸내미를 담는다.
루미의 묘기대행진..
치어리더는 꼭 응원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하나로 각광받고
있는 것 같다. 루미의 경우 치어리더 대회를 위해 매주 2회씩 연습하지만,
무슨 경기의 응원을 위해 동원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축 결혼 타마라, 마이클
예식장은 Woodbury Country Club이라고 고급 파티장이라고 해야하나. 야외, 실내 모두 아름답게 꾸며진 그들(백인들)만의 장소였다. 결혼식 장소에 도착하자, 정문앞에 젊은이들이 서있다가, 발레(valet) 파킹을 해주마고 묻는다. 나는 뭔가 부탁하면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갑자기 제안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드레스를 떨쳐입고 스스로 주차하고, 정문도 아니고 빙돌아서 사이드로 식장에 들어선 사람은 촌스런 우리밖에 없었다.
베스트맨 4명, 들러리 4명, 어린꼬마 들러리 4명. 결혼식은 간단하게 목사의 주례로 끝났다. 결혼식 주요인사들이 야외촬영을 하는 동안 하객들은 칵테일 시간을 갖는다. 음식들이 보도 듣도 못하던 것들이 즐비하다. 열심히 먹다 보니, 한군데 돌아보지 아니한 곳에 차려져있는 굴, 조개, 홍합, 새우들. 이 해산물은 날것으로 제 껍데기에 칼로 얇게 저며놓았다. 이제서 이곳이 대서양과 맞닿은 섬의 도시임을 알게 된다. 굴축제를 하는 마을이 있다는 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들었었다. 초고추장이 아니고 피시 소스에 찍어먹었지만 싱싱한 생굴은 저절로 내 얼굴에 미소를 새긴다.
리셉션장에 들어서는 신랑 신부를 촬영하는 하객들.
파티가 무르익고..
겨우 12살때 신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는 말에 사람들이 빵 터졌다.
결혼식 내내 눈길을 끌던 플라워 걸과 그녀의 짝.
유머스럽고 다정한 마이클과 그와의 새살림을 시작한 타마라.. 잘 살아내기를 바라는 맘..
칵테일 파티가 끝나고 리셉션은 둥글게 테이블이 펼쳐져있고, 웨이터, 웨이트레스에 의해 음식이 서빙된다. 나는 신랑 엄마 옆자리에 앉혀졌다. 그녀는 춤추느라, 인사하느라 제대로 자리에 앉지도 않는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웨이트레스는 흑인 아가씨. 내게만 주는 미소는 아닐진대, 그 미소가 편안함을 준다. 그러는 와중에 베스트맨과 들러리의 연설도 있다. 미리는 들러리들을 대표해 신부와 청중에게 주는 인삿말을 했다. 댄스를 빼고는 그날의 하일라이트였을 수도 있겠다. 12살부터 만났다는 미리의 말에 모두가 웃는다. 제 인생에서 최고로 소중한 순간들을 타마라와 마이클과의 만남에서 얻게 됐다는데.. 듣는 엄마 입장에선 조금 서운하다. 썩 잘하지 못한 인삿말이지만,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어서 박수를 받는다. 리셉션은 다른 순서들이 없었다. 댄스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듯 싶었다. 신랑 신부, 부모의 인삿말 정도라도 들어갔어야 했지 않았나, 나 혼자 아쉽다.
음식은 댄스 파티와 시간을 맞춰서 간격을 주고 나오곤 했다. 7코스쯤 되었으려나. 메인 디쉬만 미리 주문받았다. 소고기, 닭고기, 새우, 베지테리안 이런 정도로 해서 말이다. 12시까지 이어진 파티. 그날 하객중 동양인은 우리 가족뿐이었으며, 캐나다가 고향인 신부쪽에서의 하객도 우리뿐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리 자랑스런 일이란 말은 아니다. 신부쪽의 진정한 축하자는 사실은 미리 혼자였고, 우리는 축하 들러리였을뿐. 어찌 생각하면 가엾은 신부,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아내길 바랄뿐이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
맨하턴을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구경한 것이 내게는 무리가 되었다. 밤쯤 되면, 거의 발을 끌다시피 한다. 뉴저지쪽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저멀리 기다리고 있으면 루미는 냅다 뛰어가곤 했다. 나는 뛰기는 커녕, 걷기도 힘든 지경인데, 속도를 낼수 없는 나는 멀리 뛰어가는 루미를 보며, 그 옛날 서울에서 버스만 보면 뛰어가던 "젊은나"를 기억하며 웃는다.
아침에 출근, 어떤때는 밤 10시 정도까지 걸어야했던 강행군의 날들을 보냈다. 그건 루미의 끊임없는 정열 때문에 그리 되었다. 여행가면 "얘들아 일어나라, 어디 갈 시간이야"라고 했던 일들이 옛날일이 되버렸다. 엄마 빨리 준비해. 오늘 할일 많어! 하면서 나를 독려했던 루미, 그녀의 여행점수는 90점 이상 줘야한다.
나의 노고도 무시할 수 없다. 뉴저지에서 맨하턴, 맨하턴에서 롱아일랜드까지 운전으로 갔던 일과, 돌아올때는 롱아일랜드에서 맨하턴 버스 터미날에 아이들을 내려놓고 혼자서 뉴저지까지 가서 차를 반납하고, 다시 맨하턴으로 버스로 돌아왔던 일에 점수를 줘야 한다.(순전히 경비절약면에서 그리했다) 지난 6일 동안의 맨하턴 경험이 이런 모험을 성공적으로 하게 했다. 어쨋든 세 지방을 넘나들때마다 톨게이트와 음침한 터널을 통과했어야 했다. 특별히 중간 도시 맨하턴은 운전자에겐 서바이벌과 같은 고난도의 운전실력을 필요로 했으니까.
미리는 결혼식 끝나고 그집을 떠나 호텔로 오기전, 타마라와 눈물바람을 했다. 언제 다시 볼수 있으려나 했더니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댄다. 그러느라고 신고갔던 부츠도 놓고 오고, 제 물건을 많이 빠뜨리고 왔다. 호텔서 새벽에 출발해야 했던 우리는 다시 그집에 갈수가 없었다. 이렇게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가 친구 결혼식 때문에 애를 많이 썼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두 아이들이 날선 대화를 한다. 루미 말인즉슨 미리 때문에 뉴욕에 큰 경비, 시간 들이고 갔다왔는데, 고마운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내게는 고맙다는 말을 몇번이나 해서, 그렇지 않다고 미리를 변호했는데, 나중에 미리가 내게 묻는다. "언니는 이번 결혼 덕분에 뉴욕에 가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온 것 아니냐, 그런데 내게 빚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루미는 가족을 위해서 간 것이다. 엄마 혼자 갔다면 어떤 여행이 되었겠느냐? 아빠가 안심하고 우리를 보낸 것도 네 언니의 도움이 컸다. 당연히 네가 고맙다고 해야한다"고 했더니, 나중에 식탁에서 정식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여행이 다 끝났을까? 타마라는 미리가 놓고간 여러가지 것들을 소포로 보내주었고, 미리는 타마라를 그리워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올 여름에 한번 더 가고싶다고 해서, 나를 기겁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비행기타고 혼자 갈 수 있다나 뭐라나. 교제를 끊게 할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당히 멈춰줘야 할텐데, 이 난관을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수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