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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삶과 죽음

mindylee 2007. 2. 19. 01:24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
 
최 혁
 
내가 토론토에서 1년, 이곳 오웬사운드에서 2년6개월 정도 머물렀으니까 캐나다에 온지 만3년6개월이 되어 갑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어쨌든 시간이 참 빠르게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영어권 현지에 살게 되면 일반적인 회화정도는 1년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들을 하면서 부러워했었지만 직접 이곳에 머물고 있는 나는 3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겨우 간단한 몇마디 대화 밖에 나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영어를 써야할 일들보다 한국어를 통해 한인대상 목회를 하다보니 영어에 신경써야할 심각함을 아직까지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갯 소리로 캐나다에 와서 남들은 영어로 밥먹고 사는데 목사님은 여기서도 주로 한국어로 사니 부럽다(?)는 시샘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맡은 배역들은 다르지만 오직 한가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목적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원치않는 사고이던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던지간에 일부 연예인들의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자살로 자기의 삶을 마감하는 연예인들이 공교롭게도 기독교인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자살을 죄악이다 아니다라고 따지기 보다는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떠한 죽음 앞에서도 한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는 말씀대로 그 누구도 죽지 않을 확률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든지-심지어 자살의 형식이라도-이 세상에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파하는 천국은 죽음이 없는 곳임과 동시에 죽음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천국을 말한다면 반드시 죽음도 함께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할 책임과 의무가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세상은 반드시 썩어없어져 버린다고 하시는데, 마지막 날에는 지금의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다 사라진다고 하시는데 다른 종교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한 은혜를 받는 기독교라는 종교조차도 오직 열심히 살아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기 업적을 남기는 소위 잘 사는 것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너무 많이 설교를 통해서 듣습니다.
 
이 땅에서의 잘 사는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부를 해서라도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또 기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면서도 오히려 죽음에 대한 얘기를 기쁘고 당당하게 웃으면서 할 수 없다는 것은 교회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한다면, 천국으로 기뻐한다면 죽음의 문제는 분명 아주 가벼운 얘기로 신자의 마음에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해서 소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처럼 하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인간들을 마음대로 사용하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생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싫다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계신 천국에 죽음을 통과하여 가는 것이 더욱 좋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해야할 일 때문에 살려두시는 은혜를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어 안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 가운데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남아 있는 것도 기뻐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죽음은 두려움도 아니고 불행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죽음을 불행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죽고자 하는 교회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교회로 전락됨으로써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실종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종교 단체로 전락해 버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된 자들이 천국과 지옥, 심판과 죽음에 대한 복음을 듣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부정적인 면만 가르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줄고 새로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엉터리 중의 엉터리며 얼토당토않는 생각입니다.
주님이 친히 세우신 교회가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참 생명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과해야 비로소 꽃피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교인 머리 숫자나 헤아리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에만 관심을 두고 목숨을 내놓고 생명의 말씀만을 전파하고자 했던 주님과 사도들의 좁은 길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을 이 세상의 삶과 죽음으로 대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천국을 소망하기에 죽음에 대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기쁘고 감사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도들 역시도 살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살았습니다. 때문에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대로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자의 담대함입니다.
 
기독교인 숫자가 줄어든다고, 기독교 대외 이미지가 나빠진다고, 세상이 기독교를 무시해서 기독교가 죽는다고 두려워 마십시오.
 
교회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런 죽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은 욕망에 마음이 점령당하여 예수를 믿어도 나 밖에 모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