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생네 집에서 송별회겸 모였는데, 여러 가족들이 모이면 중구난방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이모가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된다. 보고싶은 언니 실컷 봤고, 아들내외 사는 것, 손자들까지 가까이서 지켜봤으니, 다시 못만난다 해도 아쉴것 없다 하셨다.
다시 못만나다니... 모인 우리들은 이구동성 이모말에 토를 달았지만, 어쨋거나 큰 숙제 한가지는 해치운 심정들이 모두의 마음에 있었을 것 같다.
두분 다 무릎관절 수술을 받으셔서, 어디든지 잘 걸어다니셨다. 어디 먼데, 구경을 시켜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릴 것 같다. 두분의 건강상태와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면 어디를 가든 충분히 즐길 수 있을 터였는데.
대신 가까운 곳은 여러사람들이 이모저모로 모시고 다녔다.
내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터버모리 캠핑, 센터 아일랜드, 토론토 레이크쇼, 욕데일 몰, 하이 팍, 포트 엘긴 비치와 사과밭, 오웬사운드 공원등이었다.
오웬사운드 공원에서는 도토리를 많이 줏으셨다. 수많은 도토리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로 엄마는 묵가루를 만드신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엄마밖에는 할 사람이 없는.. 엄마가 죽으면, 누구도 그걸 할 생각은 말고 사먹으라는 그 도토리 가루"를 만들때 이모가 곁에 있어주시기도 했다. 이모 말씀에도 처음에 껍질을 까는 것밖에 도와주지 않았고, 또 도울 여지가 없는 일이라면서, "네 엄마의 억지"가 그 일을 하긴 하는데,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고 혀를 차셨다.
엄마는 혼자 사시는 노인아파트에서 이모와 몇주간씩 같이 보내곤 하셨다. 이모는 아들네 집도 있는데, 엄마가 원하시니, 엄마의 동거인이 되어주신 게다. 엄마는 그전에 저녁에 잠을 많이 잘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시곤 하셨는데, 이모가 계신 동안은 잠을 푹 주무셨다는 것이다. 매일 먹는 밥도 맛있고 얼굴은 어떤때 소녀처럼 피어오르기도 하셨다.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다니면서, 찍사로서의 나는 두분의 모델이 얼마나 고운지 놀라곤 했다. 때 맞춰 잘 웃어주시고 포즈도 자연스럽다.
이모의 캐나다 등장이 우리 부부에겐 생각지도 않던 긴장을 주기도 했다. 남편과 사촌오빠는 동갑내기, 남편의 생일이 이르니, 형님이 될수도 있는 상황이고, 사촌오빠의 부인은 나보다 5살이나 어려, 우리들의 호칭이 영 "정착"되지 않았었다. 남편이 사촌오빠에게 "형님"이라 해야 하고, 내가 오빠 부인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캐나다살이 여러해에 그런 한국식 위아래 찾기에 영 둔해져 버린 것이다.
한가지 또다른 변명을 하자면, 나는 시집식구들에게 사회에서 원하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저어했다. 남편의 동생들에게 "서방님"이라 하는 것이 영 마뜩찮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들었다. 남편을 가르킬 때 "서방님"이라 하는데, 시동생에게 "서방님"이라 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럽지 않게 생각되었다. 또한 시누이에게 "아가씨"란 말도 그렇다. 다행이 시동생, 시누이가 가까이 살지 않아서 직접 부를 일이 많지 않으니,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품으면 되니 다행이었다. 조카들 이름을 따서 ***아빠 하는 식으로 그들을 부르곤 했다.
사과밭에서의 이모님.
이런 내 마음이 있었던 지라, 남편이 사촌오빠에게 "형님"이라 해야한다고 주장하지 못했다. 남편은 무슨 이유에선지 사촌오빠를 "형님"이라 하지 않고, 친구처럼 대했다. 오빠의 부인은 어떤땐 내게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사회에서 오래 살았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니, 나도 그런 그녀를 ***엄마로 불러주기도 하고, 가끔씩은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이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전해들었다. 이모의 말씀이신즉 "송서방은 다 좋은데, 한가지 고쳐야 할것이 있다. 형님, 형수님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에 사촌오빠와 언니는 "형님, 형수님이라 하면 더 어색할 것 같고, 잘 지내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는 관심두시지 말라"고 했단다.
그러고 어제, 이런저런 이야기중에 내가 "언니"에게 "저 사람"이라고 말하고 물벼락을 맞았다. 엄마가 들고 일어나신 것이다. "너 왜 언니에게 그렇게 말하냐?"고 하신다. 그 자리를 모면하느라 한참 애썼다. "알겠어요, 언니라고 부를께. 나 가끔 언니라고도 하는데..." 집에 가는 길, 남편에게 "여보 형님께 간다고 인사드려..." 내가 옆구리를 찌르니, 남편과 사촌오빠가 마구 웃는다.
이제 이모가 가시고 나면, 호칭이 어떻게 자리잡을 지 모르겠다. 사촌오빠 내외와 확 터놓고 호칭문제를 정리해야 할텐데.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조금 찾아봤다. 처가쪽 오빠에게는 나이가 많으면 형님, 적으면 처남이라 한다고 되어있다. 나이가 많아야만 형님?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누구나 가시밭길 같았던 굴곡진 과거가 있는 편이지만, 이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끝은 여물지만, 마음은 계산에 어두웠던 목수 남편, 술좋아하는 남편을 만나, 젊은 시절 내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모네 가족은 고향을 떠나 인천에 머물기 시작했고 이제는 온가족인천에서 옹기종기 산다. 사촌남동생은 인천 교육청 장학사가 되었으니, 세상적인 잣대로 보면 "성공한 아들"을 둔 이모가 됐다. 이모에게 그런 아들을 둬서 얼마나 좋으시냐는 둥 추켜주었는데, 이모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캐나다에 온 아들이 이모를 잘 도와주는 자식이어서 캐나다행을 반대하셨었단다. 한국에서 상상할때는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뿐이었으나 이곳에서 자리잡고 사는 모습이 대견해 보이시나 보다. 이모네 집 자식들은 참으로 정이 많다. 사촌들 모두 한번쯤 캐나다에 다녀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모는 참으로 절제된 삶을 사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모이면 언제나 이모가 기도를 해주신다. 이모의 염원은 기도라는 형태로 삶에서 살아움직인다. 언젠가 스며든 믿음이라는 것이 울창한 숲이 되어있다. 사촌오빠는 이것이 이모의 문제점이라고 가끔씩 말하기도 하였다. 교회와 떼어놓고 이모를 말할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 무거운 마음이 있다. 우리 이모같은, 엄마같은 이들의 충성심으로 한국의 교회가 자라났고, 또 파행적으로 기울기도 했다. 그들의 의심하지 않는 무한충성으로 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번엔 이모가 "긴장"하실게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드릴수는 없다. 더 깊게 들어갈 용기가 내게도 없다. 교회에 끌려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해야겠지.
캐나다에 있는 이들은 이모와 사돈어른이 빨리 가고싶다고 하실까봐 걱정했다. 모두가 생업이 있으니, 두분 어른에게 집중할 수가 없을테니 말이다. 사촌오빠 장모님은 무릎이 불편해 어디 다니시는 것도 제한적이셨다. 그러나 한국식품을 하는 사위집에서 밑반찬도 만드시고, 만두도 빚어서 "장모님 만두"라는 표를 붙여서 팔기도 하셨고, 깨소금도 볶으시면서(이것도 팔 양으로) 소일하셨다 들었다. 최근에 담석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사위에게 민들레가 좋다는 말씀을 들으시곤, 민들레를 뒤뜰에서 고이 키워 사위에게 먹게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사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이모님(왼쪽)과 사돈어른(가운데)은 두분만 사진찍듯이 어깨동무를 하셨다. 엄마(오른쪽)는 완전한 왕따? ㅎㅎ 우리들은 한국서 손잡고 오신 두분 어른들이 엄마를 왕따시킨다고 놀리곤 했다. 그런 놀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두분이 서 계시면 한구퉁이에 꼽사리를 끼곤 하셨다. 두분만 찍으면 한국의 어느곳 같다고 캐나다할머니가 들어가야 캐나다서 찍은 증명이 된다고 우리들은 웃으면서 엄마의 자리를 만들어드리곤 하였다.
장모님과 어머님 두분을 초대해서 긴 시간 잘 모시고 있던 사촌오빠 내외의 그 후덕함에 또한번 놀란다. 두분을 불편하게 하였다면, 일찍 가셨을수도 있을 것이었지만, 큰 어려움 없이 두분을 돌봐드렸고, 지난번 모임에선 "엄마 내년에 또와" 하는 말로 어디 서산에서 서울로 놀러오라는 투로 말하는 사촌오빠를 보고, 참으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과밭에서 엄마와 이모.. 이날 정말 사과를 많이 땄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마치 수확하는 농부같이 수레에 가득 실어갔더니, 그곳서 일하는 아줌마가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사과값이 되나, 계산해보시는 중인지..
엄마는 다시 혼자 남으신다.
이모가 가실때까지 함께 있으시겠다는 계획을 변경하셨다. 두분이 짐싸는데 방해가 될 것 같다는 게 그 이유다. 그 옆에서 이모는 짐싸는 게 뭐 몇날 며칠 걸린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리신다. 엄마 말씀에도 이모와 충분하리만큼 지내셨단다. 그러니 마지막 시간은 아들 내외와 시간을 보내게 해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두분 다 "충분하다"고 했지만, 과연 충분할른지는 헤어진 다음에나 판명될 것 같다. 세상은 갈수록 좁아지니, 만남의 기회가 그리 없는 건 아닐 것이다. 두분에게 2011년은 특별한 해가 되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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