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이 내내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수정과 삭제가 용이한 블로그 글쓰기이고, 내가 지어낸 글이니, 삭제하면 될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삭제 버튼까지 눌렀다가, 진행이 느려, 다시 취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아직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해명해야 한다는 내 안의 숙제를 해내야 한다.
말하자면..
.... 그런데, 에드워드 가든 주변에는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멘션들이 포진해있었다. 외부인의 접근을 불편해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곁길 주차도 허용하지 않는 저이들만의 세계다. 에드워드 가든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놓은.. 공개된 정원을 내집처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환경에서, 그에 버금가는 환경을 만들어놓은, 그들의 고급취미를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공원(정원) 근처를 노부부가 마지막 거처할 지상공간으로 생각하면서 밑그림을 그리는 중, 그러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고 번잡스러운 외관에 괴리감을 느끼는 중인 게다. 내 상상이 부서지는 걸 목격해야 하는 그런 것....
이 내용중 가장 내 발목을 잡는 것은 "저이들만의 세계" "고급취미" "번잡스러운 외관" 등등이다. 맞는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공장소인 공원에서나, 자연을 즐겨야 한다?가 내 모토였나? 그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받아도 마땅하다? 그래도 된다고 누가 말했나? 나는 군중심리에 기대서 앵무새처럼 말했다. 부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 공공의 적으로 쉽게 돌리는 그런 유치함 등등.. 너희의 땅을 더 많은 이들에게 양보하라, 이런 뜻까지 포함돼 있을 수 있다.
그 생각의 끝으로 시선이 나를 향할 수밖에 없다. 너는 어떤데.... 우리집의 정원도 제대로 손보지 않아 황량해졌지만, 규모와 조경이 만만찮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는 거다. 단지 호화 멘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골살이이기 때문에 땅이 넉넉했고, 토론토땅보다 집값이 몇배 이하로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정원사를 둘 꿈도 꾸지 못하고 아마츄어로 정원을 가꾸고 있다는 것도 다를 것이다. 지인은 우리집을 보고 "작은 생태공원"이라고까지 지칭해줬다. 그 단어에 감읍했다. 내것은 자랑하고 싶어하면서, 토론토땅의 멘션 정원들을 비난한 심사는 무엇이냐, 그것이 그간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호화멘션이란 단어 자체가 거부감을 준다. 내 음흉한 의도가 보인다. 순수했다면, 정원이 아름다운 집들이 에드워드 가든 주위에는 많았다, 이렇게 썼을 수도 있다. 내 마음의 근저에 박힌 것이 무엇인지 나도 꺼내보고 싶다.
이 즈음해서 시골과 도시를 비교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시골에는 우리집과 같은 집들이 많다.
며칠전에 방문했던 옆마을의 경순언니 집은 뒤뜰앞으로 강이 흐른다. 그집에는 카누부터 튜브까지, 탈것들이 있다. 강속이 깊지 않아서 여름에 물놀이 하기 그만이다.
넓다란 밭도 있고, 물가따라 산책길도 있다. 강건너까지 그 언니네 땅이다. 이번에 가서 자세히 보니, 고비가 웃자라있다. 작년에 별장용으로 구입했는데, 주인들도 아직 숲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모른다. 모인 사람들은 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서 잠시 토론하기도 했다. 강으로는 튜브와 카누, 카약등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리를 건설할 수는 없다. 강은 연방정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튼튼한 동앗줄을 매고, 그 줄을 잡고 튜브나, 카누로 강을 건너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들을 냈다. 그 집의 남자주인은 할일이 많아서 큰일이다. 넓은 잔디밭 정리해야지, 강에서 놀것들 연구해야지, 강을 건너는 방법까지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그날 있었던 캠프파이어는 신이 났었다. 고구마를 구워먹으면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날 카누를 타다 빠졌던 두 사람은, 모임 내내 우리들의 웃음샘을 자극했다. 인터넷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 오지에 별장이 있다.
보통의 시골집들은 "땅"이 넉넉하다. 몇집 걸러 캠핑 트레일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시골사람들은 더 오지를 찾아나선다. 너 넓은 광활한 어떤것, 야성적인 것들을 찾아나선다. 도시와 시골은 엔극과 에스극 같애서, 오지를 찾아다니는 야성과, 문화집적지인 다운타운을 향하는 두 세계가 서로를 강하게 밀어낸다. 에스극인 시골사람중에는 도시바라기도 있고, 몇몇 도시 사람중에는 시골을 꿈꾸기도 하겠지만.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지인은 50에이커의 수풀(bush)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 땅에는 고사리가 자란다고 한다. 그는 그 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소나무를 심고 있다고 하였다. 옛 방앗간을 구입한 페이슬리 지인의 집 뒤쪽의 낮은 수풀속에는 고비가 한가득이다. 우리는 매년 그들의 허락을 받고 고비를 수확하기도 한다.
캐나다 시골생활의 호사스러움은 이런 것들이다. 이 모든 시골의 혜택에도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시골사람들도 호시탐탐 도시 진출을 꿈꾸기도 한다. 모든 것들을 정리해 도시로 진출하려면, 도시에서는 그돈으로 작은 콘도미니엄 하나 구입할 돈이 되기는 할까? 말없는 나무, 넓기만한 땅이 주지 못하는 것들을 도시는 갖추고 있다. 사람들과 섞이고 싶다. 전화 한통으로 동네 한국음식점에서 친구와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는 수다를 떨고싶기도 하다. 내가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지배해주는 그런 생활이 되었으면 하기도 한다.
사람과 문화에 관한 것.. 혹은 번잡함, 역동성 같은 것. 그런 것들에 대한 향수로 몸이 근질거린다. 자족하고 자만하며 살수 없게 한다. 요즘은 고개가 조금씩 그쪽을 향한다. 시골서 살만큼 산 것일까?
도시에 살면서 전원을 조성해 놓은 사람들이야말로, 부자들이 틀림없다. 어쩌면 도시 사람들이 누리기 힘든 것들을 그들이 쟁취했대서, 내것을 빼앗긴 것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여유와 자연은 시골에 양보해라, 하는 못된 심보같은 것들.
그래야 시골사람들도 뭔가 도시에 대해서 뻐겨볼 것이 아닌가?
더 늙었을때 도시생활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땅이 만만치 않다. 쉴만한 곳을 찾기 힘들것 같다. 그래서 생겨난 심술이다. 좋은 땅,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토론토의 부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이다. 잘 알겠다. 쉽게 말해, 동정받지못할 치졸한 시기심이다. 시골살이에서 누렸던 것을 같은 값으로 도시에서도 누리고 싶다는 그런 얼토당토 않은 욕심.
내 얼굴에 침뱉기를 한 글이다. 어찌 에드워드 가든에 관한 글뿐이겠는가? 글을 쓰는 것은 내 얼굴에 계속해서 침뱉기임을 안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막장드라마여도, 끝을 봐야 하는 것처럼, 내가 내게 끝을 선언하기 전까진 끝까지 달려볼 수밖에 없다. 나의 얼룩을 계속해서 드러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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