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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여고동창생


나 ...... 경순



설마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40여년이란 세월이..

너와 내가 여고 교실 같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그 시간으로부터.

그래 그 뒤로 우리가 한번 만났지. 그때가 1981년이니, 그로부터도 30년이란 세월이 또다시 흘렀구나.


너를 생각하면 내 이민의 역사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너희집을 방문한 것이 이민가기 전이었기 때문이야.

시골에 집이 있던 나는 캐나다행을 앞두고 수속 등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마땅히 있을 곳이 없었던 그때 이미 결혼해 살고있던 너희집에 머물게 됐지.

식당을 하던 너희집에서 장기 투숙을 했었다.

그것이 얼마나 민폐가 되는지 그 당시엔 몰랐었다.

식당아줌마들이 그날의 하루 장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고슬고슬한 밥과 맛있는 반찬을 나 혼자 꺼내먹던 기억이 난다.

너는 "내가 챙겨줄수 없으니, 알아서 먹으라"고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시간이 한 석달은 되었던 것 같애.

너희집 남편과 너는 나를 한 식구로 대접해 주었어.

저녁이면 함께 나가 양념통닭에 맥주를 마시기도 했었지.



친구 미라(오른쪽)와 함께.


미라야..

네 신랑 장난끼는 그때도 여전했다.

나보고 "꼬맹이"라고 하지를 않나.. 나는 "미라는 뭐 큰가?"하면서 반박하곤 했다.

그래 우리들은 고등학교 내내 앞줄에 앉았던 작은 아이들이었다.

1969년부터 1972년 졸업할때까지.. 3년간 한반 생활을 했던 단짝친구였지.


너희집에서 묵다 홀로 이민왔다. 


이민생활?? 말도 마라.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아무도 없는 척박한 이민의 땅에서 나는 가족들을 초청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만 했다. 가족을 초청하려면, 연수입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했다. 그러니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다 바쳤다. 가족들의 초청이 이뤄졌고, 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그리고 캐나다의 초청자로서 자리를 잡기까지... 그래, 네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내 머리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이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 때인 것 같다. 사람들이 "여유"라고 부르는 그것들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지. 그런데 어느덧 60을 코앞에 두고 있더구나. 네가 내게 베풀었던 그 친절과 우정이 매일밤 생각났다. 




플라워 팟 아일랜드를 돌며.. 들판에 노란꽃이 흐드러진 곳에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묵찌빠를 해보는

그녀들.



이러다간 너를 못보고 죽을것만 같았다.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서, 언니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내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너를 만나야 한다는 강력한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니는 뜬금없는 나의 "명령"에 얼마나 황당했을까? 어쨋든 언니가 예전에 우리가 다니던 학교, 동사무소 등을 헤집고 다니며 너를 수소문했고, 옛 시골 주소를 근거로 하여, 너와 연락이 닿았던 것이 작년이었지.


그때 우리가 나눴던 전화내용들 기억하지? 얼마나 울고 웃다 했니?

전화로는 다 하지 못하는 그리움이 있었다. 나는 너희 부부를 초청했다. 1달간 캐나다를 방문해 달라고. 너희 부부는 딸의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전에 캐나다를 방문하기로 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날, 너와 나는 웃기부터 했다. 30년이 지났지만, 너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담한 사이즈도 변함이 없고, 쌍꺼풀은 없지만 깊게 패인 깊이있는 눈매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너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떤 사람은 30년만에 친구를 만났더니, 친구가 없고 친구의 엄마가 있더라고 하더니만, 너와 나는 마치 어제 만난듯 너무 자연스러웠다.


네게 캐나다의 시골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 스케줄대로 너를 동행시켰다. 시골동네 아줌마들 수다모임(수수하고 다정한 모임^^)에도 같이 가고, 그레이부루스 한인야유회에도 함께 갔다. 옆동네 사는 부부와 함께 터버모리도 갔었지. 그리고 한국무용을 배우느라, 임시 등록한 에녹대학에도 함께 갔었다. 에녹대학에 가니, 우리 둘이 가장 젊어서 모두들 이뻐해주시지 않든? 


함께 떠났던 퀘벡 동부여행에서는 캐나다내의 프랑스를 볼수 있어서 좋았었지. 캐나다 데이날 1주일전에는 퀘벡인들만의 축제가 있어서 시끌벅적했지. 영국의 집권에도 끝까지 정체성을 놓지 않는 불란서쪽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혈통주의"를 볼수 있었어. 



토버모리 꽃병섬에서 등대집을 지키는 노인과 다른 봉사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에 의하면 등대집은 더이상 쓸모가 없어 정부의 지원이 없어졌지만, 역사적인 건물이고, 

사연이 많아 봉사자들이 등대집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등대집은 그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진과 물건등을 전시하는 작은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나이아가라를 구경시켜줘야 했는데, 마침 퀘벡여행차에서 뉴욕여행 패키지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워싱턴쪽으로 미국을 돌려고 했는데, 나이아가라 구경이 포함되어 있다길래, 뉴욕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지. 너희 두 부부만 보낸 것도, 나름 숨은 기대가 있었다. 먼데 나와서, 둘만의 데이트를 해보라는... 즐거웠니?


너를 그리면서 달을 보고 눈물을 지었던 적도 있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듯. 그런데 너와 한달을 함께 보내다니, 꿈만 같았다. 너와 있어보니, "우리 둘은 참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때는 몰랐는데 말이지. 이제는 연락이 없어도 너를 믿는 맘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 공항에서 눈물을 흘리는 네게 내가 말했다. "우리 또 만날 거잖아. 울지 말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6-7년 내에 한번 더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나 ...... 미라


연락을 받기 며칠전이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경순이가 죽었나봐.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

30년이 흘렀다. 내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서울서 시골로 자리를 옮긴 것밖에는. 물론 그 다음엔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니, 내게 생긴 변화가 내게는 작지만, 친구가 나를 수소문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너의 언니의 전화를 듣고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만날수 없을 것 같았던 네게서 연락이 오다니.. 몇번의 전화로 이야기를 했지만, 전화로만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초청해줘서 고맙다. 평생 살면서 1달 정도 집을 비우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다. 


너희 두 부부를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작년에 장만했다는 강가 별장은 정말 꿈의 화원같았다. 남편은 낚시광이다. 그는 물을 보자마자 낚시 노래를 불렀고, 여유있는 시간이면 낚시를 즐겼다. 너희집 텃밭도 인상적이었다. 초보 농부가 일은 많이도 벌려놨더구나. 거름과 재를 뿌려주고, 조금 토닥여봤다. 나중에 내가 떠나고 나면, 채소를 보면서 나를 떠올릴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경순아.

너, 정말 신랑 잘 만났더라. 모든 스케줄에서 자신을 빼라고 성화였지? 이게 무슨 말일까? 가게를 경영하는 형편상, 한명은 최소한도로 가게에 남아야 하니, 자신을 염두에 두지 말고 계획을 짜라는 말이었어. 자신과 함께 움직이려고 하면, 하고싶은 일을 제대로 할수 없다고. 헬퍼가 있는 날을 빼고는 주로 너와 우리 부부가 함께 출타했고, 네 신랑은 일을 하고... 그런 모습을 보니, 너무 감사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표현을 하면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내가 이 은혜, 영감에게 보상할거야.."라고. 내게는 소녀같은 네가 "영감"을 읊으면 웃겼지만, 또한 세월을 실감하고는 했다.



바다색깔의 옷을 입은 미라언니. 넓디넓은 파도치는 물을 보고 호수가 아냐, 바다가 맞지? 확인해야해... 하며 다가선다. 민물맛을 본후 바다같은 호수에 감탄했다.


나는 정말 행운아가 맞는 것 같다.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초청해주고, 바쁜 이민생활에 한달간을 우리 부부를 위해 쏟아부어준 너의 사랑과 친절, 시간을 어찌 말로 고마움을 다 표현할까?


너는 이민가기전 몇달 동안 내 집에 머물렀었던 것 같다고 했지. 경순아, 내 생각엔 한 2달 정도이다. 내가 네게 무얼 해주었다는 기억도 없다. 그저, 마땅히, 친구에게 그 정도의 편의를 봐줘야 했었다고 여겼을뿐.


네가 직접 운전하지 않고, 나이아가라를 해결한 것은 내가 한 것 중에 잘한 일 같다. 나라고 왜 모르겠니? 나이아가라까지 가려면, 가는데 만도 4시간 이상이 걸리니, 가고오고, 구경하고 하루시간을 온전히 내야 하잖니? 그런데 여행길에 나이아가라에서 잠시 쉬었다 간대니, 그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미국 여행경로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뉴욕여행에선 옆동네 사람이 같은 차로 간다고 해서, 네가 운전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도 얼마나 고마왔든지. 토론토에서 먼데 사는 네가 길에 쏟아붓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에녹대학에서 조카를 만난 사건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남편과 조카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나 역시 그 조카와 친했고. 장례식장에서 조카의 엄마를 만났는데, 딸이 한국을 방문한다더구나. 시간이 겹쳐서, 캐나다에 살고있는 조카를 찾을 생각을 포기했었다.


그랬는데, 점심을 제공받는데, 그 일에 자원봉사자로 조카가 있어서 깜짝놀랐다. 줄서기를 네 제안으로 옮겼는데, 그 줄의 한군데에서 학생들에게 음식을 떠주던 조카와 눈이 마주쳤다. 남편과 나, 조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늙은 학생들과 선생들까지 작은 기적에 모두가 내일처럼 즐거워했다. 덕분에 조카집에서 하룻밤 묵었던 것도 캐나다 방문에서 기억에 남을 일이었다.


이번에 와서보니, 많은 좋은 친구들, 가족들이 네 주위에 있더구나. 열심히 살아온 너를 보는 일이 즐거웠다. 이 만남은 오랫동안 나를 들뜨게 하고, 풍부하게 할 것이다. 너와 죽이 잘맞던 내 남편에게도 전환이 되었을 거야. 


경순아, 우리는 이제 곧 60줄에 들어서잖니?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때, 사리분별이 생기고, 경제적으로 안정될때, 인생에서 무엇을 보태고 빼고 해야할지 감을 잡게 될때가 이때가 아닌가싶어. 새 시작을 너와 만나고, 지내고, 나누는 데로부터 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이번 여행,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칡뿌리가 아닐까 싶어. 너와 남편, 그리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캐나다 시골, 그 모든 것들이 내겐 더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 잘 지내자.



나 ...... 글쓴이


경순언니와 미라언니의 만남을 옆에서 봤다. 건방지게 그들의 입장으로 방문을 정리해봤다. 

이런 여고동창생이 여러분에겐 있는가? 내게는 없다. 그래서 그 둘의 이야기가 내겐 소중했다.



경순언니와 미라언니의 모습을 담기에 바빴던 최선생님(미라언니 남편)


어느날 경순언니 별장을 방문했더니 미라언니와 남편이 경순언니네 텃밭에서 밭을 매고 있었다. 미라언니는 경순언니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쟤는 나보다 더 몰라" 하면서 고춧단을 곧추 세워주고 있다. 너무 씨를 많이 뿌려서 자리가 비좁은 깻잎을 솎아내는 모습이 전문 농부같아 보인다. 


내 욕심차리려고 관광온 것도 아니고, 삶을, 생활을 함께 하는 그들이 참으로 편안해보였다. 몬트리얼 여행을 갔다온 다음날은 우리 부부까지 묻어서 터버모리 꽃병섬과 죠지언베이 트레일을 함께 돌았다. 두 언니는 저녁 늦게 도착해서,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말아왔었다. 에너지는 하늘을 찌를만큼 충천해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친구에게 가장 보배롭고 값진 것을 소개해주려는 경순언니의 우정이 읽혔다. 경순언니의 얼굴이 밝게 피어난다. 언제나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긴장했던 그 언니가 친구의 등장으로 마침내, 그 둑이 무너졌다. "한"으로 남을뻔했던 친구와의 상봉으로 17살 소녀로 돌아간 언니를 대하는 건, 내게도 기쁨이었다.


이 둘의 만남에 가장 큰 공로자는 두 집안의 남편들인 것 같다. 아내의 여자친구와의 우정을 각별하게 생각한 두 남편의 마음씀씀이가 돋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인생 60은 전환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라언니, 경순언니 부부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그간에 없었던 새로운 "우정"이란 홀몬을 충분히 공급받은 것으로 보였다. 주는 데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고, 생활에 코를 박고 살다가 마침내, 허리를 펴자 눈에 밟혔던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한다는. 


내게는 우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가까이서 지켜본 아름다운 여름이다. 두 가정의 깊은 우정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