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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능신.. 강기영 소설가


폭서 주의보가 내린 무더운 여름날, 정전의 날들이 계속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런 상상을 모티브로 엮은 소설이 강기영 작가의 중편소설 "능신"이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 능신, 소설에 의하면 황하 강의 얼음이 풀리면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물이 얼음과 섞여 북으로 흘러 범람하는 현상을 능신이라 한다. 능신은 미친 물줄기를 이뤄 들판을 산을 만드는 등 지형의 모양까지 바꾸는 가공할만한 자연재해의 일종이란다. 소설은 능신을 소개할뿐 능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능신"에 대한 설명으로 독자들은 뭔가 대단한 것이 밀려오고 있구나 짐작하고 소설을 대하게 된다. 

처음은 별것 아니게 시작되었다. 금요일 오후, 정전으로 일을 일찍 끝내게 된, 일종의 해방감에 젖었던 시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감정이 공포로 변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독자들도 긴장의 밀도가 촘촘해짐을 느낀다. 작중 화자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할 정도로 급속도로 전개된다. 도로의 정체현상, 주유소를 비롯한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현금인출 카드가 맥을 못추고, 지하철의 끊김, 정거장에 서지 않는 버스, 폭도화 할수 있는 껄렁거리는 청년들까지 도시가 마구 혼잡해진다.

토론토를 비롯 미 동부 지역까지 넓은 지역을 망라한 정전은 원인도 모른채 속수무책,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중에 돈한푼 없는 화자는 기름이 떨어져가는 차를 골목 한곳에 주차해놓고 걸어서 집을 찾아간다. 집에는 어린딸이 아빠를 기다리며 울고 있다. 그는 걸으면서 토론토에 내렸던 폭설의 때를 생각한다. 목이 말라, 걷기에 힘이 든 그는 그보다 더 힘들었던 때를 회상하려고 애쓴 결과이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은 싱싱한 갈치의 비늘처럼 은분 가루로 잘게 부서져 내렸다. 영하 30도의 혹한은 눈마저 산산조각으로 분쇄시켜버리는 모양이었다."
"조금 굵어지거나 가늘어지는 법도 없이 내리는 눈은, 밤새도록 똑같은 간격으로 책상을 똑, 똑, 똑, 두드려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잔인한 수사관같았다."

세밀한 상황묘사가 돋보인다. 낭만적일 수 있는 눈이, 사나운 이를 가진 괴물로 변신한 것을 실감나게 그렸다.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구하기 위해 차를 부수기로 한다. 평소에는 그런 일을 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성실하게 가게일을 하고, 어린딸을 돌보는 가장일뿐인 그가, 질서가 깨진 도시에서 별 양심의 가책없이 물을 구하러 범행을 시도한다. 

"사람은 손에 무기가 될만한 물건을 움켜쥐면 그 만큼 교활해지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양심의 가책보다는 현실의 목마른 절박함이 우위였다."
상황에 따라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감정의 변화와 실행 그리고 도주까지, 커텐이 쳐지면 누구나 그렇게 될수 있다는 인간군상의 무자비함을 보여준다.

어둠이 덮이는 도시를 헤쳐나가는 화자의 생각에 "형"이 등장한다. 개인의 인생에 "정전"과 같은 그런 재난을 겪고 있는 형의 일생이. 머리가 좋았던 형은 가고싶던 대학을 가지 못하고, 돈벌이로 일찍부터 집안을 돕는다. 서독으로 광부일자리를 찾아나가는 데는 온 가족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집안을 위해 형의 희생을 조장한 음모자들이 된다.

그렇게 인생을 굽히면서 살았던 형은 마지막까지 그렇게 온순하게 사는가 했는데, 아내에게 숨겨진 과거의 남자, 혹은 진행형인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뼈저린 배신을 맛보게 된다. 아내가 사고로 죽고, 형은 아내의 옛 남자를 찾기 위해 늦게서 컴퓨터에 입문하기도 하고, 밤잠을 자기 위해 마리화나도 피우는 등, 폐인의 길로 빠진다.

형이 겪었던 서독 탄광촌에서의 붕괴 사고까지 곁들여지면서, 한 인생이 겪어야 했던 정전같은 사건들이 오버랩된다. 형은 함께 갇혔던 백인을 구출하기 위해 몸의 힘을 낭비하지 않았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줌물을 받아먹기도 하고, 건빵에 흐르는 땀을 적셔 습기를 보충하기도 하는등,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처절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배신을 당하는 감정이란. 아내가 난 딸이 자신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통보를 딸에게서 받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형은 기이하게 변해간다.

소설은 단지 정전만이 아니고, 이런 상황에 버금가는 이야기들이 계속 덧입혀져, 마치 지독한 악취가 소설 읽는내내 나는 것도 같다. 집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썩어서 나는 악취에서 연상된, 지렁이 냉동 보관서에서 냉동고가 작동하지 않아, 트럭 몇대분의 지렁이 시체 치우는 작업을 했던 이민 초창기의 기억까지 정전에 입혀진다.

"처음에는 길다랗게 퍼져만 있던 지렁이들이 빠르게 암죽으로 변해갔다. 박스에 털어넣을 때면 잘삭은 어리굴젓과 팥죽을 마구 섞어놓은 듯 줄줄 흘렀다."

강기영씨의 다른 소설에서 지렁이잡이에 대해서 읽은 기억이 난다. 지렁이잡이도 그렇지만, 그 지렁이잡이들을 몰고다니는 사람, 지렁이를 보관하고 파는 도매업자들, 그런 상관관계들을 그는 속속들이 아는 것 같다. 이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잘때 등을 꾸부리고 잡았던 수천마리의 지렁이가 한낱 지렁이죽으로 변해, 처리해야 하는 그런 작업이 통틀어 연상이 되었다.

그랬다. 어디 한군데, 빛이 들어올 구멍이 안보인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아빠를 기다리던 12살 작은 여자아이, 전기가 들어올때는 아빠와 데면데면하기까지한 디지털 어린이였는데, 문명이 힘을 못쓰게 되자, 아빠가 부리는 요술을 신기한듯 바라보는 그애에게서 말이다. 화자인 아빠는 성냥을 찾지 못하고, 부싯돌로 불을 만들 생각을 한다. 어렸을때 동네 할아버지가 했던 그 방식 그대로. 수십번의 시도끝에 불똥이 솜에 붙었고, 그 불로 초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초를 8등분하여, 꽂아 작은 프라이팬에 계란 후라이를 하는 장면은 자못 감동스러웠다.

아빠를 졸졸 쫓아다니며, 아빠가 하는 일을 거들며 좋아하는 딸아이의 얼굴은 더이상 울음이 머물고 있지 않았다. 

형은 석탄의 생성과정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비밀을 밝혀낸다. 석탄은 죽은 나무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게 정설이지만, 왜 나무들이 포개앉듯이 한꺼번에 묻히는가,를 파헤치는 게 형의 여정이었다. 
"너무 좋은 환경 때문에 울창해진 수목은 결국 그 울창함 때문에 질식사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질식사한 수목은 석탄층으로 변한다."

이것이 소설의 주제인 것 같다. 너무 풍성해진 그것 때문에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연재해이든, 인재이든 말이다.
"만약 인간의 멸망이 있다면 그건 반짝이는 두뇌를 굴리고 굴려 만들어내는 문명 내지 문화의 폭발이거나 아니면 한꺼번에 뒤엉켜 녹아버리는 마비쪽이 아닐까" 화자도 그렇게 읖조리고 있다.

장면 장면 마다 상세한 묘사가 전체적으로 한편의 영화를 본듯 싶기도 하다. 회상과 현실이 두 축을 이뤄 주제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으며, 99% 검은색의 배경속에서 초에 붙이는 불을 만들어내는 그 1%가 강력한 이 소설의 숨구멍이다. 그러면서 화자와 딸의 동질감, 자연으로 돌아간 두 인간의 인간적인 만남에 독자들은 숨을 죽인다.

화자의 집도 다른 등장인물은 없다. 오로지 딸과 아버지다. 부인은 어디로 갔나, 다른 가족은 없나? 이런 의문이 든다. 형 못지않은 사연을 동생 또한 갖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이 다 말해지지 않은 듯한, 장편으로 비화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물론 형은 괴로워하면서 실종되지만, 사실 진실이 밝혀진 건 없다. 

소설은 독자들이 바라는대로 "불"이 화안하게 켜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신 의미심장한 마지막 대사가 소설의 제목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문득, 세상을 휨쓸어가는 거대한 능신이 다가오고 있는데,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조짐이 나타나는 현장에 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작가는 미래를 진단한다 했던가? 늘어진 일상속에 숨겨진, 이상징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라 한다. 너무 풍성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럴때 야성의 힘이 필요할지 모른다. 전기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던 그 당시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까? 재해는 전기뿐만 아니고, 컴퓨터, 원자력 등 이미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폭탄들을 품고 살고 있고, 쓰나미, 태풍, 폭설, 폭서, 홍수 등에도 인간은 심각하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에 집중하고 살아야 할까? 어쩌면 가까운 인간관계부터 회복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캠핑형 인간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캠핑은 자연 근처로 다가가는 현대인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불이 없고, 물이 부족한 그곳에서의 생활을 습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강기영 작가의 작품은 소설 전문지 "한국소설" 2010년 9월호에 실렸다. 나는 이 글을 캐나다한인문인협회 창작소설방에서 봤다. 강기영 작가는 캐나다에 산다. 토론토가 주무대인 이유이다. 강기영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캐나다한인문인협회 카페 http://cafe.daum.net/koreansassocia/GSr9/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