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늙지 않는 비결은? 일찍 죽는 것이다.
얼마나 건조하고, 생뚱맞은 말인가?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제임스 딘의 모습은 청년때의 그것밖에 없다. 그가 24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줬던 히스 레저와 제임스 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에덴의 동쪽을 시청하고 나서 인터넷을 찾아본 결과, 제임스 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실은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는데, 배우에 발목이 묶인 상태다.
어쩌면 어깨너머로 제임스 딘이란 이름을 들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를 알지 못했다.
에덴의 동쪽은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1955년 작품이라하니, 제임스 딘은 이 영화가 개봉된 해 죽었나 보다.
제임스딘의 죽음은 여자 배우 안나 마리아 피어 안젤라와 관련이 있다.
사랑하던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괴로와하던 중, 그 여자의 남편에게서 아내를 잊어달라는 권고를 듣고는 자동차를 몰고 나가, 사고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안에는 얼마나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인가? 어쨋든 제임스 딘은 에덴의 동쪽, 이유없는 반항, 자이언트 세편을 찍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비극은 이어져 제임스 딘을 사랑했던 그 여배우도 이혼하고, 나중에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런 이야기 만으로도 세상은 영화보다 훨씬 더 영화스럽다.
제임스 딘에서 시선을 자꾸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
에덴의 동쪽의 주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면서 부대끼는 두가지 주제, "선"과 "악"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제임스 딘이 분한 칼은 "악"으로 그의 형 애런은 "선"으로 등장하여, 영화를 이끈다. "악"으로 분한 제임스 딘에 사람들이 눈길을 떼지 못한다. 정말 그는 악한가? 내 안에 있는 또다른 내가 아닌가 하는 그런 것들.
에덴의 동쪽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줄거리를 재빠르게 훑어보자.
선량하고, 신앙적이고, 가정적인 남자 애덤이 칼과 애런의 아버지이다. 그는 두 아들을 키우는 큰 대지의 농장주다. 큰 아들 애런은 공부도 잘하고, 순종적이고, 사랑스런 아들이다. 그러나 칼은 반항적이다. 그애들의 어머니는 일찍 죽은 것으로 나온다. 칼은 자신의 반항기질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우연히 어머니는 죽지 않았으며, 옆 마을에 성공한 여자사업가로 살고있음을 알게 된다. 술집을 경영하고, 도박도 관계하는 그런 술집을.
칼은 엄마를 찾아내고, 자신의 나쁜 유전자가 어머니로부터 왔다고 믿는다. 어머니는 "위선적인" "언제나 자기만 옳다고 믿는" 그런 남편밑에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식들도 그리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을 키워나가며, 잘살고 있다.
형 애런은 동생을 이해해주는 편이다. 그의 성격을 알고, 묻어두고, 방임해주기도 한다. 그는 여자친구 애브라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칼은 아버지의 양상추 사업을 돕는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칼에게도 생긴 것이다. 시종 반항하다가 왜 그런 마음이 든 것인지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양상추 운송체계의 현대화를 위해 아이디어도 낸다. 물론 칼 답게 남의 장비를 훔쳐오기는 했지만. 그 당시는 1920년대. 칼의 아버지는 음식물의 "냉동보관법" 연구에 몰두한다. 온 가족이 애쓴 양상추 냉장보관과 운송이 눈사태로 실패하면서, 칼의 아버지는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칼은 전쟁탓으로 곡물가격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이용하여, 콩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아버지가 잃은 돈을 찾아줄 요량을 낸다. 그는 어머니에게 가서, 돈을 융자해서, 돈을 벌어 아버지의 생일날 "현금 선물"을 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형의 약혼발표"를 가장 좋은 선물이라며 기뻐하면서 칼이 준 돈은 "가난한 농부들의 돈을 사기쳐낸 나쁜 돈"이라며 받기를 거절한다. 칼의 아버지는 2차대전 징병위원으로 일하면서 농부들의 딱한 사정을 잘알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형의 애인 애브라와 칼이 묘한 관계가 된다. 애브라는 칼의 "살기"와 "반항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아버지를 미워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는 너무 "착하고" "곧은" 그의 형이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사람을 증오하는 것만큼 처참한 것도 없다는 말로 칼을 위로하기도 한다. 놀이공원에서 칼은 형의 애인과 입맞춤을 하게까지 된다.
형 애런은 어떤 행동을 해도, 동생을 이해했지만, 자신의 여자친구에게까지 손을 뻗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점차 자신을 떠나는 여자친구에게서도 배신감을 맛보는 중이다. 애런은 아직도 어머니는 어렸을때 돌아가셨으며, 천사같은 사람이었다고 믿고 있다. 칼은 형을 끌고가서, 엄마와 대면을 시킨다. "진실"을 마주하라면서. 결국 형 애런은 아버지를 떠나서 군에 자원입대하게 되고, 그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자신에 의해서 형도 아버지도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칼은, 엄마처럼 "돈"이나 벌러 동쪽으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때 애브라가 그를 잡는다. 애브라는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이는 형 애런이 아니라, 동생 칼임을 알게 되고, 칼의 아버지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지 않아서 칼이 그렇게 된 것"이라며 그를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아버지는 막내 아들 칼을 인정하고 자신을 돌봐줄 간병인으로 붙잡아두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은행에 돈을 예치하러 가는 중년의 여인을 노려보는 어린 청년이 있다. 불량한 표정으로, 그녀를 뒤따른다. 그리고 그녀가 사는 집에 돌멩이를 던진다. 그를 잡으려는 하인에게 그는 말한다. "저 여인에게 전해달라.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고"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아직 여릿여릿한 어린 청년의 눈에 살기가 있고, 올려진 어깨에는 다른 사람이 깰 수 없는 반항이 심지처럼 박혀있다. 건전한 환경에서 왜 자신만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고,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싶어하는 어린 청년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극명하게 선과 악이 나뉘었다. 반항아 아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아버지, 그리고 모범생인 그의 형 애런 그들이 선한 사람들이고, 술집을 경영하고, 두 아들과 남편을 떠나 집을 나간 어머니와, 매사에 반항적인 칼은 나쁜 축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들이 나빠져야만 했던 것은 그 잘난 "위선"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언제나 성경을 들먹이고, 이윤을 생각하지 않고 사업을 도모하며, 인류를 위한 발명에 돈을 투자하는 그런 이상형의 사람들에게 있는 "독선"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 독선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침내 파헤쳐질 진실이 없다면, 그들은 언제나 "선"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선"으로 알고 한평생을 살아온 것이고 말이다.
나도 기어이 일을 치루고야 말았다. 믿음이 가지 않았더랬다. 내가 관심을 쓰는 만큼 내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 아이방에 들어갔다. 왜 그래 하는 그애의 표정앞에서 나는 나를 거부하는 어떤 힘을 느꼈다.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아도 될까? 목쉰 소리로 물었다. 그랬더니 "노~~"랜다. "뭐 노~~~라구?" 목소리가 커졌다. 세상에 엄마가 옆에서 앉아서 이야기좀 하겠다는데, 싫다는 아이 앞에서 얼굴의 모든 실핏줄이 일어섰다. 조금씩 잘못되어져가는 중이다. 잘못알아 들었댄다. "캔 아이, 싯?"을 못알아 들었다는데, 할말이 없다. 목에 걸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가지 일을 들어 해명을 요구했더니, "엄마가 내게 뭘 더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눈물이 그렁그렁이다. "언니들과 나는 다르다"는 말도 한다. 그래, 내가 너무 많이 기대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모두 이야기해주기를. 예전에 엄마가 걱정했던 문제, 이제는 모두 잘 해결되었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다짐을, 엄마 아빠의 수고에 늘 감사함을, 표현해주기를 바랬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아버지였나 싶다. "나만 옳은척, 나만 잘한척"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미안하다"고 할수밖에 없었다. 믿음이 없는 데서 빚어진 문제. 그 아버지도 아들을 믿지 못했다. 그애가 하는 일은, 철이 없는 일이다. 아버지를 위해 한일조차 그 본심을 알지 못했던 거다.
그렇게 잘난 위선앞에 비뚤어질수밖에 없다. 그것이 위선을 잡아주는 것임을. 사실은 인간 모두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다. 카인이 죄를 짓고 도망갔던 그곳에. 어떤 조명 아래서는 "선"으로 빛나는 것들이, 다른 쪽으로는 "악"을 조장하는 "선"이 되기도 한다. 내가 "선"할 수 있는 어떤 조건에서만 선해지는 인간이란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딘이 마치 자신의 분신인양 연기한 칼은, 자신의 악의 근원을 찾아내서 그를 대면했다는 그런 용기가 있다.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저 덮어놓고, 선을 뒤집어쓰고 살지 않았다는 것, 그런 점 말이다. 애브라의 사랑이 없었다면, 칼과 그 아버지는 증오를 풀 길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형의 여자를 가로챈 나쁜 남자이지만, 어떤땐 세상의 시선을 뚫고 나와야 할때가 있는 것이다.
또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면,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내가 증오해야할 것이 많은 환경이라면, 그 사람이 "선"해지는 걸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므로 아직 "선"함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 환경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부분도 있지만, 주어진 부분이 훨씬 크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주제라고나 할까, 삶의 주제라고나 할까?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믿음". 이것이 있으면 살고, 이것이 없으면 살아있어도 죽은몸이다. 제임스 딘은 사랑하는 여자와의 이별후에 혼란된 상황에서 결국 죽음을 맞고, 히스 레저도 약혼자와의 파혼이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약물부작용으로 죽었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 믿음이 갖고 싶다고 믿고 싶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믿음의 노력, 사랑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는. 그러다 보면, 그 믿음이 나를 깨울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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