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노바스코샤를 향해 출발했다. 뉴브런스윅과 PEI를 잇는 컨페더레이션 브릿지(Confederation Bridge)는 바다 13km를 가르는 교량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로도 명성이 높다. 다리는 단순한 미를 자랑했다. 캐나다 한국일보 김운영씨가 쓴 "발로 쓴 캐나다" 2편에 의하면 높이 200m가 되는 1,400개의 기둥이 바다속에 세워졌고, 이를 이어 다리를 만들었단다. 어쨋거나 이 다리가 우리에게 각인된 것은 그 장관보다도, 우리가 지불한 돈 때문이다.
섬에서 나올 때 다리이용료를 지불해야 했는데, 차량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징수했다. 우리는 트레일러를 끌고 있었으므로 56달러를 내야 했는데, 그게 공돈을 쓴 것마냥 입맛이 썼다. 사실 다리없을 때를 생각하면 페리호에 차를 싣고 가는 수밖에는 없으니, 그 승선의 과정과 가격, 그리고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이익일수 있을 것이다.
“재물가는데 마음있다”고 그저 보았던 연육교가 새롭게 보이고,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됐다. 그러나 다리위에서는 다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니, 안내소가 있었다. 그곳에 가니, 다리를 볼수 있는 전망대로 가는 길과, 박물관 식당등이 있다고 들어가겠느냐고 한다. 가족당 15달러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PEI주와 인접한 뉴브런스윅 주가 이 다리를 이용, 한 장사하고 있었다. 다리를 보러 들어간 그곳의 식당은 차린 음식에 비하여(부페식) 너무 비쌌고, 전망대라야 그저 다리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등대까지 가는 트레일을 만들어놓았지만, 모기 때문에 전연 걸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막내 둘째만 음식을 먹고(큰애는 기어코 싫다고, 나도 먹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망대 안을 돌아다녔다. 그곳에는 다리 건설과정을 보여주는 비디오실이 있었고, 생태계의 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본격 자연박물관은 아니고, 숙박시설로 본다면 호텔과 여인숙 중간에 있는 모텔쯤 된다 할까? 말하자면 안봐도 전연 서운하지 않을만큼, 또 너무 성의없다고 욕먹지 않을만큼 시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내소라는 게 잠시 시간을 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지, 그곳에 퍼질러 앉아서 구경할 여력들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관광객을 대상으로 전시물과, 트레일, 전망대로 돈을 걷고 있었으니, 다리세 낸 값을 찾으려다가 혹을 더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큰애는 다 돌고 나온 다음, 안내원이 나눠준 설문조사에 이런 불만을 적어넣었다고 했다.
이 다리값은 35년 동안 징수된다 한다. 다리값은 섬에서 받고, 다리를 보고 온 사람 혹은 다리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뉴스런스윅에서는 또 돈을 걷고.. 자본주의 사회니, 공짜가 없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13km 바닷길을 연결한 컨페더레이션 다리. 들어갈때는 무료, 나올때 다리이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곳에서 몇시간 지체했더니 노바스코샤까지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이곳의 지형을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자.
대서양을 서쪽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곳은 뉴브런스윅이다. 쾌벡주 밑에 있다. 뉴브런스윅과 노바스코샤는 PEI섬을 팔을 벌려 싸안듯이 보호하는 것같은 형상이다. 섬의 크기도 작고, 두 육지에 둘러싸여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에 받쳐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뉴브런스윅에 도착했던 우리가 처음에 노바스코샤를 가려고 했던 것도, 우선 땅끝을 방문하고 나면 집에 갈 때 조금 홀가분할 것 같아서 였다. 노바스코샤는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아서 여행목록에 넣었던 남쪽 끝에 있는 페기스 코브(Peggy's Cove)나 이 주의 수도 핼리팩스를 방문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여겨졌는데, 짧은 시간을 내서 노바스코샤를 방문하려된 계획에 차질이 생겨 노바스코샤가 마지막 방문코스가 된 것이다.
노바스코샤를 들어가서 만난 첫 번째 안내센터는 시원한 언덕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어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젖은 텐트를 말리는 사람들, 한가하게 주변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노바스코샤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본다. 그곳에서 전해받은 여행지를 보니, 노바스코샤의 서부와 동부를 소개한다. 우리가 갈 곳은 조금 더 가서 만나는 안내소에서나 소개되어질 것인가 보다.
나는 여행중 안내소를 가야한다고 노래했지만, 사실 그다지 재미를 보진 않았다. 뉴브런스윅에서의 바가지가 그랬고, 우리처럼 시간이 한정되어서 작정한 곳만 보고가기에도 바쁜 사람들이 안내소에서 소개해주는 곳을 다 갈수도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어쨌든 노바스코샤의 지도를 한 장 얻어가지고 페기스 코브를 향해 달렸다.
아니, 사실은 페기스 코브옆, 해변가의 한곳에 캠핑을 하는 것이 어떨까 그쪽을 먼저 찾았다. 해변을 좋아하던 막내에게, 조금 더 즐길 기회를 주고 싶었던 좀 푼수같은 어미 마음 때문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향해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길은 좁고, 쉴만한 곳은 나타나지 않는다. 몇바퀴 동네를 돌다 다시 페기스 코브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안개가 끼고 구름이 자욱하고 어두웠다. 30도를 들락날락하던 기온이 노바스코샤에 오자 20도까지 내려갔다.
옆동네 오는 것처럼 가볍게 시작한 나들이였는데, 가도가도 끝이 나지 아니했다. 아이들이 지쳐갈때쯤 페기스 코브에 닿았다. 바위가 펼쳐져있고, 키작은 나무가 이를 뒤덮은 이곳 지형은 다른 곳과 조금 달랐다. 그리고 조금 더 가니, 캠핑장 사인이 보인다. 캠핑카가 몇 대 보이지 않는, 아주 한적한 바닷가였다.
캠핑장에서 바라본 풍경1, 바닷가에 연한 명당이었다.
캠핑장에서 바라본 풍경 2
아픈 마음에 호응이라도 하듯 그 다음날 하루종일 비가 왔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어떤 기대도 들지 않는다. 게으른 아침을 먹고 핼리팩스를 향해서 갔다. 아이들은 한 두어시간 가야 된다고 말하면, 이제 “두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다”고 서로 웃으면서 말한다. 핼리팩스 시내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른다. 꼬불꼬불 기어 들어가니, 선착장이 나왔다. 육지와 바다가 닿는데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 맞는가 보다. 선착장에 가니 보트들이 떠있고, 몇 개의 매표소가 서있다.
이곳까지 왔으니, 고래를 봐야 할 것이 아닌가?해서 한곳으로 갔다. 고래구경 배가 있긴 한데, 오늘같은 날씨에 추천할만 하지 않다 한다. 다른 프로그램으로는 관광차겸 배를 타고 핼리팩스 시내를 돌고 배를 타고 항구를 한바퀴 도는 것이 있다 한다. 지나오는 길에 보았던, 바퀴달린 함선이 그것인가 보다. 흥미있어 하는 내게 아이들은 눈을 찡긋하고 난리가 났다.
(비싼) 배삯을 보고 난 아이들은 이 날씨에 뭐하러 배를 타냐고 아우성이다. 부모 돈을 생각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볼것”에 소극적인 것 같아 아쉽다.
비를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옆에 보니 박물관이 보인다. 해적이 목을 매단 그림이 그려져있다. 이 이런 날씨에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왼쪽에 박물관 입구가 있다. 그리고 바퀴달린 큰 차는 배도 되는 관광차겸 배의 모습이다. 나도 저걸 타고 싶었는데.
핼리팩스 시내의 모습
아이들도 동의해서 대서양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 of the Atlantic)에 들어갔다. 핼리팩스는 물이 깊어 겨울에도 선착장에 배를 댈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니고 있어 항구도시로 발달했다는 소개가 있다. 그러나 핼리팩스 근처에서는 선박침몰 사건도 빈번하여, 학자들의 연구과제라고도 하였다. 핼리팩스 근처 바닷가에는 지금까지 1만척이 넘는 배들이 침몰되었단다. 이 침몰된 배에서 나온 보물들은 나중 전시관의 한구석을 장식하는 전시물이 되니 아이러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배의 종류들..
핼리팩스 근처 대서양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들 수 있다. 이 박물관에는 타이타닉 유물이 폭넓게 전시되어 있고, 웃돈을 주면 타이타닉 침몰선을 근접촬영한 다큐멘타리를 3-D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침몰할 수 없이 견고하게 만든 타이타닉호가 빙벽에 부딪쳐 가라앉은 이 일은 사건 100년이 되어가는 데도 여러 사람에게 회자된다. 전시물에서 보니, 그 당시 1등석의 좌석권은 1천달러를 홋가했으니, 그때의 화폐 가치를 생각할 때, 그 신분의 지체가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들 모두 바다밑에 가라앉아 죽어간 사건은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시물중에는 정교하게 조각되어진 만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조각이 있었다.
사실 해적들도 1600년경에는 정부의 허락을 받고 나라를 위해 일했던 개인 소유의 배 선장들이었단다. 나중에는 무단 해적이 되어 악명을 떨쳤지만 말이다. 전시물중에는 교수형을 당한 해적의 해골까지 있었다. (조심해서 보라는 경구와 함께 천막이 쳐져있었다)
교수형당한 해적밑에 그의 추종자가 서있다.!!
실제 배들을 전시했고,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공구들을 파는 가게가 있다. 가게 점원이 있지만 실제 물건을 팔지는 않는 가짜 가게이다. 항해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오랜 시간 보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보통인에게 박물관이란 좀 “졸리운” 곳이다. 나는 안보이게 하품을 하면서, 곳곳을 돌아다녔다.
박물관에서 나왔을 때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캠핑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행 마지막날 일정이 좀 싱겁게 끝나려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벌써 집에 돌아가는 이야기로 희색이 만연하다. 가장 먼저, 뭘 할지 묻고 야단이 났다.
조금 비가 그친 듯하여 페기스 코브에 한번 더 들리기로 한다. 그 지형이 심상치 않게 생겼는데, 오는 길에는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날은 침침했지만 장대비는 그쳐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페기스 코브 사인이 있는 데서 몇장 찍고 났더니, 페기스 코브 포인트든가, 한 길이 옆에 있다. 이왕 온 것 저곳에 들어가보자 하였다. 그곳에 들어가니, 암벽 사인판이 나온다. 큰 길 옆에서는 페기스 코브가 보이지 않았더랬다.
페기스 코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마을은 1811년에 형성되었고, 상주인구 40명입니다.
최근에 나온 책에서는 상주인구 50명이라고 읽었다. 참 작은 어촌이다.
소박한 어촌의 참맛을 보여준대서 페기스 코브가 유명했나 하는 생각을 잠시...
Peggy's Cove
페기의 작은 만
왜 우린 이곳을 가려고 했나.
고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였다. 그러나 알고보니, 고래는 핼리팩스에서 떠나는 배를 말하는가 싶었다. 핼리팩스와 가까운 곳으로 무언가 잡아당기는 곳. 뭣 때문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이곳에 들어왔다. 대서양을 거침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그것도 있었으려나.
주민 40명이라 박혀있는 페기스 코브 길을 따라 들어갔다. 작은 어촌이다. 그럼 그렇지, 그저 어촌이었구나. 그래도 좀 다르네, 사진에 넣었다. 아이들은 차에서 내릴 생각을 않는다. 나와 남편만 어슬렁 거렸다. 우리는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생각지 않던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위들이었다. 아니, 바위라고 하면 큰 돌덩이를 연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바위덩어리들이다. 아니, 바위덩어리라고 하면 바위 몇십개가 이어져있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다. 바위운동장이라 해야 할까? 화강암 암벽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 바닷가에 연해서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아래에서 위까지, 그 넓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만한 바위들을 본 적이 없다. 그 암벽위에 인간의 구성물이라곤 오로지 등대 하나가 서있다.
마치 커텐을 걷어내니 보이는 무대같다. 2천킬로미터를 더 오고도, 몇 m를 남겨놓고, 페기를 남겨두고 갈뻔 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부르러 내려갔다.
페기의 눈물.
이렇게 말하고 싶다. 페기를 보지 못하고 페기를 말하는 사람은 없을까? 우리같이 무지한 관광객이 또 없을까? “발로쓴 캐나다”에 의하면 페기는 이 마을 근처에서 침몰한 배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인으로 이 마을 어부와 결혼해 살았다는 설이 있단다.
나의 페기는 떠났다. 페이슬리에 있을때 페기와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근3년을 아침마다 만났다. 학교 아이들에게 아침을 제공해주는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많은 모습중에서도 눈을 빛내며 아이들을 위해 접시를 나르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2년여 투병하다 올2월 세상을 떠났다. 나는 문병도 가지 않았고, 편지도 보내지 않았고, 심지어는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가게에 들른 그녀가 “이제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고 말해서 안심했던 것이 다였다. 나는 내 삶을 살았다. 이방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페기를 잊지 않는다. 나는 그날 페기의 눈물을 본것 같다. 조금 더 나에게 오시오, 하는.
아이들이 멀리서 달려온다. 어제저녁부터 센치해져있는 엄마가 어디 먼곳이라도 가버렸나, 그런 몸짓이다. 얘들아, 우리 이걸 놓칠뻔 했구나. 침침한 화강암 암벽위에서 아이들은 뜀뛰기 도전도 해보고, 달려보기도 한다. 넘어지면 안되는데..
마을을 헤집어 올라오니 막다른 골목에는 화강암이 연이어 있었다.
먼데 보이는 것, 고래꼬리같은가? ㅎㅎ 아니다. 새가 잠시 내려온 것이다. 맑은 날이라면 먼데 바다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이 보일듯했다. 그러나, 그날은 무척 흐린날..
이런 길을 막고, 관광료를 징수하지 않는 주민들이 이상했다. 볼만한 곳은 어디나 돈을 내야 되었는데. 아마도 시골 인심이 아직 페기스 코브에는 남아있는가 보았다.
뒤의 하얀등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흐린 배경색보다 더 흰 등대여서 그랬나. 이곳 1층은 우체국으로 꾸며져있어 우표를 팔고 있었다.
자 한번 뛰어보자구....
다음날 아침 집에 갈 준비를 끝내고, 먼데 바다에 눈을 주었다. 몇척의 배가 줄을 지어 나아간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무언가 꿈틀대는 것이 바다위로 보인다. 큰 물고기다. 몇분 동안을 줄기차게 바라보았다. 들썩들썩, 꼬리가 몇 번씩 바다위로 나온다. 그냥 가는 우리에게 고래가 선물을 준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기 초반에 언급했다. 마지막날 하루 15시간 달린 이야기를. 우리가 올때는 3일에 걸쳐 왔지만, 집에 돌아갈때는 그를 이틀로 축약했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아이들이 한시간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대서양 끝에서 온타리오까지, 제한속도보다 조금 느리게 달리니, 전체 28시간 들었다. 물론 중간중간 쉬는 것을 다 포함해서 말이다.
욘석들.. 몇시간만 달려도 불평하더니, 마지막쯤에는 네다섯시간을 쉬지않고 달려도 한소리 안한다. 여행이고 뭐고 “집”이 최고 좋은가 보다. 하여튼 괘씸한 녀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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