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제 육신의 일부는 이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맡기고 가니까요.
다만 한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은 저와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주십사고."
살인자 김두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마지막 말을 이같이 남겼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말이 한 여인에게는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고 있었다.
바로 유괴당해 숨진 아이, 알암이 엄마에게는 말이다.
영화 "밀양"의 원작으로 알려져 유명해진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주의깊게 읽었다. 좀 긴 단편에 속하는 이 글은 전도연이 주연한 알암이 엄마의 희망과 절망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완벽했다.
영화와 꽤 많은 부분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영화는 다음편에서 살펴보려 한다)
우선 밀양은 책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지명이다. 책의 내용은 영화보다는 건조하다. 유괴당한 알암이와 알암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유괴범과 김집사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글의 화자는 알암이 아빠이다. 약국을 경영하고 소심한 아들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 알암이 엄마가 최악의 사건을 겪고 변화되는 과정을 그렸다.
알암이 엄마는 처음에 아이가 유괴되었을 때는 그 애를 찾아야 한다는 희망과 기원으로 일어서 있었고, 그 아이가 죽임을 당한 시체로 발견되자, 절망에 빠져있다가 다시 복수와 분노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알암이 엄마 옆에는 입교를 권하는 이불집 하는 김집사가 곁에 있었다.
알암이가 유괴되기 전부터 입교를 권해왔던 김집사는 일이 있고나자, 고통당한 영혼이 치유를 얻는 길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안에 의지하는 일뿐이라고 신앙갖기를 권유했다.
알암이 엄마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절간과 교회를 찾아가서 빌고 또 빌었다. 처음부터 알암이 엄마는 신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한다"는 그런 것이었다.
아이가 죽은뒤에 그녀가 다시 교회에 집착한 것은 아이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였다.
이를 그 남편은 "아내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심은 아니었다. 알고보니 아내는 아이의 영혼구원을 위해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의 영생과 내세복락만을 외어댔다. 아이의 영혼을 위한 교회헌금에 마음을 의지하고 지냈다.... 그렇게 한동안 교회를 나다니다 보면 마음속에 진짜 신앙심이 자리잡을 수도 있게 될 터였다"
"..아내는 마침내 서서히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랑속에 아이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알암이 엄마는 주변에 신앙으로 자신을 구원한 사람처럼 보여졌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절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던 어느날,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살인자를 찾아가서 자신의 용서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날은 성탄절 분위기가 고조되던 23일의 일이었다. 면회간날, 알암이 엄마는 본인의 입장에서 무엇 하나 그에게 보태줄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작중화자인 그녀의 남편은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김집사에게서 설명하지 못할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내의 절규를 이해하게 된다.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에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김집사는 "그것이 당신의 섭리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깊으신 뜻을 모두 알수가 없습니다."고 변호한다.
글앞에 적은 "신앙적인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도섭이 사형집행을 당한 이틀 후 알암이 엄마는 그녀의 절망을 죽음으로 끝장낸다.
알암이 엄마에게 신앙을 권유한 김집사는 불우한 영혼을 하나님께 끌어들이려 최선의 노력을 했다. 아이의 생존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알암이 엄마에게 "그분의 뜻이 계시기만 하다면.." 하면서 그전에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채근하기도 한다. 아이가 죽은 후에는 아이의 영혼이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며 알암이 엄마를 교회에 잡아두려하였다. 설명이 모호한 부분은 "하나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알수가 없는 일"이라며 말문을 막곤 하였다.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되는가? 인생에서 상처받은 영혼은 주님앞으로 가면 깨끗이 치료가 되는가? 사랑하는 이가 죽었어도 열심히 믿으면 영생을 약속해주셨는가?
그밖에 많은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이것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알암이 엄마는 자신의 구원같은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 오로지 "아들"에 매달리는 어미의 본성만 있었다. 어느 엄마가 자식의 그런 처첨한 불행에 초연할 수 있을까마는, 신앙심으로 그 사태를 해결해보라고 권하기 전에 현실적인 위로와 안정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믿음은 그렇게 내 마음의 확신으로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무엇을 위해서... 믿어보려는 것" 자체가 함정이다. 내가 믿어줄 것이니, 내게 필요한 무엇을 달라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간큰 우리들이다. 그리고 죽은자를 위한 영생기도가 성경에 있기는 한가?
알암이 엄마가 신앙을 가지려 노력한 동기는 잘못되었을지라도 제대로 된 믿음의 동지들이 있었다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교회의 전체적인 풍조를 신랄히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에 끌어들이는 것만 있고, 신앙교육이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흔히 극악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로 태어난 기사들을 접하곤 한다. 그들에게 임했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짜"일수도 있다. 희망없는 세상에서 그럴 듯하게 태어나는 마지막 방도로 "믿음의 겉옷"을 입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알암이 엄마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형수 김도섭이 그런 부류이다. 자신은 확신하지만, 사실 삶 이후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작가 이청준은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같은 절망적 자각은 미물 같은 인간이 절대자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로서 그의 삶 자체를 끝장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섭리의 세계를 함께 부수고 싶은 한계적 욕망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알암이엄마 가족의 이야기를 "벌레이야기"라고 이름지었다. 밟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미물같은. 인간의 두가지 속성, 태산같은 인간의 존엄과 밟혀죽는 벌레가 될수도 있는. 무엇이 인간의 모습인가?
너무 높아진 인간들은 낮아지기가 힘이 든다. 그러나 어떤때 우리는 "벌레"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청준의 사람보기는 섬뜩한 데가 있다.
전도는 보다 깊이있어져야 한다. 글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모든 세상문제가 교회에 나감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알암이 아빠는 아내가 종교의 힘으로 일어서 있을때 그것으로 안도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힘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암이 엄마에게는 세상을 철저히 비관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종교의 힘을 의지해 뭔가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이 결국은 더큰 비극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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