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들은 "큰귀"를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다. 어쨋든 많은 말들을 듣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그에게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은 그에게 말하고자 애쓰고, 그는 그 말들을 귀담아 두려고 노력할 것이다. 좋은 말들도 많지만 흘려보내야 할 것들이 그보다 많을 것이다. 어떤 말들은 조사를 거쳐 시정되기도 하고, 정책에 반영되기도 하겠다. 옳은 판단은 그에게 매번 필요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원칙과 소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웬 정치이야기냐고?
며칠전에 웨스트 그레이(West Grey) 시장(Mayor) 부부를 만났다. 웨스트 그레이는 우리 옆 마을로 Grey Bruce 카운티의 한 자치마을이다. 서너 마을이 합해진 자치정부로 1만2천명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웨스트 그레이 지역에서 근 20여년간 거주해온 한인 부부의 집에서 "이름없는 사람들(no name)"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 시장부부가 굳이 자리를 함께 했다. 집주인과는 막역한 사이이기도 한데, 집주인 말로는 차기 국회의원도 꿈꾸고 있다하니, 선거운동의 차원이라는 소리로도 들렸다.
시장 케빈 엑클레스(Kevin Eccles)씨는 한국인과 한국과 그리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는 몇번인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웨스트 그레이 시정부와 한국의 몇몇 기업들이 손을 잡고, 큰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시정부의 큰 사업중 하나가 쓰레기 처리문제이다. 작년말 한국 쓰레기 소각업체인 경호엔지니어링과 각서를 맺고 쓰레기 소각장 설치를 건설하기로 했으며, 그것뿐 아니라 그 쓰레기 소각시 생산되는 열을 이용한 인삼수경재배 단지를 조성하기로 한국의 그린하우스 기업인 엔코텍(대표 이형식)과도 계약을 맺었다. 이 당시의 신문들을 보면 계약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알수 있는데, 나는 캐나다저널 3월호를 참조했다.
소각로 운영을 맡을 현지 환경업체인 그린 에이커스도 설립이 됐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올 5월부터 소각로 착공에 들어가 2012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며, 인삼재배도 단계별로 단지를 넓히되, 2012년부터는 수경재배한 인삼을 시장에 출하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진은 케빈, 조앤 부부와 이들을 초대한 Mrs. Kim, 그녀는 작은 의자위에 서야 겨우 그들과 어깨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우리는 웨스트 그레이 거주자이면서 그곳의 터줏대감인 김경수씨로부터 간간이 이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캐나다 한국일보와 기타 언론사들이 계약서 체결하는 사진등과, 내용들을 신문에 게재하여 자세히 알게 됐다. 어떤 정책이 시도되어 결실을 맺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노력과 과정이 있는지라, 앞으로 그들이 가야할 많은 산들을 잘 넘어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이야기를 다시 케빈씨에게로 돌려보자. 그날 두팀으로 나눠서 식사를 하게 됐다. 나는 케빈씨와 그의 부인 조앤이 끼어있는 팀에 들지 않아, 우리끼리 "영어팀"과 "한국어팀"중 한국어팀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며 식사를 마쳤다. 케빈과 함께 식사했던 남편은 인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한다.
그후로 모두가 함께 모여 이야기판이 벌어졌는데, 약간은 정책토론회같은 분위기였다.
정책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내가 사는 지역을 조금 더 설명해보자. 캐나다 온타리오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그레이 부루스(Grey Bruce)는 휴론호수와 죠지안 베이 호수의 두 물에 둘러쌓인 반도형식의 땅이다. 크게 좌편의 부루스 지역과 우편의 그레이 지역으로 나뉘고 몇개의 타운을 통합한 자치정부와, 시정부, 타운정부들이 들어서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는 오웬 사운드(Owen sound)로 인구 2만명 정도이다. 이 지역에 속해있는 블루마운틴은 스키장으로 유명하며, 호수를 끼고 있어 Beach, 낚시, 트레일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부루스 반도 국립공원을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이 지역의 보고로 생각되고 있다. 작은 마을은 인구 2백명 정도부터 1만여명까지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있으며, 각 마을은 자치정부와 연합하여, 마을의 축제등을 기획해 외부인사들을 끌어오고 있다.
현재 그레이 부루스 지역에는 한인회는 조성되어 있지 않으며, 한인 편의점 연합체인 온타리오 한인실업인 협회의 산하로 오웬사운드 실업인협회가 이 지역의 가장 큰 한인 조직이다.
우리가 이사오던 1998년쯤에는 겨우 13가정이 이 광활한 지역에 들어와 비지니스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을 하지 않는 한인들도 약간 있어서, 한인 한집이 들어오는 것이 그 당시엔 대단한 뉴스거리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왔다고, 직접 우리가 사는 곳을 방문해 주셨던 오웬사운드의 장선생님 내외분을 잊을 수 없다. 장선생님은 오웬 사운드에서 근 40여년을 사신 분으로, 체슬리라는 마을의 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시다가 몇년전 은퇴하셨다. 장선생님은 새로운 한인이 들어올때마다 격려도 해주시고, 반가움을 표현하셨는데, 글쎄 사람은 다 같지 않아서 인지, "한인"들을 피해 시골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기도 해서, 한인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몇번 놀라움을 표현하셨었다. 그러시더니, 이제는 더이상 새로운 한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기로 하셨다는 소식.
12년이 지나자, 이곳에서 비지니스 하는 가정들이 50여 가정으로 늘어나고, 다른 업종의 한인들도 많이 있어서, 통계를 내보진 않았지만 전 한인 인구가 한 300여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쨋든 장황하게 이런 소개를 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먼저 이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신 이인표씨는 오래전부터 "한인이민자들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와서 정착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셨다. 그는 축산업 전공을 살려서 사슴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한인중에선 몇 안되는 목축업자이시다. 그는 한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도 하면서 도시의 한인들을 시골로 끌어들이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지만, 누구보다도 실망을 많이 하신 것 같다.
사실, 광활한 땅이 있지만, 이민자로서의 한인이 시골을 선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편의점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이 정도의 한인이라도 모일 수 있었겠는지. 편의점이 주된 비지니스고, 그외에 주유소, 모텔, 선물가게, 식당 등으로 한두집 늘어났고, 원자력 발전소등 회사에 다니는 한인들도 있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인표씨는 이제 70줄에 들어섰지만, 아이디어와 꿈은 청년들의 그것보다 더욱 젊다. 이번 모임에서 케빈과의 대화의 대부분을 이분이 담당하셨는데, 요지는 "한인 이민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정책을 시도해달라"는 것이었다. 딱히 한인이민자라고 하면 형평성에 위배되지만, 성실성, 영민함등에서 한인을 따라올 자가 없으니, 한인 언론사에 자치정부의 이름으로 광고를 내서, 한인들을 유치하고, 그들에게 편리를 봐준다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케빈은 정치가답게 그 자리를 어색하지 않게 넘어가고 했는데, 어쨋든 이번 웨스트 그레이 쓰레기 소각장에 많은 한인들이 일을 하게 될 것이니, 한인열풍이 일어나기 전의 "폭풍전 고요"의 날들인지도 모르겠다.
이날 케빈보다 더욱 정치적이셨던 이인표씨(옆사진). 한인유치에 시정부가 발벗고 나서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지난번 아이들과 퀘벡 버스여행을 했다. 그때 가이드의 말은 모든 이민자들의 말인 것 같아 기억에 남는다. 그의 말의 요지는 캐나다의 좋은 점은 아이들 교육과, 건강보험과, 노인연금, 자연환경등이다.
캐나다의 단점은 비지니스 하기가 어렵다.
많은 규정이 있어 그걸 다 충족시키고 사업을 한다는 것이 보통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큰 식당을 했는데, 하수구 처리 설비비용부터, 때마다 하수구 청소전문가를 고용해서 검사맡아야 하는 것등, 숨어있는 규정들이 너무 많아, 큰 곤혹을 치렀다고 했다. 돈 벌기 힘든 캐나다살이지만, 아이들과 부인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힘내서 살게 된다고 부연했다.
캐나다에 규정이 많은 것은 유명하다. 케빈은 여러 인종들이 모여살아서 모두가 자기 나라 식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세한 것도 규정으로 묶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말도 일리가 있지만, 스스로 해도 되는 일에 전문가를 고용해야 하니, 경영자 입장에선 참으로 힘든 노릇이 아닐 수 있다.
우리를 생각해보면, 시골로 들어온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이인표씨는 가끔 "성공사례"로 우리들(이곳에서 가게하는 몇몇집들)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성공이란 말의 뜻이 뭐냐?"고 웃으면서 반문하지만, 경제적인 것 이외에도 얻은 것이 많아서, 그렇게 심하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마이너스 통장일때가 많기는 하지만, 무일푼으로 들어왔던 그날을 생각하면 하루하루 바퀴를 굴리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감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 사진) 장선생님과 케빈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토론토에서 시골로 떠나오던 날, 큰형부는 내게 "자네, 죽으러 가네"하셨었다. 그러나 걱정하신 만큼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도시를 떠나면 큰일나는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소리치고 싶기도 하다. 괜찮다고.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라고, 같은 말쓰는 한인들이 서로 도와주며 사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가령 작은 마을에 1집의 한인가게가 있는데, 캐네디언이 경영하던 다른 한 가게를 사서 또다른 한인이 들어온다고 치자. 그러면 이게 십중팔구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 심심찮게 그런 경우들을 보아온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과다경쟁의 풍토가 되면, 서로에게 못할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못담글까? 최근에는 한마을에 서너집의 한인가게들이 서로 왕래하며 잘 지내는 곳도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싸우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란 단순한 논리로 이야기할수 없다. 그런 풍토를 고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생활에 지친 이들이 "귀향처"로 삼고 시골로 몰려올 날도 있을 수 있다. 그때를 대비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마음의 도량들을 넓혀놔야 할 것 같다. 그게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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