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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죄와 벌-러시아판 영화를 보고



"죄와 벌" 책을 읽은 건 아니다. 아마도 청년시절에 읽었을 게다. 그의 몇작품을 읽었다는 기억이 있긴 하지만, 냉정하게 볼때 95%는 내용을 다 잃어버렸으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명작을 영화로 만났다.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서점을 통해 세계 명작 명화 98선이 든 디비디 전집을 구입했다. "죄와 벌"은 98편중 첫번째로 내가 시청한 영화다. "죄와 벌"이 그간 여러 버전으로 영화화되었는데, 내가 본 것은 1970년대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흑백영화였다. 촬영기법이나, 선명도등에선 떨어지지만, 러시아를 배경으로 했고, 출연자들 또한 러시아 배우들이라 작가의 의중이 잘 드러난 작품이리라 생각한다. 자막으로 영어와 한국어가 있어, 나는 한국어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되돌려보기를 몇번 하면서 봐서, 시간이 길어졌나 했는데, 사실 영화는 장장 220분짜리로 거의 4시간 분량이다. 아무리 그랬다 하더라도 원작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런 것 때문에 영화만 보고 감상을 적는 나의 한계를 벌써부터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대는 러시아 페테스부르그 1860년대이다. 이미 그 시대에 자본주의가 퍼지기 시작하여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들이 있다. 주인공 로지온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한 법과 대학생이었으나, 학비가 밀려 학교를 휴학하고 있는 중이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로쟈라고 부른다. 


그는 "일"을 해야하는데, 오로지 하는 일이란 "생각하는 일"이다. 며칠이고 누워서 하루를 보내고, 몇푼의 돈이 없어 금품을 팔기위해 전당포를 찾아야 한다. 흔히 "저인간은 왜 일을 안해? 그러니 가난하지"하며 남들에게 비난을 받는 그런 류의 인간이다. 동굴같은 방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꿈을 꾼다. 그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돈을 만들기 위해 시계를 들고 찾은 전당포에서 노파는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내다본다. 그 눈에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의심하는 빛이 서려있다. 물건을 잡고 돈을 빌려주면서 선이자를 떼고난 다음 돈을 지불한다. 제 시간에 찾아가지 않은 물건은 노파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주인공은 두번째 방문했을때 범죄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의 동생은 어디 있나요" 물으니, 그 노파는 "왜 내 동생은 찾고 그래?" 퉁명하게 대꾸한다. 나중에 길거리에서 노파의 동생 리자베따와 동네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그 다음날 아침 7시에 리자베따에게 다른 일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침7시가 계속해서 공명을 갖고 울린다. 그의 범죄시간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다음날 아침, 노파를 도끼로 내려쳐 죽인다. 주인공 몸체의 반만한 왜소한 노파가 피를 흘린채 죽는다. 방에서 금품을 훔치고 나오는데, 동생 리자베따가 들어온다. 언니가 죽어넘어간 모습을 본다. 선량하고 듬직하게 생긴 그녀를 주인공은 같은 방식으로 죽인다. 


극은 범죄가 있고나서 휘몰아쳐 간다. 범죄전 완전 혼자였던 그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의 친구를 따라가서 만난 예심판사와의 대화에서 그 청년의 범행동기가 밝혀진다. 그는 "범죄에 대하여"란 논문을 작성한 적이 있다. 그 글을 그 예심판사가 읽었다. 예심판사는 스스럼없게 청년을 대하면서, 논문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 논문의 요지는 다음의 대화에 잘 나타나있다.


예심판사 포르피리 "한마디로 세상에는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간, 아니 범죄에 대해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 인간이 있다는 거 말이오. 그 눈문에 의하면 인간은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거든. 평범한 인간은 늘 복종을 하기 때문에 법을 범할 권리가 없지만, 비범한 인간은 법을 범할 권리가 있다는 거지, 그렇지 않은가요?"


라스꼴리니꼬프 "비범한 인간의 권리가 공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자신의 양심으로 어떠한 장애라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데 리쿠르고스나 솔로몬, 마하메드,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들은 새 법률을 선포하면서 그때까지 신봉하던 구법을 파괴한 것으로 친다면 범죄자입니다. 범죄자가 되지 않고서 그들은 결코 인류를 위한 건설을 할수 없었을 겁니다.


인간이란 물질에 지나지 않는 저급한 부류와 순수한 인간으로서 새로운 언어를 구사할줄 아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유형은 대개 보수적이고 질서적이며 복종입니다. 그러나 제2유형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피를 보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포르피리 "그렇다면 처음 문제로 돌아가서 그들이 처형당하는 건 아니겠죠?"


라스꼴리니꼬프 " 물론입니다. 생존시에 목적한 바를 이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는 도리어 그가 기존의 질서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처벌하죠."


포르피리 : 그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은 어떻게 구분하는 거요?


그들의 대화는 평범한 인간이 착각해서 그런 일을 할 경우 어떻게 되느냐로 번진다. 주인공은 그런 면에서 동의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여도 좋은 비범한 인간의 범위는 어떻게 되느냐고 포르피리는 반문하고, 주인공은 그런 천재적인 인간은 유전적으로 아주 극소수로 태어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그의 친구는 옆에 있다가 "양심에 비추어 유혈을 허용한다는 거네. 합법적으로 피를 흘려도 좋다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때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논문을 쓴 당사자가 자신을 비범한 인간으로 착각해서, 노파를 죽였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를 다그치지 않는다.


로지온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는가를 실험해보고 싶어했고,자신의 결정대로 노파를 죽였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극도의 불안감과 죄의식뿐이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않고 당당했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노파를 죽이지 않았다. 노파를 죽인건 악마다. 나는 나를 죽였다" 양심의 가책은 그에게 열병과 선행등으로 나타났다. 열병은 죄의식으로 인한 그의 몸이 반응한 것이며 선행은 가족을 위해 몸을 팔아 부양했던 창녀 소냐의 아버지 장례식에 가진돈- 그돈은 그의 엄마에게서 온 것- 모두를 주는 것등이 그런 일이다. 그는 소냐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데, 소냐는 그에게 자수할 것을 권하고, 본인은 그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동생과 엄마가 그가 사는 곳으로 온다. 여동생 두냐는 아름다운 교양있는 젊은 여성으로 나온다.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남자의 구애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또다른 남자의 구애를 받지만, 그는 돈만 아는 치졸한 인간임이 밝혀진다. 돈으로 매수하려는 여러 남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두냐를 품에 안고자 했던 가정교사집 남자는 주인공을 어떤 면에선 이해하는(같은 범죄자로서), 관찰자로 설정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아내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법망은 완벽하게 피했지만. 그러나 그는 결국, 금력으로도 폭력으로도 두냐를 제압할 수 없게 되자, 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그가 갖고있는 돈은 고아가 된 소냐의 의붓 동생들과 소냐에게 얼마간 남겨주고서. 그는 로쟈의 범죄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으며, 죽기 전날까지도 두냐의 사랑만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처럼 행동했다. 그와 로쟈는 유형이 다른 두 범죄자로 로쟈는 자수함으로 죄값을 치르는 것으로, 그는 죽는 것으로 자신을 심판했다. 이 두 범죄자들은 약간의 선행을 한다. 물론 선행이 범죄를 상쇄시켜 줄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왔던 것은 경찰과 범죄자와의 심리전이었다. 노파에게 물건을 맡긴 모든 사람들이 신고했음에도 라스꼴리니꼬프는 맨 나중에야 토설했다. 그가 열병에 들떠 헛소리하면서 범죄를 간접시인한 것도, 그의 논문에 나타난 범죄학으로 볼때도 그는 최웃길의 혐의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체포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포르피리에게 묻는다. 왜 날 체포하지 않는거요? 내가 도망가면 어쩔 거요? 하고. 그러나 그는 젊은 그의 앞날을 위해 자수할 것을 권한다. 그것이 체포되고나서, 혐의를 벗으려고 헛수고로 들어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범죄를 정리하고 벌을 받게 됨으로써, 얌심의 가책에 의한 "벌"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심판사는 그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당신이 죽였소" 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자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주지하면서 그에게 아량을 베푼다. 이런 모든 과정이 범죄자와 수사자 사이에 벌어지는 일인데, 그 격조높은 수사가 눈을 끌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수하게 되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된다. 영화는 자수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다막 인생인 것을 이런 식의 접근을 통해 보여줬다. 


이 영화에서 "죄"는 명백하다. "노파를 죽인 것"이며, "아내를 살해한 것"이다. 


현대의 법이 "죄"라 규정하는 것만 피하면 된다. 이 책은 오히려 "죄"보다는 "벌"을 더 세심히 다뤘다.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른 다음부터 자수할 때까지 그가 겪은 마음의 황폐함과 육체적 탈진등을 이미 "벌받고 있는 중"으로 묘사하고 있다. 


법안에서의 "죄"만 논하는 것은 모두에게 도망갈 기회를 준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은 법안에서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으로까지 확대한다면,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죄"는 바로 내곁에 있고, 나 자신이기도 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사랑"도 어떤땐 "죄"를 낳는다.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이다. 


이제는 영화에 대해서 나머지 소감 몇개, 소냐를 연기한 그녀는 마치 연극을 하는 듯했다. 중간중간 정지된 화면을 보는 듯한 그런 표정... 그것이 그녀의 연기 미숙인지, 마치 성녀처럼 그려진 소냐의 캐랙터를 살리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약간 어색하게 여겨졌다. 라스꼴리니꼬프의 표정은 압권이었고, 범죄 수사를 맡은 포르피리와의 대화는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책에서 두냐를 그렇게 많은 비중으로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두냐로 분한 그 여성은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단연 돋보였다. 그런 사람에게 남자들은 열광할만 하다 생각했다. 그녀의 고고함을 충족시킬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면,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본인의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그녀가 원한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영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만큼 감동이 있었다고 말할수도 없다. 어쩌면, 나는 제1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복종하면서 이 세상의 질서에 안주하는 사람. 그렇다고 해서, 라스꼴리꼬프의 인간유형이 맞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소냐는 가장 "죄없는 인간"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창녀로서 사회적으론 죄인의 자리에 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이었을까? 소냐가 보여준 자기 희생과 헌신인가 보다. 공권력(경찰)을 긍정적으로 그렸고, 죄인, 로쟈를 자수시키고,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소냐를 통해서 사회의 밝은 면을 보이려 했다. 또한 "죄"의 무겁고, 피폐함을 그리기도 했다. 


로쟈가 거처하는 시멘트 건물은 그야말로 사각의 시멘트를 파내어, 인간들이 거주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무덤의 느낌이 났다. 시멘트라는 근대적 요소가 들어와 사람들을 굳히고 있는 것인가. 한번 신으면 떨어지지 않던 나일론 양말처럼, 흑집에서 시멘트로 도약, 숨구멍없이 답답함 반면에 실용성을 추구하게 된 근대사회라는 영화의 무대를 떠올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로쟈가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의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흥미롭다. 집에 갇혀서 혼자 고민에 빠져있을 것 같은데, 그의 친구들, 경찰 관계자들, 가족들, 이웃들이 모여든다. 여동생을 돌봐주기로 약속하는 그의 친구로부터, 예심판사, 여동생의 두남자, 어머니와 여동생은 라스꼴리니꼬프의 무덤같은 집을 교대로 채운다. 천장에 닿을 것 같은 키큰 로쟈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찬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을 대해야 하는 죄인 로쟈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런 장면들에서 벌받는 라스꼴니니꼬프의 통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오늘날의 범죄인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들어가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텐데, 로쟈에게는 이들과의 관계가 그가 자수를 하는데 큰 작용을 하게 된 것 같다. 


"죄와 벌"도 다시한번 책으로 읽고, 그밖에 다른 작품들을 읽어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