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독특한 두 화가가 부부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멕시코에서 날라져와 온타리오 미술관에 전시가 되었다.
두사람의 삶과 사랑이 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대중 앞에 공개됐다. 그것은 은근한 통증을 동반했다.
Frida And Diago : Passion, Politics and Painting 2013년 1월까지 전시 AGO www.ago.net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의 열매를 들이마시면서 일종의 희열을 얻는다. 예술가들의 고통속에 태어난 예술품들이 그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누군가의 감성을 자극할뿐 아니라 기쁘게 하리라는 걸 알진 못할 것이다. 인간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승화시킴으로서 인류의 문화가 발전해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일궈낸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하며, 그들의 고통의 흔적들에 경의를 표한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바로 그런 고통스런 예술가의 전형이다. 교통사고로 몸이 부서졌다는 것 이외에도 사랑에 대한 고통, 정체성에 대한 고통, 예술에 대한 고통등이 더해져,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정지시킨다.
역사적으로는 사회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전세계가 세계대전으로 뒤숭숭하던 격변기인 1907년에 태어나 1954년에 죽었다. 어릴때 소아마비였던 그녀가 18세에 척추와 여러가지 뼈가 으스러지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몇번의 수술을 통해서, 걷기도 하고, 휠체어도 탈수 있게 된다. 22살때 사회주의자이자 그림의 스승이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나 결혼한다. 그때 디에고는 그녀가 세번째 부인이며, 21살의 나이 차이도 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사랑의 경력이 화려하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여동생, 친구를 포함한 여러명의 여자와 염문을 뿌렸으며, 프리다도 사진작가, 조각가, 공산주의자, 배우등등과 만났으며, 그중에는 여배우도 끼어있었다. 말하자면 레즈비언적이었던 적도 있었다는 말이다.
프리다의 일생은 그 자체로도, 방대한 양이며, 여러가지 검색을 통해 본 것으로는 20세기 예술가들을 소개한 ART란 사이트가 유용했다.
http://windshoes.new21.org/art-frida02.htm
이들의 사랑은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고, 프리다는 "I paint my own reality"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자화상을 비롯 일생을 화폭에 담아냈다. 3번의 유산과 디에고와의 결별과 재결합, 신체의 아픔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내면을 포착해낸다.
전시회장을 둘러보다가 어떤 그림앞에서 발길이 멎었다.
이와같은 느낌의 그림들이 많았는데, "프리다가, 혹시...."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그림들 옆에는 프리다의 실제 사진들도 있었는데, 사진과 그림이 거의 비슷했다. 말하자면, 남성인 듯한 느낌, 콧수염과 짙은 눈썹, 표정등이 남성의 얼굴에 여자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프리다는 아파서 누워있을 때부터 거울을 보면서,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림이 과장이 아니고 "현실적"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내 옆에 있던 노신사도 고개를 갸웃하며, 마침 그림을 뚫어지라 보고있었다. 그가 입을 연다.
"이 사람은 두개의 인간성이 있어요."
중얼거리듯, 혹은 내게 말하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는 그림이 그녀의 상상속에서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니 거의 똑같이 생겼네요."
"레즈비언이었다고도 하지요."
"그렇습니까? 혹,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강한 사람이.."
그때까지는 나는 그녀를 디에고의 부인으로만 알았었기 때문에 그 신사의 말이 수긍되지는 않았다.
"당신은 그림을 그립니까?
"네? 아닙니다."
"저는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노신사와 헤어졌다.
나중에 프리다의 약력을 찾아보니, 프리다는 단순히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남자처럼 여자를 사랑하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몇가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에 관한 것이다. 고래에 등장하는 금복이란 여자는 관능적인 여자로서 힘센 남자와 사랑을 나눴으면서도 나중에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같은 여자가 되기도 한다. 그 소설에서 금복은 콧수염도 기르고 양복도 입고 다닌다. 소설을 읽을 당시는 말도 안되는 발상이라 생각했는데, 프리다를 보고나니,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구나 싶다.
또한 아미쉬 여자들. 화장품을 거의 쓰지 않고, 현대문명과 격리되어 살고 있는 아미쉬 여자들 중에는 콧수염 등 털이 꽤 성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뿐 아니라, 바로 엊그제 식물인간으로 수십년 누워있었다는 여자의 사망기사를 봤는데 그녀 역시 수염이 꽤 길러있었다. 수염은 남성성의 대표적인 것이며, 여자들로서는 수치이며 감추고 싶은 것들인데, 프리다는 그런 터부를 무시했다. 약력에서 보면, 디에고와 살때는 여성스럽게 머리도 기르고, 얼굴을 가다듬고 했지만, 그와 헤어져서는 남성성이 밖으로 드러났다고도 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다중적 색깔이 프리다에게서 확연히 드러난다.
잘라진 머리카락을 지닌 자화상(프리다)
동성애자는 선택이 아니라, 타고난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발언들이 많다. 그러나 이렇게 후천적으로 길러질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프리다의 동성애 경향은 남자에게 예속당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한 몸부림이었으며 여성성까지 허물어뜨리면서 무언가를 추구했던 것같다.
그러나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인생에서 빼낼수 없는 척추같은 사랑이었다. 그녀는 디에고를 자신의 남편이자, 아버지, 아들, 온우주라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 디에고는 프리다를 "자신보다 더 잘 그리는 뛰어난 화가"라 추겨세웠으며, 그의 말마따나 이번 전시회에서도 프리다의 작품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디에고 역시 거장이다. 그는 그의 공산주의 철학을 작품에 접목시켰고, 벽화 같은 대작품을 일생동안 추구했다. 예술품이 전시장안에만 머물지 않고,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는 취지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생전에 6만 스퀘어 피트의 벽화를 완성했으며, 이 넓이는 미켈란젤로의 1만2천 스퀘어피트의 천지창조 벽화와 비교할때 그 작업의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벽화 작업하는 디에고(사진)
그가 벽화작업하는 영상이 전시회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작품 앞에서는 휴식없이 24시간 내내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벽화외에도 프리다의 작품들에 비해 크기면에서 대작인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었다. 특별히 그의 작품들은 둥글둥글한 곡선이 인상적이며, 멕시코의 생활상을 그림에 담았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자화상
회랑을 한바퀴 돌고, 다시 한번 돌면서 내 시선이 멈춘곳은 "Dance to the Sun"이라는 누드(?) 작품이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자신의 모양을 닮은 둥글둥글한 원형에 가까운 그림들이 많았는데, 이 작품은 원형의 정수를 보여줬다. 다른 작품들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아마도 디에고의 대표작품은 아닌가 싶다.
디에고는 파리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피카소와 교류를 맺었다. 그곳에서 초현실주의,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번 작품전에선 기하학적인 큐비즘의 작품들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세모 네모 원형과 직선등을 통해 물체를 분석해서 보여주는 큐비즘의 그림은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하면 된다.) 디에고는 유럽의 화풍이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멕시코의 원주민들과 생활상을 그리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위의 그림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화풍"의 하나로 불리겠지만, 어쨋든 모든 물체가 곡선으로 마무리되는 유려하고, 율동적이어서 정감이 갔으며 태양이 연상되기도 하는등 상당히 열정적으로 보인다.
<꽃 축제: 산타 아니타의 축제>,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는 6살때의 소아마비로부터 시작해서, 17살때의 교통사고, 그후 후유증으로 인한 다리 절단까지 육체적으로 최악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3번의 유산까지 겪어서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침대, 간호사, 아이같은 어른, 피, 척추 교정 코르셋은 그녀의 육체적 현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림작업을 하는 프리다의 사진.. 작품전에는 사진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작가 니콜라이 머레이와는 사귀기까지 했다. 그래선지, 머레이가 찍은 프리다의 인물사진은 대단히 선명하고, 뛰어난 영감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사진들은 프리다의 작품전에 도움을 주는 취지에서 전시됐겠지만, 나는 사진과 그림의 일맥상통함에 또한번 놀라기도 하였다. 사진의 아마츄어로서 그림에도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림을 알아야 사진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해서 낙심도 되었다.
또한편, 육체적인 고통에 더하여 디에고와의 사랑에서 생기는 고통과 환희는 그녀의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데,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에서는 범신론적인 믿음을 보여준다고 할까? 우주의 음양이 프리다와 디에고를 안고 있고, 프리다는 어른 디에고를 안고 있는. 현실적으론 디에고로부터 보호받고 있지만 디에고를 아들처럼 키우는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결국 디에고의 간호를 받으며 생을 마감한다. "Nobody will know how much I love Diago"란 말을 남기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결국 그녀는 디에고에게 자유를 주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승화시키려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 같다.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이다.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프리다
프리다 디에고전은 작품만이 아니라 그들의 일생을 들여다 볼수 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예술은 삶과 떨어져 생성되는 것은 아님을 또한번 느꼈다.
그림에 관심있는 막내딸과 그녀의 친구를 데리고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토론토 나들이를 하였다. 미리는 오래전부터 프리다 이야기를 하였다. 그림은 내게 친절하지 않은 장르이고, 그래서 더이상 알기를 원치 않았던 낯선 지대였다. 이번 전시회에서 프리다와 디에고를 만난 것이 우리 부부에게 미술과 가까와지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전히 부모로서 자식에게 본격 예술가의 삶을 기대하고 싶지 않다. 고통스러울까봐. 그러나 아이의 삶에 떨어지는 숙제들은 우리가 간섭할 수 없을 게다. 그 숙제가 너무 무겁지 않기를 소망할뿐.
전시회장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멕시코식 추모방식이라며 두 사람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AGO입구에 세워진 전시회장 선전 기둥, 자신의 일생을 그린 프리다와 멕시코의 역사를 그린 디에고
의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다는 여자이길 거부한 여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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