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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스 카운티 산책

그레이 부루스 한인회를 꿈꾸며

15년전 페이슬리라는 "오지"로 이사왔을 때, 우리 가족에겐 Midtown Foodmart란 가게와 우리를 이곳에 소개시켜준 한 가정밖에는 아는 곳이라곤 없었다. 나는 그 당시 이민온지 7년 이상이 지났었지만, 토론토에선 영어 한마디 쓸 필요가 없었고, 그 핑계로 영어수준은 갓 이민온 사람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생업을 찾아 오긴 했으나, 가게 보는 일은 일단은 내 소관은 아니었고, 남편에게 일임하였다. 


그랬는데, 온지 며칠 되지 않아, 그 당시 3살이 되어가던 막내 엉덩이에 뾰루지가 커가기 시작하였다. 막내를 데리고 병원에 진찰하러 남편이 가고, 나는 할수없이 가게를 봐야했다. 몇시간만, 눈치로 캐쉬를 보면 될줄 알았던 그 사건은 막내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뾰루지 제거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소견이었고, 나는 전화통화만 남편과 하고, 남편은 한 이틀정도 병원에서 막내와 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헬퍼 한명과 번갈아가며 일했던 나는 현금계산기가 무슨 이유로 안열려서 낑낑대는 것을, 옆집 식당의 아줌마가 와서 도와줘서 열었고, 매일 신문을 챙겨놓게 했던 손님은 신문을 찾으러 왔다가, 내가 알아듣지를 못하자, 화를 내면서 나가기도 하였다. 잔돈이 없어서 또 땀을 흘렸던 기억도 있다.


며칠후 막내를 퇴원시켜 데리고 온 남편은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병원 응급실에 가서 진찰을 받는데, 남편이 한국인임을 알게 된 의사는 여기에도 한국인 의사가 있으니, 그에게 연결시켜주겠다고 해서, 한인의사에게서 막내의 수술권유를 받고 수술하게 됐고, 게다가 그 의사의 부인이 식사를 싸다주어서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병원이 있는 워커톤이라는 지역에는 장사하는 한인이 있어서 그집에서도 막내 문병까지 왔었다는 것이다.


나는 가게에 묶여서 움직일 수 없을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생소해서 온몸이 위축되어 있을때 그런 소식을 들으니, 눈물이 핑돌았다. 아, 이것이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구나" 실감했던 것 같다.


그때 막내를 집도했던 한인의사와네는 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할 때까지 좋은 관계를 맺으며 잘 지냈다. 


얼마후에는 지나가다 들리셨다면서 지긋하신 나이의 한인부부의 방문을 받았다. 이 지역에 이사온 것을 환영한다면서, 여러가지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중 남자분은 우리 옆마을 체슬리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계신 분이었다. 장선생님은 그 고등학교를 은퇴하시고, 현재까지도 우리 가족과 많은 한인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계신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처음에 이 지역에 도착했을때 도움받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걱정은 그런 것이다. 나처럼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곳에 적응하려고 찾아왔다가, 혹 외로움에 도로 도시로 떠나가는 한인은 없을까, 처음 만났던 한인과 불편한 사이가 되어, 그것을 회복못하고 더 이상의 한인친구를 사귈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까, 뭐 그런 것 말이다.


이럴때 "니나 잘하고 사세요"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은 "나홀로" 잘살수는 없다. 이웃과 함께 웃어야 그 즐거움이 지속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생성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다면, 그 누가 왔다가 떠나가든, 외로움, 어려움, 절박함에 처하든 누구도 책임질 사람은 없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한인회가 선다면 말이 달라진다. 적극적으로 수소문하여, 가까운 한인들과 연계시키고, 그들이 필요한 정보들을 나눠줄 수 있을 것이다.


자 솔직히 말하자. 그레이 부루스 한인회를 생각하는 중이다. 그레이 부루스는 토론토 서북쪽의 8,500평방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웬사운드라는 도시 하나와 크고 작은 타운들로 형성되어 있다. 각 마을에 한인들은 한두 가정씩 있으며, 장사하는 한인들이 65%정도, 그외 직장인 은퇴자들로 구성되어있다. 오웬사운드 실업인협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공식적인 만남의 장치를 갖고 있고, 오웬사운드 한인장로교회에 속하는 사람들도 또 가끔씩 얼굴을 대한다. 그밖에 한인들은 각자가 친한 사람들과 얼추 연관을 맺고, 살아간다고 본다. 전체 한인가정은 60여 가정쯤 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것도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나는 실업인협회와 교회 소속이어서 대체적으로 많은 한인들을 알고 있는 편이다. 지난 2년간은 실업인협회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회원들과 어느정도 의사소통할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또한 올해 한인들을 대상으로한 "직업 스트레스 설문조사"를 하면서, 조금 더 깊게 한인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한인 이민자들은 "너무 많이 일한다"는 게 설문조사한 후의 나의 작은 결론이었다. 모두가 일하는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미덕이 된다. 그러나 캐나다사회의 사람들은 많이 다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휴가를 떠나고, 일주일 40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과다노동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60시간-80시간 일하는 사람들은 한인들뿐이다. "일"에서 사람들이 밖을 한번 쳐다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는 누가 책임지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지만, 생활의 규모를 줄이고, 경비를 줄이고, "노는 데" 욕심을 부리면 조금 개선될 여지가 있다. 사람들이 일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특별히 놀만한 무엇이 없어서 일수도 있겠다. 노는 것도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어느날 갑자기 잘 놀아지지 않는다. 나의 바램은 "놀이터"로 사람들을 끌어내는 일이다.


지난 8월 실업인협회에서 주최한 한인야유회가 있었다. 말할 기회만 있으면, "한인회" 소리를 끄집어내어 그자리에서 한인회 추진위원장(?)으로 얼추 인정을 받았다. 이제 가슴에 그 말만 꽉 들어차있기 때문에 되든 안되든 부려버려야 한다. 어쩌면 이 일의 길이 열리려는지, 설문조사 연구교수님이신 노삼열 박사님께서 조만간 그레이 부루스를 방문해서 "이민생활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기로 하셨다. 수십년간 한인에 대한 연구를 해오신 교수님으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이민을 잘사는 것이냐"이런 것들을 듣게 될 행운을 갖게 될 것이다.


많은 수의 이민자들은 가족을 고국에 남겨놓고 온다. 친정엄마가 없는 상태에서 아이를 분만한 나의 예전 친구들은 출산후 후유증을 크게 앓는 것을 보았다. 여자에게는 가장 어렵고 고통스런 순간, 그걸 생활에 바쁜 남편과만 감당했어야 했으니. 그들은 역이민을 가기도 하고, 우울증을 오래동안 앓기도 했다. 이민지에서는 가족의 의미를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한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바로 가족이 될수도 있다. 가족은 뭔가. 어려움, 즐거움을 같이 나누는 집단 아닌가? 


어제의 추석 파티는 정말 "훌륭"했다.


살림의 달인 정옥언니는 추석을 맞아 송편빚을 반죽과 속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초대했다. 물론 송편빚기전에는 거창한 저녁식사를 함께 나눴다. 최근 운동을 함께 해서 자주 모이게 된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어제밤을 수놓았다. 남정네들이 송편을 빚고, 네것과 내것을 비교하고, 강원도 출신은 강원도식으로 손가락 자욱을 낸 송편을 만들고. 보라색, 쏙색, 노란색, 고구마, 쑥, 호박으로 물들은 송편은 색이 다른 우리들 마음처럼 개성껏 자태를 뽐냈다.





어제밤을 생각하면, 송편을 빚는 식탁위에  자주빛, 노란빛, 쑥빛으로 웃음이 고운 가루가 되어 우리들 머리위로 쏟아져내렸던 것만 같다. 우리들은 서열을 따져 서로 "성님"으로 부르며, 종가집 흉내를 내며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을 흘린이도 있었다. 그는 25년만에 이런 기분 맛본다고 하였다.


나는 캐나다로 이민와서 한국명절을 버리고 살았다. 그것이 부끄런 줄도 몰랐다. 그런데 웅성웅성, 모락모락 그런 분위기에 있으니, 정말 옛 고향생각이 났다. 어쩌면 이런 것들도 이땅에 퍼뜨릴 수 있는 것이겠구나 싶다.


대략 그레이 부루스 한인들은 골프, 낚시, 사진, 캠핑, 하이킹 그리고 기타등 악기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서로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이런 것들이 한군데로 모이고, 일년에 한두번이라도 한인회의 이름으로 만나는 것이 지금의 내꿈이다. 여러분들, 응원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