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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그의 이름은 나비... 빠삐용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쓰레기 치우기가 한창이다. 프랑스에 도움이 되지않는 범법자들을 모아서 배에 실어 남미의 한쪽 끝, 기아나로 옮겨간다. 배를 타러 가는 죄수들을 보러 프랑스 시민들이 줄서있다. 그중엔 빠삐용의 애인임직한 여자도 있고, 루이 드가의 아내인듯한 여자도 있다. 빠삐용의 여자친구는 "당신은 돌아오실 거에요" 손을 흔들면서 말하지만, 빠삐용 옆에 서서 같이 가는 죄수 한명은 빠삐용에게 "그렇게 되지 않을걸" 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영화는 처음부터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함으로 시작하더니, 갈수록 농도가 진해져, 심장의 맥박수가 올라가기만 한다.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는 빠삐용의 탈출시도와 되잡힘으로써 형벌이 점차로 심해져, 당하는 사람에 비한다면 그 고통이 1%에도 못미치겠지만, 보는 사람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다.


죄수들을 세워놓은 마당에서 제복을 입은 검사는 수형생활을 마치면, 수형 기간과 똑같은 기간을 간수밑에서 일하는 제도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조국 프랑스는 잊고 이 옷을 입어라" 하면서 죄수복을 건네준다. 8년 이상의 장기수들은 모조리 기아나로 보냈다. 기아나로 가는 배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수감된지 1년안에 40% 이상이 죽어나가는 최악의 형무소다. 최소 16년을 머물러야 자유의 몸이 되니, 그곳에 가서 다시 나온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인 형무소 이야기와 죄수들 이야기다.


스티브 맥퀸이 연기하는 빠삐용은 "나비 문신"을 가슴에 새긴 남자다. 그는 금고털이였지만, 살인죄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걸로 나온다. 빠삐용은 나비라는 프랑스말로 그 나비는 "자유"를 상징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도망자, 탈옥 등의 남성적인 이미지에 나비라는 연약한 이미지는 자유를 빼앗기고 언제든 짓밟힐 수 있는 연약한 죄수의 이중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빠삐용이라는 프랑스어와 한국어 나비는 같은 의미라고는 도통 연결되지 않는 언어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프렌치에 문외한인 나만의 문제일른지도 모르겠지만.


스티브 맥퀸과 함께 이 극을 끌어가는 중추는 루이 드가라는 위조지폐범이다. 이 역에는 더스틴 호프만이 나오는데, 눈이 돌아갈 정도의 돋수높은 두꺼운 안경을 쓴, 천재지만 흐린 시야를 가진 뭔가 부족한 듯한 엉성한 캐랙터여서 그가 더스틴 호프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삐삐용 역은 당연히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하겠지, 했으니 무식도 찬란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빠삐용은 그의 안전을 지켜주기로 하고, 그의 "돈"으로 탈출을 시도할 계획을 한다. 처음엔 계약으로 만난 사이였지만, 빠삐용이 목숨을 바쳐 그의 신변을 지킴으로서 차츰 "끈끈한 유대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 규칙은 침묵이다. 교도 따윈 안한다. 우린 목사가 아니고 집행관이다. 산 동물을 통조림으로 만들듯 우린 위험인물을 양으로 만든다. 너희들의 육체와 영혼을 분쇄하는 거다. 머리를 분쇄해서 모든 희망을 버리게 하고 자위로 힘을 차츰차츰 고갈시킨다"


이것이 절대로 과장된 협박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지, 미쳐가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보여준다. 


죄수들은 갓 구워진 붉은 벽돌처럼 거무칙칙하다. 형무소 역시 쇠붙이에도 식은땀이 흐르듯 축축해보인다. 어디에고 희망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빠삐용은 언제나 탈출을 염두에 두고있다. 그가 탈출하려고 하는 이유와 강력한 힘은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한 죄수는 간수밑에서 일할 수 있는 보직을 주겠다며 접근해온다. 그에게 돈을 건넸지만, 건강검진 받는데서 루이 드가가 발행한 가짜 국채 때문에 손해를 본 간수에게 들켜 심한 노역이 있는 "킬로 40"으로 보내진다. 죽은 사람옆에서 밥을 먹는 사람, 죽은 사람의 남은 밥을 3인분으로 나눠먹는 죄수들의 이야기부터, 잘때는 죄수 전부가 한발씩 쇠고랑을 차고 있는 부분, 완벽한 형무소 생활이 사실묘사로 그려진다. 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는 기아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탈출한 앙리 샤르에르란 사람이 쓴 자전소설을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빠삐용은 간수에게 얻어맞는 친구를 구해주려다가 도망친 죄로 붙잡혀 독방생활을 2년간 하게 된다. 다섯 걸음도 안되는 작은 골방에 2년을 갇혀있어야 하다니. 게다가 친구 드가가 몰래 넣어준 코코넛이 발각나 6개월간은 빛이 차단되고, 먹을 것도 절반으로 줄어든 형벌을 받게된다. 독방에서 빛이 차단되는 장면이 강렬했다. 하나씩 빛이 줄어들면서 결국 모든 빛이 막혔을때, 화면은 정지된 스크린처럼 깜깜해졌었다. 몇초후에 손바닥만한 빛이 새어들어오고. 그는 마치 벌레처럼, 혹은 땅속에 묻힌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배고픔은 벌레를 잡아먹거나, 감옥방안에 떨어진 것들을 줏어먹으면서. 코코넛 준 사람을 토설하라는 간수의 협박에도 그는 친구의 이름을 불지 않는다. 그의 신뢰는 거의 죽음 직전까지 그를 이끌지만, 유혹을 이겨낸다.




독방은 음식반입 때등 호로라기와 탁탁 문두드리는 소리로 운영된다. 침묵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구경은 가끔씩 찾아오는 머리깎는 시간. 독방의 작은 쪽문이 열리면 머리를 밖으로 내밀고 순서를 기다린다. 간신히 옆방 사람의 얼굴을 볼수 있고, 한두마디 할수 있다. 다 죽어가는 몰골의 옆방 죄수는 그에게 말을 건다. "내 모습이 어떻소. 내가 볼때는 괜찮은데 말이요.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서 그러는데." 빠삐용은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 다음번 머리깍는 날에 보니, 그 노인의 쪽문은 닫혀있다. 이 장면은 나중 그가 옆방의 새 죄수에게 자신의 몰골을 물어보는 장면으로 다시 삽입된다. 6개월간 빛을 못쬐고, 그나마 절반으로 준 음식으로 거의 아사 직전으로 몰린 그는,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똑같은 표정으로 물어본다. 


2년 독방 수감후 감옥병원에 들어간 빠삐용은 다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루이는 간수들을 돈으로 매수해 살아보자고 하나, 그는 그것으론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루이의 돈으로 배를 물색하고 다른 청년죄수와 함께 어렵게 탈출하는데, 언제나 탈옥하는데 소극적이었던 루이 드가는 자신의 도움이 밝혀지게 되어 할수없이 함께 도망친다. 돈을 받고 배를 주기로 한 이들은 언제나 함정을 파고, 돈만 집어삼키고 그들을 다시 잡아들이는 파렴치한들이다. 그들을 포획하려 기다리던 인간사냥꾼을 죽인 새 사냥꾼의 도움으로 나병환자들의 섬으로 가게 된다. 


나병환자들의 섬에서 병균이 옮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환자들의 도움으로 배를 마련해서 떠난다. 나병환자 대표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민들이 모금한 돈이라며 건넨다. 배에 오른 도망자 셋은 처음으로 마음껏 웃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거센 파도와 싸우고, 루이 드가의 발목부상의 어려움을 딛고 천신만고끝에 도착한 해변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 "증명서"를 요구하는 이들이 다가온다. 다시 세사람은 뿔뿔이 흩어지고, 영화는 삐삐용을 쫓아 계속된다.


쫓기다가 물속으로 떨어졌던 그가 깨어난 곳은 작은 부족들이 있는 어느 해안가. 추장의 지휘 아래 부족들이 평화롭게 사는 마을이었다. 밑에만 살짝 가리고 상반신은 나체인 부족민들은 바닷가에서 조개나 홍합을 채취하고, 조개속 진주를 깨내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 마을 사람들과 빠삐용의 동거를 인간의 언어를 배제한 채 화면으로만 보여준다. 단 한마디의 말도 필요없는 장면들이 이어지고, 추장이 빠삐용의 가슴에 새긴 문신을 자신도 갖고싶다고 손으로 의사표현을 한뒤, 정성껏 문신을 만드는 장면을 끝으로, 그 다음날 그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흔적없이 사라진다. 빠삐용이 인간답게 잠시 살았던 시간이었다. 그들이 왜 없어졌는지는 잘 나타나있지 않다. 아마도 부족의 안전을 위한 추장의 결단으로 보인다.


다시 빠삐용은 살곳을 찾아 도망다니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수녀원이었다. 관중들이 이제는 그가 쉼터를 얻게되나 하는데, 수녀원 원장의 고발로 그는 다시 처음 떠나왔던 기아나의 감옥으로 보내진다. "증명서"가 없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서 더 강한 형벌로 다스려진다. 독방 5년후, 거의 백발의 노인이 된 그는 자신과 함께 도망쳤던 젊은 청년 죄수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그는 "자유다"를 외치며 죽는다. 죽음 즉시 그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지고, 상어의 밥이 된다.


독방 형기를 마친 그가 보내진 곳은 악마의 섬으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선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절벽과 조수, 그리고 식인 상어가 자연방어를 해주는 곳, 그곳으로 가니, 제한적인 자유가 보장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루이 드가를 만난다. 처음엔 루이가 그를 모른체 한다. "나는 네가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했다"라는 루이의 말로, 그의 자유를 빌어왔다는 걸 알게 된다. 




언제나처럼 탈출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루이는 친구의 탈출제안에 긍정 하는 척 하지만, 나중에는 함께 하지는 않는다. 돼지를 키우고 야채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빠삐용은 오랫동안의 연구를 통해서 7번의 파도가 치며, 마지막 7번째 파도를 타면, 안으로 밀려들지 않고, 조수에 밀려서 육지로 가게 될 것을 확신한다. 함께 떠나기로 한날, 루이는 친구에게 "나는 안가기로 했다"며 친구의 안녕을 빌었다. 빠삐용과 루이는 서로를 이해하며, 깊은 포옹으로 인사를 고한다. 감옥에서 자신을 살려주었고 또한 죽일뻔한 코코넛이 이번에는 자신이 안고 건너갈 작은 배가 된다. 빠삐용은 코코넛이 든 푸대자루를 먼저 던진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나면, 이 영화는 탈출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우정"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목숨을 내놓고 산 두 사람, 결국 자신의 색깔대로 삶의 마지막을 선택한다. 그 선택을 서로 존중하면서.


빠삐용 영화를 "생애 최고의 영화"로 꼽은 사람의 리뷰를 읽었다. 그럴만 하다. 


뭐라 말할까? 빠삐용의 파란 눈과 하늘, 그리고 넓은 바다의 파란물결은 자유를 향한 갈망을 표현한 색들로 보였다. 어떻게 눈빛이 그렇게 파랄수 있을까? 그 코코넛 푸대자루 위에서 "이놈들아, 나 여기있다"를 외친다. 아직 안죽었다는 말이고, 너희들이 잡아넣은 곳에 그대로 있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너희들의 억압앞에서 결코 죽은 적이 없다는 말이겠다. 그가 도망치다가 죽더라도, 그는 이미 자유를 쟁취한 사람이었다. 


빛이 차단되어져가는 감옥안에서 그는 꿈을 꾼다. 높은 의자에 앉은 그 누구가 그를 죄인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는 그를 향해, 나는 결백하다. 증거도 없이 누명을 썼다고 항변한다. 그 심판관은 그에게 너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대단한 죄를 지었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이다. 빠삐용은 그때 아무런 말도 못한다. 그리고 "나는 유죄"라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돌아선다.


그가 탈출을 꿈꾸는 그 이면에는 "인생을 낭비한 죄"에서 탈피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할수밖에 없는 것은 죽더라도 탈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를 향하여 그는 비상한다. 절벽위에서 팔을 벌리고 나비처럼 훨훨 난다. 


영원할 것 같았던 기아나 감옥은 결국 폐쇄되고 현재는 스러져가고 있다. 남미 한쪽 작은 나라 기아나는 많은 브라질 불법체류자들이 있는 가난한 나라라고 한다. 아직도 프랑스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실화에 바탕한 것이니, 빠삐용에게 누명을 씌운 진범과 그에게 종신형을 내렸던 검사는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다 떠났는지, 루이 드가의 부인은 남편을 구해준다고 하고서는 그일을 하던 변호사와 결혼했다는 데 그녀의 삶은 어떠했는지, 기아나라는 형무소를 세운 프랑스 정부 관계자들과 간수들, 죄수들 그 모든 것들의 무게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빠삐용은 베네수엘라 주민권을 얻어 그곳에서 살다가 1973년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이 드가는 영화속에서 "유혹을 견디는 것이 인격의 척도라고 했어"하는 말을 한다. 루이 드가를 비롯하여 함께 모의하고, 눈빛을 주고받고, 안부를 걱정했던 다른 친구들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인생의 극한에서도 인격을 잃지않았던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고, 비열했던 이들은 감옥 바깥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의 마음을 훔치고, 돈을 갈취해낸 인간사냥꾼들이다. 그리고 죄를 지었다고 먼먼 이국땅으로 보내버린 프랑스 조국의 나쁜 인간들이다.


제도는 언제나 깡패처럼 사람을 잡아 후려칠 수 있다. 그런 일이 덜 일어나려면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 정치가들을 지켜봐야 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그냥 놔두면, 좋아지지는 않고, 계속 악법이 생성된다. 살면서 해야할 숙제가 꽤 많다. 인생을 낭비해서도 안되고. 마음이 은근히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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