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이모의 딸 천안언니는 헤어지기 전, 들기름을 꺼냈다.
2병 준비했는데, 한병을 잘 싸려다가 깨뜨려버렸어. 이 한병도 캐나다 가져갈 수 있으려나, 언니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몇겹으로 싸맨 들기름 한병을 줬다. 그리고 딸, 결혼식 축의금이라며 봉투도 줬다. 막내이모 큰딸 인천언니도 소식만 듣고 아무런 것도 못줬다며, 또 봉투를 쥐어준다. 한국에서는 딸 축의금은 부모가 챙기는 거라는 조언을 겸허히 경청하곤, 귀중한 "한국돈"을 잘 사용했다. 작년 딸 결혼식의 축의금을, 액수만 기록하고 일푼도 건드리지 않고 딸네 부부에 주고 났더니, 당연하면서도 무언가 서운한 그런 것이 있었다. 돈 한푼 없이 결혼식을 치루게 돼서 결혼 비용도 사돈댁과 우리가 절반씩 부담했으니, 축의금이 널름널름 넘봐졌던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그러나 아직도 공부중인 딸과 사위, "결혼비용 때문에 결혼 못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며 협조할 의사를 충분히 표현했더니, 결혼이 진행되었던 터라, 처음부터 마음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애들은 축의금으로 신혼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지 6개월도 넘은 후에 내게 건네진 축의금은 딸 결혼을 빌미로 "사욕"을 채우게 해줘서 너무 짜릿했다. 언니들도 모처럼의 서울외출이었다고 했다. 강남구청에서 만나 인천언니가 맛집찾기로 알아낸 전복 삼계탕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집이 바로 그런집이었다. 하루동안 팔아야 할 양을 정해놓고, 그 이상은 만들지 않는 방식. 우리 뒤로 온 4명의 아줌마들은 1마리 남은 전복삼계탕 때문에 3명은 다른 음식을 먹고, 한사람만 주문할 수 있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보면, 매상보다는 음식의 질과 그 음식을 감당할 만한 식당의 규모등을 고려하여, 그런 처방을 쓰는 식당들이 있음을 알게 됐는데, 그런 맛집중의 하나를 방문한 것이다.
삼계탕집을 나와서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천안언니가 남대문에 있는 안경점을 가야한다고 했다. 시장을 볼 수도 있으니, 쫓아가기로 했다. 언니는 가족들이 이용한지 30여년이 되는 안경점인데, 형부가 주로 다녀서 잘 모른다고 했다. 골목이 너무 많아 찾기가 쉽지않아 보인다. 전화로 여기저기 물으면서 찾아댕긴다. 나같으면 금방 포기하고, 다른 안경점으로 갔을 것 같다. 내가 포기가 빠른 사람인지, 언니가 집념이 강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결국 찾았다. 어느 골목 한쪽에 있었는데 아주 작은 안경점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에 수많은 안경사가 있어 손님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서비스를 해주는 것을 보니, 잘되는 안경점임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언니가 안경을 맞출 동안 시장을 둘러보고 오라 해서 나갔는데, 휘적휘적 헤메다보니, 갑자기 모든 의욕이 없어지고, 한국에 와서 대낮에 처음으로 졸리기 시작했다. 다시 안경점으로 들어갔다. 같이 기다리기로 하고 앉았는데, 곁에 커피머신이 있다. 대합실같이 생긴 긴 의자가 따뜻하다. 커피를 마시며, 안경사들이 손님을 봐주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 기운이 솟기 시작했다.
나중에 천안언니는 그집이 가장 싸고, 또 잘해준다고 했다. 30대인 딸이 어릴때부터 이용하던 단골인데, 천안에서부터 찾아오는 정성을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보인다. 장사해본 속셈으로 어름해봐도, 매출이 장난아닐 것 같았다.
언니들과 남대문을 훑고 돌아다녔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호떡집에 장사진의 줄이 서있어서 우리도 줄서서 호떡을 사먹었다. 그날 큰언니가 사다달라고 노래를 불렀던 덧버선-꽃무늬, 양말처럼 생겼으나 양말위에 신는 그것-을 왕창 살수 있었다. 큰언니는 몇년전 한국에 갔다가 그걸 사와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줬는데 모두가 너무 좋아한다 하였다. 내게 신신당부했었다.
또 나는 좀 얇은 패딩, 긴팔과 조끼를 샀다. 하얀색으로. 그 패딩은 너무 얇으면서 따뜻해 몇개 더 사올걸 입을때마다 남대문 시장 생각이 난다.
이종사촌끼리 가까운 편이다. 특별히 둘째이모, 막내이모 가족과 함께 하는 채팅방이 있어 소식을 나누고 있다. 사촌끼리도 또래끼리 어울려서 언니들과 나는 크게 공유한 추억들이 없는 편인데, 이번 방문에서 친동생을 만나듯 만나주었다. 운산오빠네도 갔었는데, 이번에 처음본 올케는 "사촌들을 수소문하여 하룻밤 여기서 머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느냐" 제안하기도 했다. 사실 올케네 거실은 조용한 숲속에 있고, 전면이 유리로 틔여있어, 그곳에서 맘편히 사촌들과 노닥노닥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마침 사촌오빠는 그날 집에 없었기에, 오빠를 볼겸 다시 오라는 말이었다.
운산올케는 원래 가족들을 많이 불러모으고, 대접하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농사를 짓는 운산오빠네는 큰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가족들에게 넉넉한 쉼터를 제공해주는 것 같았다. 올케는 사실 나를 보면서 내 뒤에 있는 엄마를 생각했고, 또 올때마다 농사짓는 오빠네를 생각해서 큰언니가 모았다가 보내주는 "고무 면장갑"으로 얽힌 큰언니와의 우정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간만에 오빠네 온 가족까지 모이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다. 딱 내 스타일이다.
까딱하면 민폐가 될뻔한 사촌모임이 취소가 되었다. 운산 올케가 감기로 몸이 편찮은데도 모임을 주선하려고 해서, 주변에서 말렸기에 망정이지. 나는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혹은 새로운 경험을 선호하는 편이라, 오라고 하면 갈뻔하기도 했다.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 되었을텐데, 그것이 취소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오빠는 둘째이모의 큰아들이다. 오빠네서 들려오는 고구마캐는 얘기, 지천인 봄나물과 옥수수, 고추 수확하는 얘기등을 전해들으면서 오빠네는 꼭 방문하고 싶었다.
막내이모네에서 놀았던 기억은 우리 10자매(놀라지 마시길, 혹시 모르셨다면) 모두가 거의 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모가 우리를 공주처럼 대우해 줬다는 것, 아침이면 큰 밥솥에 계란찜을 해주고, 밤이 되면 뒤간을 가야하는데, 이모네 언니, 오빠와 같이 나가서 밖에서 망을 봐주면서 볼일을 봤던 기억과 이모네 샘물 곁에 있던 빨간 앵두나무에 올라 앵두를 따서 먹었던 그 기억까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막내이모께 새삼 감사한 마음이다. 언니들과 온양온천에 같이 가기로 했다가, 코로나 발병소식이 중국에서 막 들려올 때라 온천여행은 취소했다.
고향 서산에는 오빠네와 둘째언니네가 산다. 서울언니 형부와 나래를 데리고 구정 다음날 방문했다. 건강이 안좋으신 둘째형부와 인사를 나눈다. 며칠후면 요양원으로 가실 계획이라고 하셨다. 둘째언니의 자서전 "노을에 비친 윤슬"에 보면, 형부와의 애증이 그대로 녹아있다. 형부는 16년전에 왔을때는 나를 몰라보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말씀은 잘 못하시지만, 그 눈빛으로는 나를 알아보는 듯 했다. 둘째언니의 오랜 간병생활이 마침내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올케와 둘째언니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서울 식구들이 함께 찜질방으로 갔다. 오빠와 어깨동무하고 사진도 찍었다. 새언니와 황토방에선가 오랜 시간 같이 있었다. 땀을 철철 흘리면서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새언니는 "결혼해서 왔을때 아가씨는 너무 이상했었어. 애같지가 않았어. 기둥에 등을 기대고 혼자 앉아서 먼산바라보기를 했었지." 새언니의 말을 빌리니, 내가 이상한 면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왜 그랬을까? 오빠는 어린 내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20년도 더 넘는 나이 차이가 나니, 당연한 일이었긴 하지만. 오빠의 엄마와 10자매의 엄마가 달라서 생긴 간격도 있을 것이다.
캐나다에 돌아와서, 천안언니가 준 들기름을 엄마에게 드리고, 인천언니가 남대문시장에서 사서 보낸, 엄마의 스카프를 드렸다. 그리고 막내이모의 선물까지. 엄마는 이번에 내가 가져온 선물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엄마는 둘째언니가 보낸 고춧가루, 새언니가 보낸 새우와, 내가 거리에서 산 대추등 그 모든 것들을 좋아하셨다. 한국가면 대추를 한 포대사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비단 물건이 좋아서일까? 엄마를 생각하며 보낸 그 마음에 감동을 받으신게다.
모두 나를 보면서 자신이 보고싶은 캐나다 가족을 떠올린다. 누구는 엄마를, 누구는 큰언니를, 누구는 오웬사운드 조엔언니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두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캐나다 가족 외교관으로 분에 넘치는 성공적인 방문을 마친셈이다. 캐나다와 한국이 보다 돈독해졌기를 가족 외교관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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