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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그녀와 보낸 시간들.. 모국방문 (8)



나래는 큰딸이다. 집안에 그동안 없던 아이가 생겨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예쁜 생명체가 있다는 것에 나도 감격했었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면서  아이는 아마도 충격을 받았던가 싶다. 동생을 사랑하기 보다는 동생을 밀어뜨려 둘째 머리가 부딪쳐 깨지는 사고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매를 들지 않았는데, 화장실로 데려가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매"는 아무런 것도 해결할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됐다.


큰언니에게 기대되는 어떠한 것도 하지않았다. 동생들에게 관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것만 챙겼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같기도 하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때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엄청나게 혼을 냈다.  아이는 울면서, "지금 이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했냐?"며 나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억해낼  없는 많은 사건들이 나래와의 사이에 있었다. 가장 근접한 것으로는 토론토에 있는 "비건 브레드 샵"에서 일하던 것을 접고, 한국에 나갈 준비를 하기로 하면서 집에 있을 때였다. 한국가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때 다툼이 일어났는데, 엄마가 자신을 믿어주고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빵집"에서 일할 때도 그렇고 엄마의 마음에 자신이 흡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쏘아부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럴듯한" 직업을 구하려고 안하고, 비건샵에 취직했을때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징검다리 정도로 알았었는데, 자신은 나름대로 그곳에서 일한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방을 얻어 부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사회생활을 해나간 것을 뿌듯해 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부모의 응원이 기대에 못미쳤는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일로 많은 껄끄러움이 남아있는 나와 나래 사이였다. 한국에 놀러오라는 그애의 농담같은 말에 기대어 한국방문을 넌지시 떠보았을 때 두팔을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나래는 처음 도착할 때부터 내가 어디를 가든지, 수시로 점검하고, 지도를 보내주고, 챙겨주었다. 친구들을 만났던 어느날은 전철이 끊기기도 하니, 재빨리 움직이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애가 말해준 대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집에 오기도 했다.


나래가 일하는 분당의 학원을 방문했었다.  안에서 일하는 선생님들과, 지난해에 가르쳤던 학생들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켜준다. 그날은 음력설 행사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래가 기획한 설날 행사가 학교에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꼬까 한복을 입고 등원했고, 나도 아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윷놀이, 제기차기, 투호, 비석치기, 사방놀이  교실마다 다른 놀이를 하는 것을   있었다. 한국말은 한마디도 하면 안되는 학원 정책이 있어서, 나는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래를 도와주는 한인교사 2명이 있어서, 부모와의 소통, 아이들이 위급한 상황에 아이들을 돌봐주고, 기타 잡다한 잡무를 나눠서 하였다.


교실에 들어와서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놓고, 자켓을 벗어 걸고, 과제물을 제출하고... 그런 모든 일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해나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교육을 받으며 자라니,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겠구나, 아이들 뒤에 있는 부모들의 간절함,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교육자들의 힘이 느껴졌다. 나래는 다행이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같았다.





나래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만한 단계는 아니다. 심각한 대화가 없었어도, 우리 둘이 충분히 교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나래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난  같다. 

대부분의 나의 잔소리가 그애에겐 먹히지 않았으니 말이다.  BTS가 태동할 때부터 그들의 팬이었으며, 기생충을 영화관에서 3번이나 본, 한국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교민이 되었다. 


학원에서는 점심을 주는데, 비건이 아닌 반찬들이 많아 조금씩 챙겨간다고 했다. 어느날은 나래에게 점심용으로 김밥을 싸주었다. 엄마가 돼서, 딸의 집에 얹혀있으면서, 가능한한 잘해 멕이리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집밖을 싸돌아 다닐때가 많아서 그러진 못했다.마음속에 품고갔던 요리조차 해주지 못했다. 나래네에서 내가 한일이 많지 않아서  했는지 기억이  정도이다. 김치를 한번 담가줬고, 부엌을 청소해주고, 순두부찌개로 저녁을 차려주었던  같다. 집에 있는 날은 아침을 함께 먹었다. 내게 특별히 부탁했던 겨울코트 주머니 꼬매기를 위해, 나래와 함께 가서 튼튼한 실을 사오기도 했다. 본인이 꼬맸는데, 다시 터진다고 내게 부탁했다. 좋아하는 코트였는데, 주머니가 떨어져서 입지 못했다며 좋아한다. 


그 다음에, 색이 바래고 탁해진 흰색옷을 하얗게 만들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는 방법은 세재를 넣고 삶는 방법이었는데, 옷을 삶을  그릇도 없고 해서, 동영상으로 검색했더니 과탄산소다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나래와  박스형 대야(?)를 하나 구입하고, 다이소에서 과탄산소다를 샀다. 동영상에서 일러주는 대로 뜨거운 물에 과탄산소다를 타고 그릇을 닦는 세재를 넣어서 거품을 내고, 옷을 30여분 담갔다가 세탁기에 빨았다. 하기전에는  효과가 날까, 싶었지만 많이 하얘져서 나래가 좋아했다. 


나래가 한국에서 사귄, 한국인 친구와 함께 저녁 부페를 먹고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강남의 카페까지 진출해봤다. 그녀와는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눌  있어서 좋았다. 그런 친구가 있어서 나래가 한국에서 적응할  있었던  같다. 


스튜디오 형식의 아파트라서 부엌이 좁았다. 부엌과 식탁 사이 작은 공간에 지금 있는 것보다 높고 큰 선반이 있으면 잡동사니 처리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의견을 받아 인터넷 주문을 나래랑 했는데, 가지고 있는 상품권 주문이  안되어 실패했었다.  뒤로 선반을 구입해 밥솥을 올려놓았고, 그 아이디어를 준 내게 감사함을 표했다. 아참 밥솥도 내가 있을때 샀다. 그동안 놓을 데가 없어서 못샀다고. 함께 좋아하는 "바"에 가자고 그애가 제안했는데, 그걸 못하고 왔다. 젊은이들의 "바" 문화를 체험할 찬스였는데..^^ 


저와 관계있는 나의 여행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씩 미뤄지고, 변경되고. 예전같으면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래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 확실한 것이 그런 상황들을 즐겁게 넘기기도 했다. 


나래와 함께 롯데타워에 놀러갔었다.  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로 오픈한 카페를 들어가게 됐다. 롯데타워 안에만 해도, 으리으리하고 많은  공간이 있는데, 굳이 카페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아줌마 계산법으로는 비싼 카페 음료수를 마실 필요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누르고, 들어가는데 동의했다. 그곳은 마치 갤러리와 같았다. 많은 그림이 걸려있고, 인테리어가 쌈빡하다. 마침 손님은 한명도 없었다. 나래는 캐나다에 있는 동생이 생각난다며, 비디오톡을 걸었다.  역시도 집에서 나대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막내딸이 생각났었다.  카페에 책을 일일이 접어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전시해 놓았던 것이 인상깊다. 나래는 나중에 이런 카페를 경영하면 좋겠다고 한다.  





롯데타워를 나와 석촌호수 물가를 함께 걸었다. 호수길 중간에 피아노가 있다. 옛날에 쳐봤던  곡을 한번 도전해본다고 앉아있는 나래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서 그애를 주시하는데 뿌듯한  무엇이 차오른다.


비닐 음반 모으기에 열성이고, 음악 컨서트 티켓팅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기도 하고, 비건이라 음식먹는데 까다로운 그애는 나와 성격면에서 극에서 극이다. 한가지  보탠다면, 나래는 엄마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문신"도 했다.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 한국을 상징하는 "호랑이" 문신을 하려고 한다고 협박하니, 나는 그것이 공갈이라고 믿고싶다.


취향이 "아무것이나"인 어미에게서 어찌 그런 아이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큰애가 가까와지기까지  30여년이 걸렸다. 그래도 어미의 고향, 한국을 사랑해주니  이상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