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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친구소유권도 유효기간이 있다.. 모국방문(9)

 

 

기억 재생 버튼을 눌렀더니, 각종 오류 사인이 떴다. 

"네가 그랬잖아. 너는 인생에 특별한 굴곡이 없어서 작가가 되긴 힘들거야 라고."

어쩌다 "국문과"에 들어왔으나, 아마도 글쓰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내게 L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상처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하는 내게 일종의 면죄부가 되었으니, L에게 큰절이라도 올려야 할판이어서 그때 말했던  이야기를 트집잡을 생각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랬는데 L이 펄쩍 뛴다. 자신은 그런 말을  기억이 없다면서.

 

  기억속에 있는 또하나의 장면은 이런 것이다.

셋을 기억해야 한다. L과 J와 나. 대학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나름 삼총사라 불릴 만한 우리들이었다.

L과 J가 뭔일인가로 단단히 틀어져 있었다. 평화의 사자를 자처한 나는 둘을 학교앞 고전음악 카페에 불러들였다. 그때  카페는 대학가에  생기기 시작하던 어두침침하고, 칸이 나뉘어져 있어서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 밀실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전음악감상실이었다.  "곧흥할"이란 이름을 가진,  그런데 "할"자였던가,  할의 모음이 "ㅏ"가 아닌 아래아 "." 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쨋거나 우리의 아지트였는데, 우리는 곧잘 "곧망할"에서 만나자, 하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곧흥할이 얼마나 버텼는지 모르지만 망한 것 같다. 아이들이 박혀서 몇시간이고, 음악감상한답시고 앉아있고,  한잔 시켜놓고 자리를 뜨지 않으니,  주인으로서도 생존하기 힘들었을   같다.

 

"곧흥할" 카페의  밀실에 얼굴이 굳어있는 두사람에게 나는 비장하게, 이렇게 선언했다. "마음에 안든다고  자리를 뛰쳐나가는 법은 없기다. 문제가 풀릴 때까지 끝까지 이야기를 나눠보는 거야. 분명히 무언가 오해가 있을 거야" 이렇게 말이다. L에게 나의 이런 중재노력에 대해서 기억을 환기시켰더니, 그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무용담은 내게나 소중한 이야기인가 보다.

 

이런 중재 실력을 발휘한 사건 하나는 현재까지도 휴유증을 겪고 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여행계획들이 무성했는데, L이 J의 제주집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국문과 남학생들도 제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두팀을 엮었던 것이 바로 나였다. 나는 어차피 제주도에 갈텐데, 함께 가자, 그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주장했다. 물론 남학생들의 사주를 받아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주로 J를 설득시키는 작업이었다. 국문과 6명과 영문과 1명의 팀이 꾸려졌고, 결과적으로 J의 피보기 여행이 되어버렸다. 그때 J의 호된 불평을 들어야했던 우리과 남학생들은 트라우마가 생겼고, 지금까지 J와 친구들은 견원지간이 되어있다.  집단 사이에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는  일을 이때 그만두었어야 하는데, "물"같은  성격은 언제든 다시 일어나, 같은 실수를 매번 반복한다.

 


 

살면서 나보다 말이 적은 사람을 그리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속도있게 주제에 맞게 말을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나는 경이롭게 바라보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주로 듣는 사람쪽에 서있게 되었고, 그것이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L에게 그런 면에서 나는 갑이다.  L을 만나면, 그야말로 미주알 고주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같다. 내가 짝사랑하는 이들에 대해서 마음놓고 털어놓을  있는 사람은 L뿐이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 대해 내가 취하는 태도처럼 L도 내게는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말하고 싶었는데 내가 기회를 주지 않았었나?

 

캐나다로 이민오고 나서 그녀도 이스라엘로 떠났다. 이민 초기에는 편지왕래를 했다. 캐나다에서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만들면 행복할까 싶어서 "도서대여점"을 열었었는데, 그때 평생회원이 되어주고, 회비를 보내주었던 그녀였다. 물론 대여를 단한번도 할수 없는 먼나라에 살지만, 친구를 응원하는  마음은 지금도 잊을  없는 일이다.

 

L은 내게 습작이라고 소설도 보내줬는데, 문학동아리 출신인 나는 "꼴에" 다른 사람 글에 흠집을 내는, 까닥스런 독자의 습성이 있어서 소설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16년전 한국에 갔을때 그녀는 아직 이스라엘에 있는 중이었고, 다른 친구들은 만났는데 그녀를 볼수는 없었다. 한국 친구들과는 다음 카페를 통해 만나곤 했는데, 스마트폰과 다른 SNS 등이 등장하면서 카페가 개점휴업 상태가 됐던  같다. 친구들과도 소식이 늘어지다가 끊어졌었다.

 

 친구들은 문과대 어문계열 출신 여학생들이다. 그중 국문과는 L과  둘이었고, 영문과 중문과 독문과 불문과가 함께 했다. 나는 L과 친했고, L은 J와 친했고, J는 학창시절 가장 유명하달  있는 "인기 친구" 였기에, 그녀의 친구들로 구성된 그 어문계열 모임에 합류할  있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어문계열 친구모임에서는 피라미드 가장 바닥에 차지하는 인물로 스스로 점수를 매기곤 한다.   L과 J 꼬리에 붙어있는 형국이다.  L의 집에서 J에게 전화를 했다. 둘은 한국에 있지만, 연락을 거의 안하고 살았다 했다.  만나지 않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생의 험한 바다를 건널 때였던  같다. 문명의 기기가 작동을 하여, 화면으로 서로의 늙음을 확인하면서 안부를 물을  있었다. J는 최근에 은퇴를 하고, 돈버는 일을 하지않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하다고. 대학강사 하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강사직을 내려놨다는 것같았다. 

 

한국에서 나가기 전,  사람에게  이메일 주소로 연락을 해놨었는데, 대답들이 없었었다. 인생에서 나를 제외시켜 놨었을 수도 있다. 네가 나를 싫어하는  알았어, 라고 말하는 내게 J는 "네가 얼마나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했는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되물었다. 그러고보니, 친구라는 소유권 유효기간이 지났던 것이다. 이번에도 안면에 철판을 깔지 않았으면, 세상 끝날까지 서로 없는  살뻔 했을 수도 있다.

 

옛날처럼 L의 도움을 받아 J와 다시 맺어졌다. 다음 방문에서는 어문계열 친구들에게 연락해야 한다. 16년전에 만났었는데, 잊은듯 살다가 다시 만나달라고 하기 미안했다. 

 


 

L이 사는 곳은 그야말로 시골이었다. 한국에서 그런 곳을 처음 봤다. 영동의 한 구역이었는데 매표소 아줌마는 세상일에 1의 관심도 없어보이는 얼굴로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역내 화장실이 없어보였는데, 어떤 기사 아저씨가 화장실가는 포즈로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온 모습을 본후, 그쪽으로 가봤다. 화장실은 있었지만, 10년간 청소한 사람이 없는 것같은, 20년전에 보았던 한국의 그런 모습이어서 놀랐다. 버스역 건물 옆으로, 연탄재가 쌓여져있다. 아직도 연탄을 때고, 화장실은 관리가 안되며, 역내는 무관심의 공기에 짓눌려져 있는 곳이 있다는데 충격을 받았다.

 

 

유시민의 알릴레오를 자주 보는데 영동지역에 출마하는 국회의원 후보가 출연했었다. 그쪽 지역이 상당히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 행정의 사각지대라 하였다.  지역을 발전시킬 정치인이 나오길 빌어보게 됐다. 마치 내가 사는 지역인양, 친구의 고향이자 거주지인 그곳이 교통편도 조금 발달하고, 화장실을 비롯한 버스대합실 정비등 그런 제반작업이 이뤄졌으면 싶다. 

 

그녀는 서울 친구들로부터는 "은둔자"로 불려지고 있었다. 내가 한번 찾아가 보니,  일이 있지않는 한 서울을 방문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같다. 하던 일이 끝나서 다시 일을 찾아야 하는 일이 좀 고민이라는 그녀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옆집 아줌마와 아침마다 동네를 돌며 산책을 하고부모님과 친구였던 이웃 할머니들이 자식 챙기듯 챙겨주신다니(그녀집엔 할머니들이 준 반찬이 많았다), 그녀의 삶은 또한 그녀스러운 맛이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이스라엘어를 잘하는 그녀의 재능이 어디 쓰일 데가 없을까, 그렇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 방문한 친구에게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겪은 소설같은 이야기는 J를 통해서 들었다. 다음에 가면, 그런 이야기도 나눌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다음 만남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