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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매력넘치는 그나라, 대한민국.. 모국방문(끝)

 

친구 S와 하루 더 시간을 같이 보냈다. 친구는 아버님 간병과, 아버님 간병으로 힘든 어머님을 돌보러 한국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2달이 넘게 한국에 머물며, 거의 모든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듯 싶었다.

 

내 심장은 빠른 비트로 뛰는 반면, 종종 한국을 방문하는 그녀의 심장은 한국 사람만큼은 아니어도, 그리 빠른 박자로 뛰는 것은 아님이 곁에서 느껴졌다. 내 방문이 늘어날 때마다 나의 심장박동수도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고국을 방문하는 이민친구들을 곁에서 보게 된다. 오랫만에 가는 고국에서 부모곁에서만 머물다가, 부모님이 차도가 있어서 오기도 하고, 또 부모님 중 한분과 이별을 하고 오기도 한다. 나같으면 부모님이 병환중에 계시더라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싸돌아다닐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친구들을 보면 대단하다 생각한다. 더불어  캐나다에 엄마가 있는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느끼곤 한다.

 

어쨋거나 S는 강남 코엑스에서 만나자 하였다. 내게 보여주고 싶은 도서관이 있다면서. 코엑스에 있는 "별마당 도서관"은 놀라웠다. 친구가 내가 입이 반쯤 벌어지고 꼭대기 책들을 올려다보는 사진을 찍어줬다. 규모와  혁신적인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천장을 없애고 4층 높이쯤 되는 그곳에 바닥부터 끝까지 선반을 만들어놓고 책으로 모두 채웠다. 곡선선반에 꽂혀있는 책들은, 사람손이 닿도록 설계했겠지만, 실상은 그저 장식품으로 보였다. 중간중간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긴 했으나, 그 도서관이 말그대로 도서관이 되기 위해서는 자주 다녀서, 친근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될것 같지 않았다. 말하자면 책에 집중할 수 없는 도서관이었다고나 할까?

 

 

총 13m 되는 세개의 큰 책장 그리고 둘레둘레 이어진 책장에 5만권의 책이 있다고 한다. 누구 하나 지키는 사람도 없고, 빼서 읽다가 그냥 갖고 사라진다 해도, 표시도 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름대로 책을 지키는 제도적인 장치가 있긴 할 것이다. 책이 너무 많으니, 더이상 책이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책은 도서관의 특별한 벽지처럼 그렇게 장식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도서관을 나와서 수원으로 향했다. S는 한옥에 대해서 한동안 빠져있었다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옥에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기에 서서히 접고 있지만, 한동안은 한옥을 지을 수 있을까, 고민했었더랬다.

 

 

수원에는 한옥기술전시관이 있었다. 한옥의 종류와 짓는 방법 등 모형을 세워놓고, 설명되어 있다. 나는 그다지 관심있는 분야가 아니었기에, 주의깊게 보지 않았지만, 수원시는 한옥을 짓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혜택을 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전통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겠다.

 

한옥기술전시관옆에는 수원전통문화관이 있었다. 바로 곁에 붙어있어서, 처음에는 같은 곳을 다녀왔나 했는데, 다시 한번 검색해보니, 전통문화관과 한옥기술관은 서로 다른 구조물이었다. 전통문화관에는 우리외에 관람객이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왕세자의 하루"라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었다. 조선시대 왕세자가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을 설명해주는 가이드는, "일본인 2세" 혹은 "재일교포" 처럼 보였다. 공부시간으로 꽉 짜여진 왕세자의 하루를 설명해주는 그녀의 말투에서 나타났는데, 그점이 의아스러웠다. 그녀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S와 나는 그녀에게 "일본인 교포"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물어봤다면,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왕세자의 하루를 체험하면서, 왕세자의 곤룡포를 입어보고 그의 책상에 앉아보라고 해서, 우리는 한번씩 그리 했다. 내가 왕족의 후예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전주이씨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횡포와, 유교, 그리고 실정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역사적인 사건앞에서 나는 쪼그라지는 느낌을 때때로 받는다. 일본인 교포, 조선 왕조의 성을 쓰는 여자, 한옥을 사랑하는 또다른 여자 그날의 이상한 조합이었다.

 

S는 한국에 와서 한국고전인형 만드는 장인에게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이번 방문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면서. 내가 어려울때 S는 본인이 하고있는 뜨개질 작품을 보여주면서, 내게 권했었다. 그 뜨개질은 나의 친구가 되어있기도 하다. 나는 S에게 고전인형만큼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못을 박았다. 그녀는 어쩌면, 그런 길로 나아가야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40여년전의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고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그 뒤로는 일과 가정 그 둘 이상을 생각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이제라도 그녀가 좋아하는 어떤것을 찾아서 다행이라 해야할까?

 

 

국문과 친구들과 다시한번 만났다.

몇명이 먼저 만나 서울숲을 함께 거닐었다. 조금이라도 뭔가를 내게 보여주려는 마음이 가상하다. 오후에 모교도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예전 모습을 알수 없는 학교, 호수 주위를 걷는다. 일감호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도 생각나고, 눈물 흘리던 어느날도 생각나고, 그 둘레를 돌다가 교내에 있는 설립자 묘지 근처에서 배회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묘지 근처,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음침한 아지트는 그 많은 변화에도 아직 그곳에 존재했다.

 

길을 걷다보니, 팻말이 보인다.

"도란이길"

친구 Y가 말한다. 이 길 이름 우리 연구회에서 만들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국어학연구회가 있었어. 그때 교내 모든 길 이름을 만들었지. 팻말이 붙어있는 곳도 많아.

그 당시에 한글로 이름바꾸기 작업을 열심히 했다 한다.

 

나무엔길 : 예전 플라타너스가 에워싸고 있던 길, 국문과 사무실까지의 길

몽실이길: 아마도 중앙도서실 오르는 길로 그 길을 오를라치면 장딴지가 부풀어오르는 긍정의 힘줄이 오른다는 뜻

모람뜰: 모인사람 줄인말, 본관 앞 황소상 주변

 

친구 Y에게 물어서 파악해 낸 길 이름들이다. 

 

그 당시 국문과에는 두 기류가 있었다. 국문학과, 국어학.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취향대로 그렇게 나눠졌다.

나는 문학쪽이었는데, 어학쪽 학생들을 은근히 무시했었다. 왜 그런 마음이었는지, 시건방진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번에 가서 보니, 국어학쪽의 아이들이 많은 일들을 이뤄냈다. 어쩌면 한글이름 쓰기와, 순우리말 찾기 등 그들이 지속적으로 펼친 일들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 당시 국어학 분야에서 학생들에게 좋은 스승이셨던 김윤학 교수님이 단명하셨을 때 정말 큰 충격이었다.

 

저녁시간쯤 일을 끝내고 몇명이 더 합류했다. 예전에 황태 메생이국을 공수해왔던 B의 추천에 따라 골목 깊숙이 있는 족발집에 모여앉았다. 학생들이 있는 좁은 공간이어서, 복잡하게 느껴졌는데, 맛있는 음식과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의 저녁은 아주 달콤했다.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노래방. 남자아이들은 대체로 수준급의 실력이었고, 나를 포함한 여자 친구들은 들어줄만 하였다. 나는 정말 기억에 남는 이야기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잠시, 노래는 끄고 마이크로 한마디씩 하자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 정말 좋다는 이야기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친구, C가 "너는 우리들의 양준일이다" 해서 깜짝 놀랐다. 양준일 팬이 들으면 내게 삿대질을 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헤어졌던 친구에게 양준일이 되어줄 수 있다. 그들에게 30여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놓을 수 있게 해줬으니 말이다. 

 


 

S대 출신 형과 캐나다 오기전 매주 인천엘 같이 갔었다. 왜 내가 굳이 S대 출신을 밝혔느냐 하면, 그 형이 거의 모든 걸 주관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파트너였다. (수동적이었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만, 아무런 것도 안한 것보다는 낫다고 나를 토닥인다.) 인천 공장에 다니는 친구들과 1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공부를 했다. 그 모임을 뭐라 불렀는지 기억에 없다. 선배는 내가 떠나가면서 자신도 인천에 가는 걸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때 함께 공부하던,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던 그 친구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형과 민족학교에서 만나서, 나의 부족한 사회, 역사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그것도 캐나다 오면서 거의 마모되어 남아있는 게 없지만. 이번에 제주도 친구를 통해서 그 형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뭐라 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형, 감사해요. 한국을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거 같애요. 한국에 너무 놀라고 갑니다. 감사드려요."

 

이 형의 전화기 너머의 표정이 읽힌다. "긴가 민가" 하는 표정으로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 

 


 

하얀마을, 까치마을, 정든마을, 느티마을, 샛별마을, 양지마을.. 내가 탔던 버스 노정표이다.

이렇게 예쁜 이름중 하나에 한국 어머님이 사신다. 어머님을 두번 방문해 함께 식사를 했다. 캐나나 돌아오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갔을때 음식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거진 준비를 해놓고 계셨다. 먹는 것이 먹지 않고 가는 것보다, 어머님을 기쁘게 할 것 같았다.

 

이민초기에 캐나다에 오셨다가, 다시 한국행을 결정하신 어머님, 참으로 잘하신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했지만 말이다. 노인연금이 많지 않지만 나오고, 친구들이 곁에 있고, 다른 가족들이 있는 내나라에서 사는 그 삶을 하마터면 빼앗을뻔 했다. 

 

한국을 떠나면서, 내게 가장 소중한 캐나다에 있는 세사람에게 에릭 요한슨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엽서를 썼다.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는데, 차례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을 도와주던 직원이 오더니, 카드를 쓸 것이면, 기계를 이용해도 된다고 했다. 그분의 도움으로 엽서를 보냈다. 완전 자동화된 시스템에, 한국땅을 떠나는 날까지 놀랜다. 그 엽서가 두 딸에게는 도착했는데, 남편에게는 날라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혹시 엽서를 받고 잘못해서 버린 것 아냐? 채근하기도 했는데, 2달이 훨씬 지나서 며칠전 도착했다. 어디서 헤매다 온 것인지. 

 

엽서도 도착했고, 방문기도 거의 마쳤고, 나도 이제는 스마트폰에 깔아두었던 네이버 지도와 카카오 지하철 앱을 지워야겠다. 더 생각나는 건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이제는 한국을 떠나서 캐나다에 살아야 한다. 내 머리의 향방을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매력넘치는" 그나라, 대한민국을 이제는 놓아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