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가만있자, 그러고보니 너와 마주 했던 때가 10년도 훌쩍 넘었구나.
우선 결혼을 축하한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단발머리 조용한 초등학교 학생이었잖니?
그때를 생각하면 왜 이렇게 마음에 미안함이 드는지.
너희 가족이 캐나다에 이민으로 왔을때 말이다.
나는 큰딸을 갓 나은 결혼초년생이었다. 시집과 친정의 구분도 모호하고,
그안에서의 내 역할까지도 종잡을 수 없었던.
어느때도 그렇지만, 삶의 중심이 바로 내 자신(혹은 남편)이어서, 다른 모든 것을 돌아보기 힘들었다.
다행이도 너와 네 오빠는 캐나다를 좋아했었지. 학교생활을 잘한다고 이모님이 이야기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너희 부모님에게는 캐나다의 매운 바람에 아마 무척 고단한 하루하루였을 것이리라 .
우선 너희를 초청했던 외삼촌 부부가 그 당시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을때였다.
나와 네 오빠도 나중에서야 알 게 되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너희 가정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이민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었어야 했던 분들이 제대로된 지침이 되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고국을 떠나 새 땅에 정착한 사춘기 자녀를 둔 가정이, 의지했던 도움처가 그만, 제 할일을 하지 못하게 됐었다는 이야기지.
그렇다면, 지금같으면 우리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나와 네 사촌오빠 역시 이민초짜로 내앞 가리기에도 급급했던 것 같다.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돌아보았더라면, 그런 결정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이민 1년도 되기 전에 너의 아빠와 엄마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는지.
영어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삼촌의 가게를 인수해서, 장사를 해나갔다는 것, 정붙일 이웃하나 만들지 못했던 것, 그 모든 것이 보따리를 다시 싸는 이유가 됐겠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에 소름하나가 돋아나는 것 같다.
너는 작은 소녀로 어른들의 결정에 반기를 들수도, 의견을 보탤수도 없었으리라.
사진과 비디오로 남아있어서 기억에 선명한 것처럼 생각되는 공원나들이.
한창 사랑을 받던 큰딸 “나래”를 유모차에 태우고, 끌던 네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우리는 중국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었었지?
세월은 지나가서, 결혼을 앞둔 너를 생각하니, 그 당시의 내모습이 겹쳐보이는구나.
결혼전에 우리가 가끔 가던, 지대낮은 풀밭이 떠오른다. 웨스턴 거리의 뒷골목으로 가면 있단다.
그곳에서 우리는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이렇게 젊어서 좋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서로 좋아하기로 하자, 그렇게 풀밭에서 맹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이란 어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거더냐?
가끔 색이 바래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이었나 고민도 하게 되고.
나에게는 그게 결혼하고 한참 후에 찾아왔다. 사랑으로 가렸던 안개가 걷히고 나니, 타협할 줄 모르고, 단순한 그가 참으로 대단한 결점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럴때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거짓과 환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보잘것없어진 사람에 대한 진짜사랑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가정세미나에서 접한 새로운 자각이었다.
그동안은 나의 환상을 사랑한 것이라면, 이제는 부족함을 메꾸어줄 수 있는 참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구나,,,, 하면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윤희야.
그러다보니, 네 사촌오빠가 남들이 갖지 못한 많은 장점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그가 무럭무럭 커가고, 나는 작아져갔다. 그게 나의 기쁨이 되기도 했고.
지금은 네 오빠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둘은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다. 무슨 일을 결정할때도 실수도 많고, 지름길로 가지 않고, 무식하게 돌아가기도 한다. 인간관계도 매끄럽지 않고, 그저 마음에 우러나는 대로 해온다.
그래도 우리안에 있는 가장 큰힘은 서로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가령 실패가 오더라도, 견뎌낼 힘이 있다고 믿게된다.
결혼을 하는 너에게 뭐라 말할까?
혼자가 아닌 둘이 살기로 결정한 이상, 책임이 배가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네 오빠도 말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의 말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지들이지. 그가 말한 것은 그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까지 불똥이 튄다. 나는 안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그래서 그랬다. 그 사람이 말을 잘못해서 그렇다. 사실은 그런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변명도 해주고.
조그만 일이라도, 이야기해서 간격을 두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래서 공동의 문제엔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야겠지.
내가 결혼하면서 결정했던 한가지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한다”는 것이었다.
개인만의 은밀한 “일기”는 더이상 쓰지 않기로 한다.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되는 작은 창고 하나만 남겨두고, 마음속을 모두 공개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때 도움을 청하기 쉽게 됐다.
너는 이제 첫 시작이다.
네가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해볼만한 것임을,
굳이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도, 평생을 함께할 맘좋은 친구를 하나 얻게 된다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결혼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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