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자
욥은
그가
가진
재물과
자식들을
일시에
잃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원망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
그는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면서
찬송하였다.
이를
보고
사단이
여호와께
허락을
얻고
그의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다
그의
악창이
얼마나
심한지, 기와장으로
몸을
북북
긁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악담한다. 욥이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치
아니하였다”고
욥기 2장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3장으로
가면서, 고통이
더욱
심해지자
욥은
참을
수가
없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긴
날과, 생일을
저주하기에
이른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이
그리하였었더라면, ..”
그의
끝없는
저주의
말이
쏟아진다.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의
고난이
어찌나
큰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친구들이
일주일간이나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
곁에
앉아있었다고
쓰여있다.
신학적
쟁론에
가까운
담론을
펼치기
전에
그의
친구들도
많은
생각을
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욥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입을
연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를
당하고
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지만, 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6장
30절에는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간치
못하랴”하면서
친구들의
책망의
잘못된
것을
지적한다.
9장
24절에
가면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면
누구이뇨”하고
탄식한다.
욥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동안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당하는
고통이
너무
커서
그를
감당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과
변론하고자
하는
마음이
인다.
11장에
가면
친구
나발이
그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그러나
욥은
이런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욥의
이야기를
연이어
읽었다. 이날은
거의
죽음같은
눈속을
헤치고
운전하고
온
날이다. 촘촘히
엮인
구름속을
운전하는
것처럼 시야가
가리운
데서
운전자
옆에
앉았던
나는
조바심에
너무
많은
참견을
하였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운전에
지쳐있던
남편이
나에게
화를
냈다. 도움이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
뒤로는
그에게
운전을
맡기고
나는
그냥
따라왔는데, 그
일이
내
마음을
길나쁜
도로같이
흐뿌옇게
변하게
하였다.
이런
마음으로
욥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는데, 그의
고통이
피부로
스며들어와
눈물이
났다. 얼마나
어려울까?
욥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런
벌을
받을
만한
잘못을
범한
적이
없다. 고아와
과부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었고, 가난한
자들을
허수로
보지
않았으며, 자식들이
파티를
하고
난
다음이면
그들이
혹시나
지은
죄를
위하여
번제를
드려
회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런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이에
대해서
욥은
끝까지
자신의
말을
사수한다.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하지
아니하겠고
죽기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욥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우선
그의
범죄로
말미암은
벌이
아니라, 사단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놓은
덫이
아니었나. 그러나
아마도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다는
데
욥의
생각이
미쳐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
조금
더
견디기
쉬웠으려나..
친구들과
욥의
이야기를
깊게
듣던
나이
적은
친구
엘리후가
마지막으로
욥에게
이야기
한다. 그의
기본
요지도
결국
“욥이
스스로를
의롭다
함으로
범죄”한다며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좋은
상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도” 예시한다.
그
뒤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하나님은
욥에게
책망하신다.
40장 8절에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하면서
전능자요
주관자인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오만한
욥을
세상창조와, 경영을
통하여
일일이
설명하신다.
욥은
드디어
하나님과
쟁론하고자
한것과, 스스로를
의롭다
하다
한
것을
뉘우치게
된다.
42장에
이르러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나
욥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도
책망하시고, 욥에게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간구하라
원하신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서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갑절이나
축복을
주시게
된다.
해피
엔딩이다.
그런데
욥에게
이런
일이
과연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안들수
없다.
그안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가
무엇일까, 머리속에
떠오르는
대로
한번
건져보자.
욥은
잘살았고, 인생에게
가장
큰
존경을
받았던
순전한
사람이다. 그의
일생이
그대로
끝났다면, 친구들과
이웃들도
그에게
기대며
우러르며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본색이
드러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종들과
가장
비천한
자들에게도
놀림거리가
되고
만다.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 있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숙이지만,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께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는
손가락질을
한다.
친구들도
진정한
위로자가
되지
못하고, 욥에게
어떤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장광설로
그의
신앙을
회복시키려고
한다. 나는
이
친구들에게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하고, 정죄하는
그들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가르켜
말한것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책망을
듣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욥을
통해서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당한
욥이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고
사함을
기도드림으로써
그들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또다른
측면이다.
많은
종교지도자들, 혹은
신앙의
선배들의
많은
말들, 혹은
나같은
초보신앙자의
이야기등… 그런
것들이
나를
혼란하게
했었다. 확대해석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실수”들에
대해서
용서를
해줬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소망을
갖게
되기도
한다.
욥은
보지는
못했으나
경외했던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인생의
고통앞에서
사람이
빠질수밖에
없는
원망하는
마음에
그도
빠졌었으며, 다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갑절이나
받을
수
있었다.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순전한
사람도
욥과
같은
고통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욥처럼
나중에
세상
영광을
쟁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행사에
어디
한군데
계획없는
일들이
없는
것과같이, 욥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이런
일들도
믿음의
조상이
겪었던
일들을
통하여
후세를
경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겠지.
욥기는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장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인간적인
“의”를
이룬
욥이
결국은
그
“의”를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불의”를
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주장하는
“의”는
결국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교만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그가
그
죄에서
헤어나와서
회개에
이르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그토록
순전한
사람도, 치명적인
“죄”를
지을뻔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그가 당한 고통의 양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견뎌야 할 고통에 미리 위로를 던져주시려는 그런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런 이웃을 바라볼 우리들의 시선이 욥의 친구들처럼 실수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도 들어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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