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즐겨다니는 길은 이전에 다니는 길보다 더욱 한적한 길이다.
우리집에서 교회가 있는 오웬사운드까지 70-80km가 되는 이 길은 오가는 차 희소하고 굽이진 길이 거의 없고, 변변한 마을 하나 지나치지 않고 곧게 이어진다.
앞뒤좌우로 하늘이 땅을 덮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광활하게 트인 길들이 많다.
운전을 하면서 다른 무언갈 병행할 수 있다면 음악 혹은 라디오 듣기, 생각하기, 노래부르기 등등일 것이다. 그중에 나는 생각하기에 나를 맡긴다. 꼬박 65분 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좋다.
그중에서 쓸모있는 것들을 모아서 "글"을 만들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이 모아지진 않는다.
높고 낮은 구릉들처럼 그렇게 다가왔다가 사라지곤 한다.
요즘 생각의 주제는 "행복"이었다. 돌팔이 철학자가 되어보자.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함, 또는 그런 상태". 이것이 행복에 대해 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말이다.
정말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말이며 그런 상태에 있고 싶다는 유혹이 인다. 이는 얼핏 보면, 마음의 상태라고 보여지는데, 우리는 어떤 "환경"을 생각하게 된다. "행복"하기 위한 환경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의 일이다.
엄마가 다니는 토론토의 한 교회에서 한국인 강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가졌다. 엄마의 간청에 못이겨 그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요즘 교회안에서 많이 퍼지는 "예수 안에서 잘살기"를 주제로 내건 집회였다. 나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교회라는 장소에서 교인들에게 전해질까 알아보고 싶다는 삐딱한 생각을 갖고 참석하였다.
주강사는 그야말로 입만 열면 행복을 말하는 "행복" 주창자로서 이 세대의 행복을 리더한다는 사명을 가진 목사였다.
그의 강연의 요지는 가정에서부터 그 행복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선 부부간, 부모 자식간의 관계부터 점검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목사의 강의는 시종일관 유머가 포함되어진 화기애애하고 웃음짓게 만드는 인기강사의 그것이었는데 비판을 위해서 그의 설교중 멘트를 끄집어낸다면 이런 것이다.
"여러분 쪽박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대박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면서 대박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을 위해 제안한 것이 있었는데 그를 오늘 저녁부터 실천할 사람은 일어서시오 하는데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나도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재미있다고 여겼으나 "쪽박" "대박"인생은 그 의미부터가 흉물스러울뿐 아리라 인간욕심의 극한대를 치달아가자고 목사가 재촉하는 것같아서 동의할 수 없었다.
대박인생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인생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라는 걸 안다. "행복"은 그런 "대박"인생 안에만 있다는 것인데 그것 또한 의문사항이지만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행복"에만 있다는 것도 한번쯤 짚고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행복"공장의 공장장처럼 "행복"을 판매하러 다니는 목사들은 본업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터넷상에서도 너무 많은 "행복"이 떠다닌다."행복하세요"가 답글의 말미를 장식하는 단골레퍼토리가 된지 오래다. 그들의 그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이야 고맙기 짝이 없지만, 그런 말 한마디로 "행복"이 달려오는 것은 아닐진대 그저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소유한것, 부자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많은 읽을거리가 제공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보자면 솔로몬 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권세와, 지혜와, 풍족함을 누린 이가 없지만 그는 전도서에서 인생의 "헛됨"을 노래했을 뿐이다. 그를 통하면 "행복"하기 위해서 "부자나 권세잡은 자"가 되는 것의 헛됨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기 여러 종류의 기호품을 실은 마차가 있다. 인생의 맛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안의 시고 떨떠름하고, 향긋하고, 냄새나는 모든 것들의 맛을 봐야 한다. 한두가지 맛을 보고 인생을 다 알아버렸다고 하거나, 향긋한 "행복"이란 테이스트에 맛이 길들여져 다른 맛은 다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잘사는 인생이란 내게 주어진 맛을 거부하지 않고, 음미해보는 것, 그것을 잘 이겨넘기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당연히 찾아오는 슬픔과 고통과 부정확함 등의 의미를 희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일단 밖을 바라보라. 어제와 같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는가? 어제밤에 요란한 바람이 불면서 눈이 흩뿌리더니, 천지가 얇은 눈에 쌓이었다. 눈오지 않는 날이 있음으로써 눈온 날들이 차별성을 얻게 된다. 흐린 날이 없다면 어찌 쾌청한 것이 좋다는 걸 알까?
비바람속에서도 살아내야 하는 게 우리 사람살이다. 쩨쩨하고 궁상맞을 때도 있다. 그런 과정들은 당당함의 정당한 의미를 보장해준다.
"행복"에 최고선을 두는 삶을 살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고통의 자욱을 따르겠다는 기독교에서 선봉에 서서 그를 퍼뜨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게서 가까운 이가 나 들으라는 듯, "교회 다니는 이들은 악착같은 가족이기주의자들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을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었다.
내 가족이 더 잘사는 방법을 찾아서 교회를 그 한 방편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런 잘못된 리더들이 횡행하는건지.
이런 글을 쓰면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것이지.
그래 내가 가진것, 누리는 것(내가 얼마나 자랑을 일삼는가?)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것이 교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시시때때로 내게 다가오는 작은 멍에, 시고 떨떠름하고 때로는 쓴 맛들을 피하지 않아야 할것이라 생각한다. 그 맛을 제대로 보기 위해 눈을 동그렇게 뜨고 말이다. 최소한 "행복"이란 시럽안에 빠져 허우적 대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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