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구. 하면 튀어오르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종종 아침산책길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집뒤에 있는 작은 산을 오르면서, 아버지와 함께 볼이 상기되던 내 모습이 겹쳐떠오른다. 산책이 끝난 다음에 초등학교로 향하신다. 나에게 탁구를 가르쳐주셨다. 그때 학교문이 열렸는지, 그런 것들이 왜 지금 궁금해질까? 어쨋든 그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甄?아버지에게 재량권이 있었던 것인지, 일반인에게 탁구실은 개방되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탁구대가 너무 높아서 깡총깡총 뛰어오르며 아버지와 탁! 탁! 소리를 내면서 그렇게 아침댓바람에 운동을 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리고, 동네 회관. 그 회관에 탁구대가 있었다. 그곳에 언니와 아버지와 자주 가서 탁구를 쳤다. 언니는 나와 가장 잘맞는 탁구 파트너로 오랫동안 나와 함께했고, 나보다 실력과 폼이 더 좋은 내 주변에서 가장 탁구를 잘치는 여성이었다. 시멘트 바닥을 때리며 튀어오르던 탁구공의 기억과, 떨어진 공을 빨리 집는 것이 탁구를 잘치는 길인양, 연습했었다.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멋있는 탁구를 치는 사람들을 침을 흘리며 지켜보기도 했다.
한 고등학교 시절쯤...
나는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 당시 동네 곳곳에 탁구장이 있었다. 작은 곳은 탁구대가 서너대 비치되어 있고, 큰 곳은 한 10대 정도가 있기도 하다. 시간당 돈을 내야 한다. 30분, 1시간씩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땀을 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이 탁구칠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회 남학생들과 교회밖에서 탁구를 치며 몰려 다니는 것은 "비행 청소년"이 되기 똑참한 일이었고, 그런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어려서부터 맛이 든 탁구를 양껏 칠 수 없었다는 게 항상 불만이었다.
대학생활,,
탁구장이 교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어도, 그 탁구장 주인아저씨의 얼굴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나는 꽤 단골이었던 것 같다.
나와 항상 함께 하던 친구 정희, 성임과 수시로 들락거렸다. 아마도 내 실력이 조금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학생들.
당시에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으로 탁구와 당구가 유행했겠다. 남학생들이 모두가 한가닥하는 것과는 달리 여학생들에게는 기회가 많지않아 그렇게 탁구에 뛰어난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남학생들과의 시합에서 여학생들은 몇점을 덤으로 받고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건 일반 여학생들의 이야기. 선수는 아니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즐겼던 고로, 나는 남학생들과 맞장을 뜰만하였다. 잘치는 사람이 아니면, 이겨넘기기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대학 1학년때 나를 부과대표로 지목했던 그때의 과대표 남학생. 그가 도전장을 냈다. 그러자고. 내 사전에 봐주는 것이란 있을 수 없어서, 감히 남학생을 이겨넘겼다. 그의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리고,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던 것도 같다.
전연 심각하게 생기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그의 자살소식이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학급의 대표로 몇몇과 그애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를 이겨넘긴 것이 종종 마음에 남는다.
왜 그는 의욕적으로 자원해서 과대표도 되는등 적극적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무리 했을까? 스타디 그룹에 나를 초청했을때, 나는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었는데 그것도 걸린다. 그의 자살건은 지금까지 오리무중이다.
그 과대표 이후, 나는 또한번의 대결을 가진다. 키가 컸던 남학생. 교지편집을 맡았던 수줍었던 그를 나는 이겨넘겼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기억에는 패배보다는 승리에 대한 것들?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어쨋거나, 이 두건이 나를 우쭐하게 해주고, 그당시 남학생들에 대한 열등감과 피해의식, 그리고 억울함등등이 섞인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결혼즈음..
캐나다에 오니, 탁구장이 없다. 유료 탁구장은 하나도 없고, 마을회관에서 제한적인 시간안에만 개장한다. 사느라고 바쁘기도 했지만, 탁구는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한인들로 조직된 탁구협회에서 취미로 하는 탁구교실을 운영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쩌다 갖게된 남편될 사람과의 탁구시합.
그의 실력은 "별로"였다. 나는 가볍게 그를 눌렀던 것 같다.
한인 직장에서 일하면서 교민탁구대회가 있어서 그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때 난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보다 탁구를 잘치는 여자들이 훨 많으며, 나는 명함도 못내민다는 것을. 그걸 알아서 였던가, 더이상 탁구에 미련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도 많은 시간이 흐른다음, 이제는 실력도 없어졌고, 마음에서 탁구를 떠나보낸 다음에는 그다지 치고 싶지?않다. 한국식 사각형 탁구라켓은 캐나다에는 없는 것같았다. 앞뒤로 칠 수 있는 둥근 라켓은 적응되지가 않는다. 그것도 탁구에서 멀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교회에서 운동을 위해 탁구치는 시간을 연다고 했고, 남자들이 모였었다. 나는 한번도 탁구라켓을 잡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은 들었다. 집안 어디에 탁구대가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겠다고 말이다. 페이슬리에 살때, 탁구대를 놓을 수 있는 곳이 있나 궁리를 해보았다. 가게 옆에 비어있는 공간에 ダ?쏠리기는 했지만, 제자리는 아니었다.
한국에 나갔던 남편이 탁구 "빠따"를 선물로 가져왔다. 남편의 이모부께서 서울시 일반부 선수라고 하셨다. 한국식 사각형 탁구라켓 두개를 받고보니, 다시 탁구에 대한 향수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며칠전 남편에게, 도서관에 탁구대를 놓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단번에 자리가 좁아서 안된다고 한다. 내가 다시가서 꼼꼼히 살펴보니, 책상을 하나 치우면 자리가 나겠드라. 아이들이 이제 방학을 하게 되는데, 겨울에 할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해서 탁구대를 장만해보자 하였다.
그래서 엊그제 탁구대를 조립했다. 무거운 것을 실어와서 조립하는데만도 3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처음에는 남편을 꼬셔서 그날밤 다 하자 했지만, 밤이 깊어지니, 하품이 나오고 졸립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사를 조이는 남편의 등위에서 탁구대 한대를 조립하기 위해 들어가는 못을 헤아려보았다. 족히 100개가 넘는 것 같다.
열심히 조립하고 있는 남편.
그날은 남편과 내가 시구를 하고, 아이들과 조금치고, 어제저녁 남편과 세기의 대결을 가졌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남편을 무시하고 있었다. 탁구의 고수로서 말하자면, 잘치는 사람은 우선 폼이 다르다. 그런데, 남편은 초보에서 조금 나아간 그런 사람의 폼이다.
"나는 안봐준다는 것 알지?"하면서 시작하였다. 첫 게임은 쉽게 나의 승리. 두번째는 남편이 이겼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세번째 게임을 시작했다. 사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 남편을 이겨넘기면 뭐 좋을 게 있어? 그래도 어쩐대. 실력인걸... 하면서. 그런데, 남편의 서브를 몇개씩 받아내지 못하고, 가끔가다 세게친 공(말이 무섭지만, "후려 쌔리기"라고 불렀던 것 같다)이 넘어오고. 워낙 실력이 달아났다고 하지만, 남편은 쉽게 이겨넘길거라 생각했는데, 참패를 당했다.
남편은 그런다.
그때는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잘보이려고 져준건데, 한번 져주었더니 내가 무시해서 이번에 이긴 거란다. 한번 이겼으니까 앞으로 다시 져준다는데...
뭐가 진실인지 알쏭달쏭하다.
어쨋든 매일 저녁 그와 겨뤄볼 생각이다.
아참 그래서, 도서실이 체육실이 되었다는 것, 어째 "공부"하고는 자꾸 아이들을 멀어지게 하는지, 엄마 입장에서 그것도 아주 큰 걱정이긴 하다. 아이들이 시끄러운 데서도 공부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다하긴 하더라만.
겨울방학을 보내고, 탁구대와 한곳에 놓인 책상을 조용한 곳으로 옮겨 배치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도서관을 꾸미기 위해 온힘을 바쳤던 언니가 우리집을 방문하고, 이렇게 탁구장으로 변한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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