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이쁜 언니가 한명 있다.
주저없이 “이쁘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그녀의 미모는 빼어나다.
그 언니가 얼마전에 한국에서 캐나다를 방문했다.
내 나이가 이제 40중반, 그녀는 나보다 2살이 많으니, 50대에 가까운 이제는 쉰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그런 때인데….
한국에서 온 언니를 만나러 한달전에 막내동생 집 근처인 키치너를 들른적이 있다. 조카들이 한글공부를 하는 학교의 운동장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학교 계단에 웬 아가씨가 앉아있다.
긴 머리를 상큼한 바람에 나풀거리며 생긋 웃는 모습에 약간 현기증이 났다.
어떤 묘약이 있는지, 언니는 세월을 비켜서 아예,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요즘 그 언니와 지내고 있다.
대학생때 언니는 나의 코디네이터였다. 언니가 도와주면 그날의 외모는 성공적이었고, 그렇지 못한 날이 이어지면, 나는 선머슴아 같았었지.
나는 드러내놓고 언니의 미모에 감탄하는데, 언니는 “아니”란다. 너무 늙었고, 형편없어 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그런 것을 골똘히 생각한단다.
캐나다 정착을 고려하고 있는 언니는 요즘 나와 함께 가게에 나간다. 영어도 배우고 일도 배우고, 열심이다.
어떤 고객이 내게 묻는다. 가장 무난한 질문은 “네 자매니?”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글쎄나,,,,, “네 딸이냐?” 이렇게 물어본다.
“아, 아니… 딸은 아니고, 우리는 자매인데.”했더니, “아, 그럼 네 막내 동생이니?” 또 이렇게 반문한다.
부처님 가운데 도막이 아니고서는 이런 질문에 꼭지가 안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처님 가운데 도막에 가까운가 보다. 웃음이 더 나니 말이다.
점입가경, 어느날 남편과 함께 일했던 언니를 보면서, 몇 고객이 “남편의 딸”이냐고 물어보았단다.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살았던 평생이 이제 그 앙갚음을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언니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사람에게 민폐끼치는 것도 유분수지,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이렇게 어려보이고, 이쁘다면, 나같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 답답한 동생에게 다 표현하지 못해서 그렇지 불만족스런 부분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조금 더 살이 빠져야 하고, 주름이 너무 많고.. 등등등
제 삼자가 그렇게 한다면 “욕 한바가지” 해주고 끝내겠는데,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언니기에 좀 심각하게 그 문제를 생각중이다. 내게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
옛적부터 “외모”를 거론하거나, 그 방면에 관심을 쏟는 것은 좀 “속빈 사람”으로 간주되어 왔다. 아니, 나는 그렇게 알아왔다. 사회의 모범생인 나는 그런 지나가는 말에 너무 무게를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속빈 사람이 겉을 치장한다”는 말들이 그렇고, “마음보다는 얼굴”에 비중을 두는 사람을 흉보는 많은 글들이 있기도 하다. 드러내놓고, “여성의 미모”를 찬미했다가는 명사에서 미끌어질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외모 가꾸기는 그 관심이 식어들지 않고,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다. 성형이나, 다이어트등 그로 인한 문제가 불거지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다.
문필가들이 한두번 내어지르는 고성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안에 발목잡히지 않도록 경계하는 그런 역할에서 그치는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멋대로 살아왔다. 세수 하고 로션 하나 발라 치장을 끝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끔 80년대 스타일로 거리를 나가게 되더라도, 내 개인의 자긍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도전을 받고 언니 말에 귀를 조금 기울여본다.
언니는 기본적으로 잘타고 났지만, 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언니의 전언에 따르면 요즘 미의 대세는 “피부의 젊음”에 있다 한다. 그러면서 내게 세안의 방법을 몇번이나 설명해준다.
- 크린싱크림으로 닦아낸다.
- 클린징 물비누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물비누에 이렇게 쓰여있다. Forming Facial Cleaner)
- 스킨을 발라 크린싱을 마무리한다.
- 에센스를 바른다.
- 로션을 바른다.
- 영양크림을 바른다..
- 햇빛차단제를 바른다..
이중에서도 세안과 에센스를 가장 중요하게 친단다. 본인의 오랜 임상(?)에 의하면 좋은 에센스를 바르는 것이 피부를 지키는 첩경이란다.
어쩌면 글쓰는 이들이 글자에 옷을 입혀 아름다운 한편의 문장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야가 다를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 줄기는 같은 것이 아닌지.
그렇다고 언니가 “머리가 빈” 그런 사람이라고 상상하면 안된다. 내가 국문과를 가게 된 것은 언니의 영향이 컸다. 어렸을때 언니는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고, 그 시골에서 “시”와 “소설”에 몰두했던 문학소녀였다. 언니를 좋아했던 나는 언니가 하는 것은 무엇이나 동경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통하는 바가 많았다.
이번에 우리집에 와서 함께 머물면서 보니, 언니는 아직도 다독하는 책벌레의 기질이 있는 것을 본다. 그간 사느라 바빠서 책을 멀리 했었다면서 1달간 같이 있는 그 바쁜 와중에 대여섯권의 책을 밤마다 읽어젖혔다.
비지니스 우먼으로 오랜 동안 갈고닦았던 실력이 어디서나 드러나기도 한다. 캐나다의 경제 현실을 이땅에 오래산 나보다 훨씬 잘 꿰고 있다.
내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외모를 가꾸는 것은 가치없는데 수고를 들이는 시간낭비”라는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몰아치는 오류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다행이다.
내게서 비난을 받던 둘째의 외모 가꾸기가 이모의 응원으로 “멋진 소녀”로 지위가 향상된 것도 언니의 공로이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멀고 먼 길이다. 언니가 가르쳐준 “세안법”이나 바로 익혀서 사용해야 할텐데. 언니가 내 곁에서 떠나가면, 원위치하겠지. 그래서 검으틱틱한 잔주름많은 그 피부를 확대 발전시킬 것이다.
언니는 기초화장만으론 미진하다며 여러가지 연구를 하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전문가로 발전할 기질이 농후하다. 그러니 앞으로 언니와 나의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니, 이 일을 어째야 할지..
앞에서 에피소드로 언급했던 “언니가 내 딸”이 됐던 사건을 조금 해명하고 이 글을 맺기로 하자.
우리들이 백인들을 볼때 그들의 나이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백인들은 대부분 아시안보다 나이들어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백인들은 아시안들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나도 때때로 대학생이냐는 질문을 듣곤 한다. 이것이 한 이유가 된다.
또한 이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멋을 부린다. 빠르면 초등학교부터 화장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보면 대학생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내 딸들이 성숙한 편이고 그래서 내 딸로 착각을 했을 수도 있
다.
언니에겐 많은 에피소드가 따라다니는데, 지난번 캐나다를 방문했을때는 18세 이상만 입장시켜주는 카지노를 갔는데, 18세 미만으로 보여서 출입을 거절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특별히 “늙어보이는 것”이 아니라, 언니의 젊음 때문인 것을 독자들은 명백히 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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