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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유대인 학살" 옛얘기가 아니다 "The Reader"를 보고

 

 

   

 

어떤 영화는 영화 한편으로 끝나지 않고,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궁금해진다. 영화가 산밑의 마을이라면, 영화제작에 얽힌 이야기는 그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맥들처럼 웅장하게 펼쳐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DVD에 수록된 Special feature의 연설 장면을 몇번씩이나 "잠시 정지" 단추를 누르면서 이렇게 베끼기를 한 것은, 중요한 내용들이 이안에 숨어있는 것 같아서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The Reader"이다.

 

 

"I run away from what was hidden in Germany but also was very fearful to look at it myself."

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독일로부터 도망쳤을뿐 아니라 내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O.K. I enough with fear, enough with guilt. I have to face it. Germany still suffering from the effects of the past-war."

그래. 두려움, 죄책감이 나를 누르지만, 그것들을 직시해야 한다. 독일은 지난 전쟁의 과오로 지금까지 시달리고 있다.

 

"The guilt is there. I think it will always stay with me. But I think I broke my ownbarriers. It was very hard, emotionally for me. But it was very good . It was like diving into the depth and somehow coming out again. And I am really grateful that I was invited to this project coming to grips with the past."

 

죄책감은 여전하다. 그것은 언제나 내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한계를 깼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무척 좋았다. 말하자면 깊은 물에 잠수했다가, 어찌됐던 수면에 다시 떠올랐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이번 프로젝트에 초대된 것에 대해 대단히 행운으로 생각한다.

 

Production Designer(제작 디자이너)로 영화 "THE READER"에 동참했던 Brigitte Broch의 증언에 가까운 말들이다. "The Reader" 영화가 감춘 진짜 이야기를 우리는 브로치 여사의 말을 토대로 생각해볼 수 있다.  

 

"As a child you grow up and you are loved by your parents. As a child, you are helped and enabled by your teachers, given spirital guidance by your pastors. what happens when you get to a certain age you realize that is no moral certainly because your teachers, your pastors, your parents were involved, whether actively or as passive bystanders in genocide"

 

당신(독일국민)이 자랄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선생님들로부터 배웠고, 목사들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받았다. 어떤 나이가 되면 갑자기 도덕이 붕괴되는 경험을 한다. 말하자면 스승들, 목회자들, 부모님들이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인 방관자로든 대량학살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감독 스테판 달드리(Stephen Daldry)는 독일인들이 최근까지 겪고있는 대량학살이라는 범죄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렇다.  "더 리더"를 어린 소년과 완숙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보는 것은 영화의 일부분을 본 것이다. 이 영화는 독일인들의 치부를 건들이는 역사적 심판에 관한 이야기다.

 

소년과 기차 검표원으로 일하던 한나가 만나던 시점이 1958년이다. "유대인 대학살"이란 역사적 사건은,  이미 무덤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1958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나의 몇해 선배들이 세상에 태어나던 때이다. 그리고 시간은 거슬러 1995년으로까지 간다. 이건 현실이다. 겨우 15년전. 소년은 이제 중년 변호사가 되어있고, 한나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직업적 일로서 유대인들을 이감방에서 저감방으로 저감방에서 개스실로 옮기는 간수생활을 한다. 그녀는 직업에 충실해서, 교회가 불에 타는 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유대인들 모두를 죽게 한다. 

 

 

처음엔 1958년이라는 시간 때문에 혼돈이 왔다. 아우슈비츠가 있었던 때는 1941년부터 1945년 독일이 망할때까지 인데 영화의 흐름상 소년과 헤어진 후에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일한 것처럼 착각을 했다. 시간상 맞지 않는다. 다시 찬찬히 생각하니, 그녀는 소년을 만나기전 이미 수용소 간수를 거친, 볼것 못볼것 다본 그런 여자였다.

 

그녀가 소년과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가 소년과 나눴던 것은, 그저 "정사"였고, 소년은 쉽게 육체의 탐닉에 들어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녀는 그 소년을 언제나 "kid, 얘야"라고 불렀고, 그 소년이 풍기는 학교냄새를 좋아했던 것 같다. 정상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던, 그런데도 글을 읽고싶은 그녀는 소년에게 정사전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런 문맹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많이 일했는지도 모른다.

 

 

한나는 다른 간수들과 함께 재판을 받는데, 주범으로 몰리게 된다. 한나가 사인했다는 서류가 증거로 제출된다. 재판부는 한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한다. 필적을 감정하겠다는 것이다. 한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주동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고, 재판석에서 법대 학생의 신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이클(소년)"은 그녀를 변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일까? 그녀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나는 스스로 문맹자임을 밝히기 보다는 중형을 받는 쪽으로 선택한다. 동정이 가는가? 나의 자존심이 최고 중요한 덕목이 되어가는 세상,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내가 범한 죄보다도 오히려,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에 더욱 집착하는 그런 아집이 그곳에서 보인다. 사면 받는날, 마이클로부터 숙소제공을 받게 되는데, 한나는 감옥에서 자살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마이클이 보내준 테이프로 글자 공부를 해서, 이제는 간단한 정도의 편지를 쓰게 된 한나가 자살하게 되는 건, 또 다시 "자존심"이라는 큰 갑옷 때문이다. 마이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또한편 마이클이 그녀를 변호하지 않은 건, 그녀를 위한다는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행적을 밝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 둘다가 엉켜 시간이 지나간다. 그런 쪽으로 보면 마이클의 침묵 역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비겁한" 행동이었다고 볼수밖에 없다.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한나의 일생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린 나이 20대 초반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했고, 1958년쯤엔 홀로 살면서 생계로는 검표원일을 했고, 어떤 소년과 가끔씩 사랑을 나눴고, 1960년대에 전범으로 붙잡혀 1995년까지 감옥에 있었고, 그 감옥안에서 못깨우쳤던 글자를 배웠고, 예전에 사랑을 나눴던 소년의 보살핌을 받으며 노년을 보내게 되었는데, 감옥에서 자살한다.

 

영화의 이면을 보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한나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서 잘 파악해 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생계 때문에 "직업적으로" 정부에서 하라는 일을 했을뿐이다. 재판받을때 보면, 직업에 충실한 한나를 대할 수 있을뿐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만을 부끄러워 하는 여자로 보인다. 그런 여자를 대상으로 전쟁심판을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다. 

 

소년과의 사랑도 그렇다. 조개탄을 퍼담다가 조개탄 가루가 묻은 얼굴의 소년에게 목욕을 하라 한다. 그녀는 목욕을 끝낸 소년에게 타월을 둘러주면서 닦아주는데, 이미 자신도 전라가 되어있다. "어린애"에게 할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대책없는 여자다. 독일의 범죄도 이런 것들의 연장인가? 작가가 한나와 독일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려 했나. 얽힌 실타래가 풀릴 것도 같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같은 시대 한국엔 일본강점기가 있었다. 독일에서 처형당한 유대인들이 작게는 150만명, 많게는 4백만명이라는데 일제 강점기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군인, 경찰들에 의해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그 숫자가 밝혀지기나 할까?

 

독일이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너무 수치스럽게 여기고, 독일 국민인 것을 "민망히"여긴다는 것을 이곳저곳에서 전해듣기 때문이다. 제작 디자이너처럼 본국을 피해서 남의 나라에서 수십년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들의 죄는 천하만국에 다 밝혀진 것으로 보이고, 전범들의 처리에도 촉각을 세우는 게 분명한데, 일본은 어떤가 말이다. 이 영화는 다시한번 인간들의 광기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런 광풍속에 이렇게 어이없는 인생들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