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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쿳시의 "추락".. 어려움뒤에 더큰 어려움이 있다

일단 재밌다.

책읽는 즐거움을 원한다면, 이 소설을 잡아보라.

그런데 읽은 다음, 뒷처리가 난감하다.

그냥 재미로 끝나지 않고, 무언가 끊임없이 내게 요구한다.

"책읽은 값"을 지불하라 한다.

 

그래서 책상에 앉았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건 없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노벨문학상 수상자 J.M.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에 대한 이야기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지적이어서 존경받고, 잘생긴 중후한 남자교수가 겪는 추락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는 재미가 여간 있지 않다. 소설은 이미 옷을 벗고있다. 아하 그러니까, 이 소설속 주인공이 정말 실존인물같게 생각된다. 그래서 그의 난잡한 사생활을 훔쳐보는 재미가 그렇게 컸나 보다. 그 난잡함은 여자와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는 아내와 가정과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자신이 1주일에 90분 동안 여자하고 같이 지냄으로써 충분히 행복해진다는 사실에 놀란다.(p13)

 

고정창녀를 정해놓고 1주일에 한번씩 그녀에게 들러서 성욕을 해결한다. 이때부터 독자는 독사눈이 된다. 그가 이렇게 부도덕한데, 그의 삶이 안전한 것 같아서 시샘이 난다. 그런데, 그런 독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듯 그가 "좋아하는 그의 여자"가 가정을 갖고사는 2중 생활자임을 목격하게 된후 그전에 갖던 그런 재미는 반감되고, 결국 그녀가 그를 버림으로써 이 생활은 막을 내린다.

 

그런 다음, 헛헛한 이 남자의 마음에 다시 새로운 여자가 들어온다. 그 학교 학생인 멜라니 아이삭스양. 그녀와 추구해서는 안될일을 또 저지른다. 그것도 치밀하게. 지난번 자신에게서 멀어졌던 창녀를 찾던 그 치밀함으로 그는 멜라니의 주소도 학생기록부를 보면서 찾아내는 "지능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냥 의지없이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다시 독자들은 긴장한다. 이 사랑이 계속될까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한다.

 

이번 사건은 지난번 창녀에게 바람맞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다. 멜라니의 남자친구가 찾아오고, 그를 협박한다. 그의 부모가 등장하고, 결국 학교에서 알게 된다.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비굴한 사람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학교측에서 적절한 반성을 보여주면 용서해줄 의도가 있어보이는데, 그는 그걸 거부한다. 그가 했던 것은 그의 정욕에 따라 움직인 것이고, 그걸 잘못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추락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락을 조금씩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의미없는 교수생활을 청산할 생각을 한다. 책속에는 학생들이 더이상 듣고 싶어하지 않는 심도깊은 영문학 이야기도 나온다. 그에 의하면 "배우러 온 학생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데, 가르치러 온 교수는 가르치면서 가장 예리한 교훈들을 얻는다".

 

어쩌면 지난 두번의 결혼과 이혼에서,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의 무분별한 섹스에서부터 그의 사회와의 사이에 쌓았던 담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52세 남자의 추락은 그전부터 준비되어졌는데, 마침 특별한 사건 아래서 걷잡을 수 없이 가속회되어간다.

 

지금까지의 추락만 해도 그가 감당하기 벅찰 것 같은데, 이번에는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다. 시골의 한 마을에서 자신의 레즈비언 여자친구와 농부생활을 하며 사는 그의 딸을 찾아간다. 그의 딸이 나오면서 소설의 배경이 남아프리가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황급히 기억하게 된다. 흑인 농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의 딸 루시. 그녀의 여자친구는 잠시 농장을 비우고 있다. 레즈비언이라는 언급도 있듯이, 아버지의 이해에서 멀어진, 이미 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성인 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딸은 세명의 흑인들로부터 강간을 당한다. 데이비드 교수도 그날 함께 있다, 거의 목숨을 잃을뻔한다. 그만큼 불안한 땅이 남아프리가공화국이란 말인가 보다. 흑인들의 명백한 범죄가 "백인에게 하는 것은 그다지 흉이 안되는 이상한 환경"임을 알게 된다. 예전에 일본 강점시대에 일본인에 대한 암살은 독립운동으로 간주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교수는 자신의 문제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냉소적이고, 비상식적이었다. 제자와의 추행사건때  스스로를 건질 기회가 있었음에도 교수위원회의 권고를 거절할 때는 못말리는 이상주의자 같았다. 그런데 딸의 문제에는 정말 상식적인 인물이 된다.

 

이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의 딸과 데이비드 교수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진다. 완전한 아프리카땅의 농부로 살고자 하는 딸은, 그 강간범을 옹호하는 흑인의 몇번째 아내인가가 되려고 한다. 이 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할 대목들이 곳곳에 나온다. 딸의 결정과 그녀의 태도를 데이비드 교수뿐 아니라,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라고 하지만, 그건 마치 백인들이 저지른 이 사회의 악행에 대한 희생양으로써 루시라는 딸을 작가가 이용한듯 싶다.

 

그녀는 예전에 백인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것처럼, 그땅에 살기위해서 흑인남자의 3번째 여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신변보호를 위해서. 이런 딸을 그 사회에서 빼내기 위해서 그남자는 최선을 다한다. 딸이 추천해준 수의병원에서 개의 안락사를 돕고, 그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한다. 관심없던 농사일과, 동물보호하는 일도 하게 된다. 그건 그가 딸을 돕기위한 한 방편이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데이비드교수의 그런 변화였다. 자신을 위해선 어던 타협도 불허했던 그가, 딸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설득하고, 자신이 도울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 그러나 어쨋든 그들은 이미 너무 가치관이 벌어져있다. 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받아들이려한다. 수치심도 없다. 결국 자신의 조수로 일하던 흑인남자의 아내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교수가 최선을 다하지만, 그의 도움이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다. 딸 루시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딸을 돕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자 이 교수는 차츰 지친다.

 

오랫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비워둔 집에 들어가자, 그곳엔 또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집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도난당했다. 창문은 뜯겨젔고,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딸이 강간당한 것처럼 그의 물건들도 모두 강간당했다.

 

보통 절도는 아니다. 떼로 몰려와서 그곳을 싹쓸이해 자루와 상자와 여행가방에 물건을 가득 채워 달아난 것 같다. 전리품, 전쟁 배상, 거대한 재분배 운동의 일환. 이순간 누가 그의 구두를 신고 있을까? 베토벤과 야나체크 음반은 새 주인을 만났을가? 아니면 쓰레기 더미에 던져졌을까?(p267)

 

두 인종간의 철저한 불신이 존재하는 곳. 흑인들은 법에 의존하지 않고 불법적인 일을 당당하게 행한다. 그것이 더욱 두렵다. 대학안에 교수로써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그 보호망이 풀리니, 이젠 표적이 된다.

 

학교를 다시 방문하자, 자신의 교수실에 다른 교수가 있고, 사람들은 더이상 그전에 알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는 여행중에 자신이 추행했던 그 가정을 찾아가 마음으로 속죄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과"를 말한다. 그 와중에도 멜라니의 아름다운 동생에게 눈길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 같다. 추락을 경험한 늙은 교수가 아직도 자신의 성정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 비속함을 끈덕지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까?

 

"데이비드, 루시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이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여자들에게는 적응력이 있거든요. 루시에게는 적응력이 있어요. 그리고 루시는 젊어요. 그녀는 당신보다 더 땅에 가깝게 살지요. 우리 둘중 누구보다도 더."

 

데이비드가 도와주는 여자 수의사 베브 쇼의 이야기다. 못생긴 여잔데, 데이비드 교수가 잠자리를 같이 한다. 연민에서? 어쨋든 베브 쇼는 루시에게 맡기라고 한다. 루시는 한번의 강간으로 아이를 임신한다. 그리고 그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그리고 좋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워즈워스를 그렇게 읽고서도, 시골생활에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기야 예쁜 여자들을 제외하면 아무것에도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서 그를 붙들었지? 지금은 눈을 교화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p328)

 

엄청난 일들이 지나가고, 그 어떤 것도 그의 힘으로 멈추게 하거나,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데이비드 교수의 반성문쯤으로 보인다. 스스로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나게 된다. 역사의 힘에 순응하는 것, 그것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라고 이 책은 말하는 걸까? 강간과 약탈까지도 참아내야 하는, 그들 세대들의 죄가 아직도 보복받으려면 한참 먼 그 땅의 현실을 이야기 하려는 것인가?

 

데이비드 교수는 학자의 마지막 성공으로 작은 오페라를 상상하지만, 그것이 무대에 올려질지는 미지수다. 그저 그가 앞으로 해야할 한가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으로 짐작할뿐.

 

아버지와 딸을 통해,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흑백구도에서 펼쳐진 불협화음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더이상 데이비드 교수의 추락을 재미있어하고, 고소해 할 수 없다는 데 닿게 된다. 어쩌면 건겅함이 있다면,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과도한 이성과 감정의 사용으로 중심을 못잡던 교수가 그나마 인간성을 회복하는데는 그 딸의 역할이 컸다. 가여운 딸의 역할이.

 

"추락"은 아직도 진행중일수 있음을, 어려움은 더 큰 어려움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더 큰 어려움에 비한다면 지금의 "어려움"이 오히려 쉬운 것임을.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광범위한 파장은 이렇게 넓고 깊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평자들이 이 소설을 정치적인 소설이라고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