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파리대왕"과 "수레바퀴 아래서" 두권의 책을 읽었다.
파리대왕은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윌리엄 골딩의 첫번째 장편소설이다.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억류하게 된 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유명한 소설이니, 읽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나를 긴장시켰는데, 아이들 세계에서도 어른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 집단의 우두머리되기, 회의, 생존전략 짜기, 패가르기, 공동체 의식, 방화, 폭력, 살인까지.. 그들은 저희들이 속했던 사회에서 배운 것을 재현했고, 결국에는 힘이 그 세계를 장악하는 것을 보여줬다.
그래도 무인도에서 구조되고자 하는 목표를 단단히 세운 랠프라는 소년이 그 무인도의 소년들을 인도하는 대장이 되었을때는 그들이 회의라는 것도 하고, 순번을 세워 구조 모닥불도 피우고, 함께 표류한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도 돌보고 하는등 이성적인 부분이 있었다. 이것 또한 그들이 속해있던 영국이라는 신사의 나라에서 배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냥을 좋아하는 잭은 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제패거리를 만들어나가고, 결국 랠프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사고를 할줄 알고, 사태를 분별하는 랠프와 돼지(이름이 안나오고 이렇게 나온다)가 결국 멧돼지 사냥을 해서 동료들을 먹여살리고, 얼굴에 페인트칠을 하고, 창을 만들어 든 잭의 무리들에게 눌리게 된다.
어느 편이 좋겠어? 너희들같이 얼굴에 색칠한 검둥이처럼 구는 것과 랠프같이 지각있게 구는 것과
오랑캐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돼지는 다시 소리쳤다.
규칙을 지키고 합심을 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을 하는 것- 어느편이 더 좋겠어?
다시 함성과 휙하고 날아오는 소리
소음에 지지않고 랠프가 다시 외쳤다.
법을 지키고 구조되는 것과 사냥을 하고 모든 파괴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좋으냔 말이야?
랠프, 돼지쪽은 이성을 대표하고 잭과 그 패거리들은 육체적인 힘을 우선하는 쪽으로 이렇게 두 가치관으로 나뉘어서 대결을 벌인다.
겨우 열서너살된 어린아이들이 이제는 광기서린 싸움꾼이 된 것이다. 돼지는 이들이 굴린 바위에 맞아 굴러떨어져 처참하게 살해되고, 랠프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나중에 아이들을 구하러 온 해군은 처참한 몰골의 랠프를 보고 묻는다. 전쟁놀이를 하고 있냐고. 그들은 전쟁놀이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한 것이었다. 전사자까지 있는. 랠프는 영국의 아들답게 행동하려 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못돌아갔다. 친구도 살해당하고, 아이들의 천진성도 없어진 인간본성을 보고말았다. 그는 구조자 해군장교앞에서 목을 놓아 운다. 그 무인도의 대장으로서, 패배한 대장으로서 말이다.
또 한편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가여운 한 영혼 한스 기벤라트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너무나 상식적인 아버지밑에서 자라난 뛰어난 수재 한스는 그의 집안뿐 아니라, 시골마을 전체에서 주목을 받고 자란다. 수재들이 가는 길은 목사나 교사가 되는 것으로 정부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쳐서 합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편으론 한꺼번에 빼앗긴 아이들의 놀이 이상으로 값어치 있는 시간을 이곳에서 맛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자랑과 도취와 승리감에 넘쳐 마치 꿈과 같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자기는 장차 뛰어난 사람이 되어 언젠가는 속세와는 동떨어진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라는 행복감에 젖었었다.(21쪽, 소담출판사)
한스는 동네 목사, 교사, 어른들의 기대를 어깨에 걸고, 시험준비를 하고, 본인은 떨어졌다고 믿었던 주 시험을 2등으로 합격한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신학교 생활.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중에 그의 인생에 영향을 준 헤르만 하일너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일너는 아주 이상한 인간이었다. 공상가였고 시인이었다. 한스는 이제까지 몇번인가 하일너에게 놀란 적이 있었다. 그는 누구나가 알고있듯이 그리 공부만 하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많아고 멋진 대답을 할줄 알았다. 더욱이 그는 그 지식을 경멸하였다.
하일너하고의 만남은 공부벌레 한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신학교에서 왕따취급을 당하던 하일너를 한때 배반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다시 친구가 된다. 한스는 이제는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고, 오랫동안의 두통에도 시달린다.
한스에게 공부를 강요하며, 인생성공의 동기부여를 주입시켰던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우선 그의 아버지, 그리고 동네 목사, 그리고 신학교의 교장선생.. 그들은 한스의 정신세계와는 상관없이 그를 규격화된 인간을 만들려 유야무야 노력한 인물들이다. 그에게 기대를 한짐 지우고, 본인들은 그것이 그의 장래에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스는 육제척 건강의 쇠퇴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특히 하일너가 신학교에서 도망간 이후, 그는 학교측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본인도 더이상 학업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교장선생을 비롯하여 기벤라트의 아버지나 교수나 조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들은 어느 누구나 다 한스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소망을 방해하는 독소, 딱딱하게 굳은 게으름을 발견하고, 이를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길을 밟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온정에 넘친 조교수를 제외하고는 가냘픈 소년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얼빠진 웃음 뒤에, 멸망해 가는 영혼의 시달을 받아 소년이 물에 빠진 듯이 불안스럽고 절망적인 가슴을 부여안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나 아버지나 몇명의 교사의 잔인한 명예욕은 이 소년이 숨김없이 그들에게 드러낸 멍들기 쉬운 영혼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짓밟아 버림으로써, 이 나약하고 아름다운 소년을 이런 지경에까지 데리고 와버렸다는 걸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가장 감수성이 강하고 위험한 소년시절에 매일 밤 늦게까지 공부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 버렸던가? 왜 라틴어 학교에서 일부러 그를 동부들로부터 멀리 격리시켜 버렸는가? 왜 낚시질이며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시켰던가? 왜 심신을 깎고 여리게 하는 것 같은 쓸데없는 공명심의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어 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땅히 쉬어야 할 휴가를 그에게 주지 않았는가?
이제와서는 지쳐 빠진 노새가 길가에 쓰러져서 아무 쓸모도 없게 되어버렸다.
라고 지은이는 울부짖는다.
한스는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고, 고향에서도 몸을 추슬리는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그리고 순박한 그가 당한 사랑의 유희가 또한번 그를 쓰러뜨린다. "다른 사람의 육체와 맥박과 호흡을 뜨겁게 너무나 가까이에서 느꼈기 때문에 그의 심장의 고동이 멎어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할 정도로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는 엠마와의 키스와 사랑에 거의 죽음직전가지 갈 정도로 황홀경에 빠진다. 그러나 엠마는 그런 그를 남겨두고 말도 없이 떠나버린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기계공의 일터로 가기로 한다.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늦처져 출발한 것이다. 그래도 한스는 어려움 가운데서 처음으로 노동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숙련공이 되어있는 친구의 권유로 주말에 술을 먹은 것이 한스의 마지막날이 된다. 술취해보지 않았던 그가 술에 취해 강물에 빠졌거나, 날개꺽인 새가 되어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이 두편의 소설을 읽으니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쯤, 그때 겪었던 정신적 방황이 생각난다.
대학시험도 붙고,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던 그때, 왜 그리 사는 게 무겁게 느껴졌는지 모를일이다.
나이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그 나이때까지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대학만을 목표로 달려왔던 시간들이 일단 주춤하면서, 나라는 존재와 외부 사이에 격리를 어떻게 순조롭게 연결시켜나가야 하는지,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될른지, 그런 것들에 대한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방황의 내용에 대한 선명한 기억은 없으면서, 초췌한 모습으로 광장에 홀로 서있는 듯한 영상은 내 마음에 찍혀져있다.
위의 두 책이 유년기와 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다루고 있다. 정말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같은 그 시절을. 그때를 무사히 넘긴 어른들인 우리들은 그들에 대해 어떤 태도여야 할까?
파리대왕속의 아이들이 한쪽 아이들이 오랑캐가 되어가는 등 섬뜩했지만, 무인도 생활 초반에 보여준 그들의 지적인 출발은 내심 신선했다. 자연을 이용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구조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어른같은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컴퓨터가 없던 1950년대의 아이들이라서 지금과 조금 다를까 싶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가 보여준 "어른들"의 모습에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틀안에 갇혀있는 어른들"의 모습에 내 모습도 있음을 본다. 한스가 좀더 영악했다면, 그렇게 어른들 등쌀에 휘둘리지 않았을텐데.
어른들의 세계에 오면 아이들에게 자랑할만한 문화가 있을까? 18살 성인식을 치렀고, 19살이 되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딸을 보면서, 그들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것은 복권, 술, 담배를 자유롭게 할수 있다는 것일텐데, 정말 어른세계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진다. 그런 것보다 더 의미있는 것들이 있을텐데, 어째 명쾌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두책의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인지, 어른세계에 대한 긍지를 가질수가 없으니 책 읽은 후유증이 크다고 해야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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