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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나이 60에 이룬 꿈.. 작은언니

는 그녀를 욕심이 많다고 속으로 흉을 봤다.

 

그녀가 캐나다를 방문했을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모두 엉거주춤한 채인 우리 자매들에게 그녀는 명령했다. 한가족당 계획세워서 돌아가며 나를 책임지고, 캐나다 구경을 시켜줘라. 그때 어디를 갔는지, 어퍼 캐나다 빌리지였던 것 같다. 그녀 덕에 우리도 좋은 구경했던 기억은 나지만, 그렇게 당당하게 "구경권리"를 주장했던 사건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당연히 구경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선처"를 바라는 것에 비하면 그녀의 요구는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작은" 혹은 "짝은" 언니라 불려졌다. 우리 형제자매를 생각할때, 위로 치솟은 소나무같은 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건 맨위에 단 한명의 남성 오빠가 있고, 그 밑으로 올망졸망한 여자아이들이 10명이 있기 때문인가 싶다. 그 열명중에 "짝은 언니"는 서열2위인데, 마치 자매가 몇안되는 집의 둘째처럼 그렇게 남들의 귀를 속이면서 불러왔다

우리집의 특별한 남자 오빠는 언제나 서열에서 제외하게 되는데, 그건 우리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오빠까지 넣으면 둘째언니가 세째언니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세번째 언니라는 소리도 되니, 우리들은 오빠는 예우상, 형편상 서열에서 제외시켰던 것 같다.

 

서열 7위인 나는 언니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같은 언니와 같은 나와는 성격이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일찍 독립했던 언니는 우리집에서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개척한 첫인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부모님을 십분 이해하는 심정으로 이야기한다면, 1950년 한국전쟁이 3년을 끌었고, 그전과 후로 태어난 아이들을 먹이는 것이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언니들의 배움은 중등교육에서 끝이 났다.

 

배움이 부족한 상태로 서울살이를 했다는 것은 어떤 고생들을 거쳤을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시대의 도움으로 일찍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됐다. 그것이 초등학교 5학년때. 큰언니가 경영하는 미장원의 한방에서 얹혀 살다가 작은언니네 집으로 갔던 게 중학교때였다. 그때 작은 언니는 이미 결혼하여 조카들을 낳고 살고있었다. 단칸방 셋방살이에 친정부치 한명을 더 데리고 있었어야 했던 그 심정을 내가 알수 있었을까.

 

나는 나대로 어린 나이에 눈치밥 먹느라고 꽤나 고생했다. 언니는 사람을 잘 부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어린 나에게 겨울, 밖에 있는 수돗가에서 찬물에 빨래를 한통 하라고 했던 것은 두고두고 안잊힌다. 어쨋든 이런 기억으로 나는 언니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언니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 대학에 가고, 직장생활을 할때 나도 동생들을 데리고 자취생활을 했는데, 최근에 동생들이 내게 큰 원한(?)”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언니가 돼서 동생들 도시락 하나 제대로 싸주지 않았다는 게 막내의 증언이다. 그때 젊었던 나는 사느라 바빠서동생들에게 주의를 기울일만한 여력이 없었는데, 내가 작은언니에게 가졌던 그런 서운함의 종류일 거라고 요즘 고개를 주억거려본다.

 

어쨋든 우리 자매들은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관계를 이어나왔다.

 

, 지금까지는 서론이다. 대강 우리집의 사정을 알아야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 사건을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작은 언니는 젊은 시절 야쿠르트 아줌마를 비롯해 여러가지 고생하면서 자식들을 키웠지만, 형부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고향땅에서 연 부동산 사업이 말하자면 대박을 맞아, 그녀의 50대부터의 삶은 안정되고, 넉넉해졌다. 그래서 그동안의 고생은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젊은 날 이루지 못했던 꿈도 어느정도 보상받나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작은 언니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큰지 몰랐다. 그녀는 중학교 졸업은 했지만, 그당시 학교 사정으로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과, 고등학교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갖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최근에 알게 됐다. 3년전부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몇번의 고배를 마시고, 그녀가 환갑이 되는 올해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그녀의 표현으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우리들은 몸도 돌보지 않고, 그 나이에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별 쓸데 없는 짓이라며 속으로 냉소적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합격을 했고, 우리는 입으로 축하만 해주면 되니, 박수를 열렬히 쳐주었다.

 

언니는 글을 많이 썼다. 감정이 풍부하지만, 너무 적나나하고 평이한 결론에 이르는 언니의 글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대학에서 뭐 배운 건 없는 것 같은데, “남의 글 무시하는 법은 잘 배운 나는 똑똑히 언니의 글을 들여다보지 않았었다.

 

언니는 검정고시를 마치고, 서산시청에서 주관하는 문학수업을 들었는가 보았다. 칼럼쓰기도 배우고, 시공부도 하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줄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지난 언니의 환갑에 동생들이 작은 돈을 모아, 언니에게 문학관계 도서를 선물하긴 했었다. 언니의 향학열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었다고나 할까?

 

언니의 글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언니에게서 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 ~

 

언니가 우리들에게 보여준 글은 언니가 소장하고 있는 것의 몇 프로도 안될 것이다. 언니는 자신의 외로움과 갈망을 글로 녹여내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가 욕심장이일뿐 아니라, 유난히 "정"이 많다는 것도 빼놓으면 안될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데, 많던 가족의 대부분이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외로움은 깊어가, 우리는 바람결에 실려오는 언니의 통곡을 자주 들어야 했다.

 

2009년은 작은 언니에게 큰 해가 되었다. 언니가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곳에 가면 언니의 글과 등단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니를 발굴해준 자유 문학세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영월의 책상머리

 

 http://blog.daum.net/happyday9166

 

 

 

언니의 성공이 우리 자매 모두에게 찔림이 되고 있는 것 같다. 특별히 내게는 그렇다. 나이 50도 안돼 모든 욕심, 갈망, 정열주머니를 탈탈 털어내어, 텅빈 상태로 내안에 납작하게 모셔두고 있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언니의 소식이 오늘 새벽 나를 깨운 이유가 되는지도 또 한번 생각해 본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조금씩 그 납작해진 주머니에 바람을 넣어야 할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니, 그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밤잠 못자고 고민하는 날들이 더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정규교육을 그것도 문학을 공부한다는 대학교육을 마친 나와 막내를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언니의 고등학교 졸업장은 대학졸업장보다 더욱 값진 고귀한 증서이다. 시인 등단하면서 처음으로 고졸이라고 자랑스럽게 썼다는 언니의 건필을 빈다.

 

시인 이영월님 좋은 시인되세요.

 

 

졸업장 받은 날

 

이영월

 

1

몸살 진하게했다

때론 꾸역 꾸역 삼키우고

토해 내며

내안의 나 누구인지

알듯, 모를듯, 누가 이기나

실험 대상으로 날 얹어 놓았다

 

할 일도 많아라

여태껏 보듬어 준 내 남편 만져 놓고

하루 세끼 먹는양 보통 사람 한끼양

쪼개어 삼키우니 손 물 마를 날 없어라

 

틈틈이 새겨 놓은 질긴 날들

3년 넘어 머언 길

오종종 잘도 걸어 왔구나

어둔하고 고리타분한 고집장이

환갑 맞은년에 드디어 해 냈음이여

 

2

어릴 적 궁금한것 많던 물음장이

할미 되도록 변치 않는 맘 알게 되었다

콩심어 싹 틔울 때

3알~5알 묻어

2알은 배곯아 먹이 찿는 새들에게 내어 주고

눈 자로 듬성 듬성 길 맞추어

한 밭 자리 싹 틔워 가지런히 늘어 놓았다

 

공부란것도 그리했다

정도를 밟으며

대충 대충 해 지지는 않았다

굼뱅이처럼 느렸고

이해더뎌 몇 번이고 반복 해야했다

 

뚝심있게 걸어 갈

목표 놓고 포기하지 않았던 길

까만 밤

샤프심 갈아 끼우며 써 내려 갔던 것이

쌓이고 쌓여 날 성장 시켰다

 

빳빳한 칼라 풀 먹여 세워 입진 않았어도

옆 가름마 타 내린 단발머리 산뜻한 여고생 아니어도

시들어진 이 나이에 학력 어디까지냐 묻는 이 없어도

싸늘했던 가슴팍 온기로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