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특별한 드라마가 있다. 빠져도 좋을만한, 빠지기를 잘했다고 할만한 재미있는 드라마다. 이걸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배경.. 1970년대, 박정희 정권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색상의 옷과, 넓은 카라, 판타롱 바지를 입었다. 통금시간이 있고, 다방과 중국집, 카바레를 전전하는 쇼단의 이야기다.
인물.. 배우, 가수, 쇼 관계자, 주먹세계 사람들, 정치가, 권력에 희생당한 사람, 권력에 빌붙은 사람,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 안가의 여자들, 쇼단 운영자, 카바레 관계자들, 미용실, 식당,,
이런 드라마가 왜 나를 끄는 것일까?
그곳에는 "겪지 않았고 잘 모르지만, 소문으로 들었던 그시절 그이야기" 가 있다. 모른다고 그런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배경이 되었던 한국현대사가 그곳에 알알이 박혀있어 그 내용이 파헤쳐질때 전율과 치떨림이 있다. 그 시절로부터 벗어나 있으니 일단은 위험에서 멀리 있으면서 그 위험안에 있는 사람들의 "난관극복기"에 시선이 쏠리지 않을수가 없다. 주인공은 주먹과 배짱이 세고, 의리파이면서 잘생기기까지 한 강기태, 그가 헤쳐나가는 그의 운명이 모험적이고, 영웅적이기까지 하다.
빛과 그림자 15회 역시 드라마 방영시간이 왜 이리 짧은지, 한탄하며 끝냈다. 오랜만에 흠잡을 데 없는 드라마를 만나니, 정겨운 친구가 먼곳에서 찾아와 매일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 있다.
잘못된 드라마의 최대의 단점이라면, 억지로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 대해 한 출연자가 "그 사실"을 숨긴다. 그 일이 등장인물 모두에게 알려지는 과정에 드라마의 절반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주요 등장인물이 10명이면 그 10명의 각각의 반응이 다 나와야 한다. 시청자는 이미 그들의 반응을 따로 보여주지 않아도 그려낼 수 있다.
그 "숨긴 사실"이 그나마 설득력을 가졌다면 모르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지난 주 "폼나게 살거야" 처럼 군대에서 실수로 어깨를 다쳐 군대를 의가사 제대하게 된 나주라(막내아들)의 에피소드에서 보면, 그 누나는 병든 엄마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병든 엄마가 그 사실을 알면 실망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 자식을 걱정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노라의 효심에 시청자들이 박수를 보내줘야 할까? 주라가 부상을 이유로 군대를 일찍 전역받고 집에 온 것에 대해, "얘가 군대에서 너무 잘해서 일찍 제대했데. 말하자면, 월반하는 것 같은것.." 하면서 제 오빠에게 긍정을 촉구하는 눈빛을 보낸다. 병약한 엄마에게 큰아들은 "그런 게 있다"고 말해준다. 엄마앞에서 거짓을 주고받는 식구들. 이런 에피소드에서만 봐도, 군대에서 부상당한 것을 왜 숨기는지, 그 숨긴 것으로 인해서 다시 일찍 제대한 동생에 대해 "억지 해석"을 붙이는 일로 드라마의 나머지 시간들이 소용될때 드라마가 한심해진다.(이럴때 왜 내가 드라마를 보나? 하는 자기 모멸에 이르기도 한다)
한가지 더 말하자면 노라는 주라의 실제 어미였다는. 그간 자식이 낳은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탈바꿈시켜 키워온 모성애라는 엄마, 이는 "숨긴 사실중에서는 꽤 큰 일"에 속한다. 20여년간 숨겨진 비밀, 그리고 때마다 "나만 알고, 너는 모르는" 그런 일들을 만들어서, 드라마를 연장시킨다. 이효춘의 암환자 열연과 극심한 모성애 역에 동정이 가기도 하지만, 숫제 입만 열면 모두가 "상대방을 위해" 거짓말을 하던지, 진실을 감추든지 하는 전개 때문에 안타까왔다. 그러면서도 한편한편, 봐내곤 하는 "얼빠진" 시청자인 내게 화가 나고. 이런 드라마에 막장이라는 이야기들이 붙는다. 폼나게 살거야,는 그럭저럭 시청할만 했는데, 그만 지난번에는 그동안의 시청한 시간을 물어내라고 방송국에 전화할뻔 했다. 이럴때 드라마 작가가 바뀌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대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마를 찍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드라마속에 계속 말도 안되는 이야깃거리와 "거짓말", "진실게임" 같은것이 등장하지 ..대라와 부인의 갈등이 그에 속한다..
그런데, 빛과 그림자는 그런 식으로 드라마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이곳에도 숨김이 있지만, 이건 철저히, "나쁜 놈"들이 일을 은밀히 처리하려는 그런 "숨김"들이다. 쓸데없이 진실을 감춰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알량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는 역사가 있다. 꼿꼿한 이북출신 자수성가자를 죽이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에 온 집안의 재물이 흔적도 없이 날라가는 그런 처참함도 있다. "빨갱이" 로 몰아서 고문에 죽은 강만식(강기태의 아버지)을 자진한 것으로 위장해도, 자식조차 아버지의 죽음을 어느 곳에다 호소할 수 없는 절대권력이 판을 쳤다. 이 절대권력들은 양아치, 깡패등을 동원해 주변을 제압하고 권력을 한군데 모으는 빗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 권력에 맞서, 작은 힘으로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강기태(안재욱분)의 역할에 서민들의 눈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빛과 그림자를 "천일의 약속"과 함께 시청했던 기간이 있었는데, 천일의 약속이 왜 그렇게 협소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알게 됐다. 빛과 그림자가 가진, 시대를 아우르는 포용력이 천일의 약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무대도 두 드라마는 확연히 구별되어, 천일의 약속이 아파트, 부잣집, 서민집, 일터와 거리가 다 였다면, 빛과 그림자는 무대가 그에 비하면 가이없이 넓어서 시청자들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스케일"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드라마에서 이렇게 중요하구나, 두 드라마를 동시간대 시청하면서 느꼈었다.
그뿐인가. 천일의 약속이 수애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수애 드라마"였다면, 빛과 그림자는 강기태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에게 목을 멘 빛나라 쇼단 단원들의 일희일비부터 영화, 음악 등 연예계의 초기 태동까지 감을 잡을 수 있어서, 매순간이 긴장이 고조됐었다. 단편과 장편의 대결이었달 수도 있었겠다. 사랑라인도 빛과 그림자에서는 매콤한 양념같은 맛이지, 그것 하나로 드라마를 엮지 않았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정혜를 통해, 평범하고 순수한 연예지망생이 어떻게 변하는지 볼수 있을 것이다. 남상미가 연기한 이정혜는 여러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만, 본인은 지고지순한, 순정파로 그려졌다. 그녀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자와, 그를 엎어뜨리려는 세력으로 드라마를 나누어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두 드라마를 놓고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서 떠나있지만, 빛과 그림자가 시청자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다양한 드라마적 장치를 갖췄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비교를 해봤다.
유명가수들을 확보한 "세븐 스타" 쇼단의 노상택 단장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연예계 장악의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싸우는 강기태 역시 그를 도와주는 인맥들이 형성되는 것을 본다. 본인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그 바닥 본연의 속성을 보여준다. 다만 강기태는 노상택과는 조금 다른 행로를 걷게 되리라는 것, 그런 것들이 약간의 위로가 되려나? 빅토리아 나이트의 송미진 사장으로 분한 이휘향의 카리스마, 그녀 역시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힘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드라마는 70년대, 80년대를 주름잡던 권력의 추잡스러움을 파헤치려는 것인지 모른다. 화려한 가수들 뒤에, 성공한 정치가들 뒤에, 성공한 기업가들 뒤에 도사린 권력이라는 이상한 괴물을 말이다. 권력의 힘을 빌어 주인을 배반하고, 주인의 재산을 가로챈 조명국은 노동자계급이 지주를 학살한 것과 같은 플롯이지만, 오히려 주인이 빨갱이로 몰려 죽고, 그들의 말대로라면 "빨갱이같은 짓을 한" 조명국은 권력의 하수인으로 새로운 자본가 계급으로 자리를 잡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조명국을 통하여는 "수단" "방법" 안가리고 반대편을 짓밟아버리는 괴물의 모습을 확실하게 재생했다.
옛 서울거리를 재현해놓은 합천 영상 테마 파크를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
드라마는 70년대 거리와 풍물을 재현해내고 있다. 쇼단 단원들의 사무실 역할을 했던 다방이나, 단무지, 양파만 시켜먹으며 머물렀던 중국집, 그들을 쫓아내지 않는 후덕스러움은 현대엔 발견할 수 없는 전경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합천영상 테마파크에 꾸며진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 테마파크는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서울거리를 재현해, 많은 드라마, 영화등이 이곳에서 촬영된다. 참으로 대단한 작업을 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장철환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시대의 비리들이 이곳저곳서 터져나오고, 그에 맞서는 민간인들의 좌충우돌기는 그 당시를 겪은 세대에게나, 말로만 들었던 세대들 모두에게 현실을 이해하는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권력이 인간을 비인간화 하는 그런 되먹지 않은 시대에서 지금은 좀 멀어졌기를 바란다. 빛과 그림자, 그 둘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인위적 조명으로 그 빛과 그림자를 만들진 말아야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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