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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카사블랑카.. 사랑을 떠나보내다

영화를 보기엔 밖이 너무 화사했다. 흰눈위에 나무들이 짙은 그림자를 만든 건, 햇빛 때문이리라.

잠시, 영화를  보지 말고 눈밭을 걸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마음속에 작정한 대로 하자, 그러면서 거실에 커텐을 쳤다. 텔레비전 화면과 햇빛은 또한 상극이니까.


영화를 끝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위어진 햇살 때문인지, 써늘한 느낌이 든다.




이런 도입부가 영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단지 나의 감상을 하나 더 보태는 것뿐인데. 그래, "감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영화는 감상주의자이면서 애국자이지만, 이런 모든 성향을 철저히 감추고 "냉소주의자"로 살아가는 멋있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독일이 승승장구하던 시절, 1942년 2차대전중에 만들어졌다.  독일이 프랑스까지 점령하고, 유럽인들은 제 나라를 떠나 자유가 보장된 미국을 가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모여든다. 그곳에서 비자를 받아 리스본으로 가서, 리스본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초입부에서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카사블랑카에서 비자를 받지 못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으며, 그로인한 비지니스도 성행하고 있었다. 




한 여자와 두 남자, 이들의 운명을 쫓아가보자.


주인공 릭(리차드)은 예전에 봤던 사브리나에서도 남자주인공을 했던 험프리 보가트였다. 작은 키에 울퉁불퉁 하게 생긴 그가 그 당시에 최고 인기 남자배우였나 보다. 그가 경영하는 "릭의 카페"는 이 영화의 주요무대가 된다. 카사블랑카의 치안을 맡고있는 르노 대위, 카페안에서 노래와 피아노를 치는 샘, 비자를 기다리는 유럽인들, 그런 이들을 상대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장사치들, 이런 왁자지껄하지만, 전쟁의 긴장감을 감춘 무대가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바로 우리의 일제시대다. 자유를 빼앗기고, 포화소리, 군대, 경찰 그런 것들로 점철됐던 불행했던 역사 말이다. 혹 독립운동가이거나, 핍박받는 국민이거나, 반역자이거나, 장사치 등으로 나뉘어서 활동했었던 그 당시를 떠올릴 수 있다.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릭의 과거와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전쟁영웅인 빅터 라즐로의 부인 일자(잉그리드 버그만)가 릭의 카페에 등장하면서. 그와 일자는 3년전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였다.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당하기 전날, 릭과 일자는 프랑스를 떠나기로 한다. 비가 억수로 오는날, 기차역에 일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의 편지를 받게 된다. 사랑하였지만, 함께 떠날 수는 없다고. 그후로 릭은 실연의 아픔으로 그만큼 냉소주의자가 되어 카사블랑카에서 도박장까지 있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릭의 인간성이 이곳에선 중요하다.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와의 대화, "어젯밤 뭐했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안나." "오늘밤에는 볼 수 있나요?" "먼 미래는 계획하지 않아." 열병에 들뜬 여자와 저음으로 가라앉은 릭의 대사를 옮기자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된다. 험프리 보가트의 연기가 들어가면 그 대사가 살아난다. 그의 사랑에 닫힌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최고 연기자인 까닭이리라. 그는 돈이 있다고 아무에게나 도박장 문을 열어주는 것도 아니고, 돈있는 손님에게 굽신대지도 않는다. 프랑스인과 싸우던 독일군인에게 카페에서 꺼지라고 소리지른다. 돈이 없어 비자를 구하지 못하는 진실한 신혼부부에게 도박장에서 이기게 해서, 자금을 만들어준다거나 하는 속이 깊은 감상주의자 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조금 꼬인 듯한 이 상황을 정리해보자. 


일자... 남편을 떠나보내달라고 릭에게 간청한다. 자신은 릭을 사랑했고, 다시 떠날 수 없다고. 남편은 이곳에 있으면 죽으니, 그 사람만 보내주면 된다고..

빅터.. 이 카페에 처음 들어오고 나서, 아내와 당신의 관계를 눈치챘다. 내 아내를 책임져달라. 당신과 아내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릭.. 그 둘을 무사히 떠나보내기 위해 르노 대위를 이용하여 작전을 세운다.


일자는 남편만 떠나보낸다는 생각으로, 빅터는 아내와 릭을 떠나보낼려고, 릭은 그들 부부를 떠나보낼 생각으로 공항에 모인다. 이 정도면 셋의 인간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게다. 나를 죽이고자 하지 않으면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없다. 그중에서도 릭의 마음이 가장 컸다. 릭은 둘을 설득하여 비행기속으로 밀어넣는다. 일자에게는 "네 남편의 힘은 네게서 나온다"며, 그의 남편에게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며.. 


그리고 독일장교를 총으로 쏘고, 그 일에 협조해준 경찰 르노대위와 안개낀 공항으로 걸어들어간다. 이곳을 떠나야(도망쳐야) 할 것이라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루이(르노대위),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야.."라면서.


이 영화는 세마리 토끼를 단숨에 잡았다. 조국(민주주의)과 우정과 사랑을.


릭의 카페에서 독일병사들이 제나라 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조금 있다가 빅터의 지휘아래 프랑스 국가를 한쪽에서 부르기 시작한다. 점령국가와 저항국가의 미묘한 파장이 둘의 애국가를 타고 동시에 울려퍼지다가, 프랑스 애국가 소리에 눌려 독일국가가 잦아들게 된다.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장면이다. 딱히 한 국가라기 보다는 독일에 당한 연합국가들의 민주주의 함성이 함께 울려퍼질때, 이건 전쟁영화야 했다. 


프랑스령이면서 독일군들의 손이 덜 미치는 카사블랑카의 치안대장인 르노대위와는 미묘한 우정을 나눈다. 르노대위도 드러내놓고 사람들을 보호할수는 없지만, 이모저모로 릭과 협력하여 사람들의 비자발급을 주선해준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운동 조직의 우두머리인 빅터를 탈출시켜준 것이다. 이는 르노대위와 릭의 우정에서 생긴 일이다. 굳이 속을 드러내지 않아도 서로를 믿었던 그런 우정.


또한 일자의 남편이자 연적인 빅터와도 대화를 통해 그들 사이에 어떤 우정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본다. 민주주의 운동을 왜 하냐는 릭의 질문에 그는 "왜 숨쉬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대답한다. 그는 멋으로, 영웅심으로 일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당신도 투쟁의 길에 들어오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해준다. 정치적으로 중립임을 주장했던 릭도, 여러가지 면에서 애국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 아름다운 여인, 일자와의 사랑에서 릭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헤어짐을 당했다. 일자는 결혼했었지만 남들의 안전을 위해(왜냐하면 남편이 운동가이므로) 결혼한 사실을 발설하지 아니해야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수용소에서 도망치다 총살당했단 소식을 듣고, 그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았다. 그렇게 외롭던 차에 이상적인 남자 릭을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그와 떠나기로 한 날, 남편이 살아돌아왔던 것이다. 전쟁 시절에 있을법한 스토리들이다. 어쨋든 이제는 남편과 도피하는 형편인데, 옛 애인을 만나고, 그가 가진 통행증을 얻으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 그의 실망한 마음을 보듬어 줄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에게 총을 겨눈다. 협박해서 통행증을 얻고자 했던 것, 그러나 릭은 "그건 내게 주는 선물이니, 나를 쏘라"고 한다. 일자는 포기하고,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릭에게 말하고, 자신은 당신만을 사랑한다며, 이곳에서 함께 남겠다고 한다. 나머지는 위에서 말한 것들이다. 


사랑,,,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떠나보내야 한다는 말을 절대로 믿지 아니했다. 지금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주인공들은 그렇게 했다. 그것도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일자에게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너무 잔인한 질문일 것 같다. 그럴 수 있는 게 사랑이다. 나를 죽이기까지 해야하는. 그런 것들은 내가 받아들이고 않고의 문제를 떠나, 사랑의 고고함으로 남아있다. 사랑이 언제나 최고의 문학소재와 인간삶의 우선 가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기낳고... 이런 평범한 스토리는 이런 글을 쓰는 내게나 적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