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엔 나와 미리가 먼저 도착했다. 지인의 추천과 광고만으로 찾아온 가오리라는 일식당이었고, 한인이 주인이며, 한국음식도 제공되고 있었다. 식당은 꽤 공을 들여 지은 것 같았고, 넓은 주차장, 실내공간등 마음에 들었다. 비좁은 다운타운과는 또 비교되는 리치몬드힐의 넉넉함이 식당 주변 풍경을 형성하고 있다. 미리가 이튼 센터 다음으로 가고 싶었던 곳이 대형서점이었는데, 식당 옆에 서점이 위치해 있어서 식사후 들리면 되겠다 싶다.
4명이 앉을 조용한 곳을 주세요, 했더니 칸막이가 되어진 4인 식탁으로 안내한다. 조금 있다가, 이 좌석은 예약되었다며 다시 자리를 안내해서 보니 4인 식탁 2개가 놓여진 8인이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려니 하고 앉았는데, 조금 있다 현주가 들어왔는데 두 아들과 나타났다. 큰애도 PD데이라 쉬어서 함께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일행이 모두 5명.. 종업원은 자리를 옮겨주겠단다. 그래서 물컵을 들고 세번째 간 곳이 6명이 앉는 곳.
상황은 조금씩 변화되고 그 상황에 맞게 짜맞추어지는데, 여기서 인간들의 감정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식당 입장, 손님 입장 그런 것들이 크게 어긋나지 않아야 양측의 만족도가 형성되는 것이고..
그건 그렇고, 정말 깜짝 놀랐다. 현주의 두 아들 성장한 것이 너무 "현란"해서 현기증이 났다. 어린애였던 두 아이가 청년이 되었고, 그 든든하며, 핸섬한 모습에 시골아줌마의 찬탄이 이어졌다. 세월이란 것이 어른에게는 주름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환골탈퇴로 나타남을 본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혼자 머리카락을 쇼트로 잘라(미장원에 안가겠단다) 머리스타일이 뒤숭숭하며, 다이어트가 막 필요한 퉁퉁한 미리는 외모면에서 좀 빠진다.
미리와 두 오래된 친구의 만남에는 큰 불상사가 없었다. 그들은 금방 옛 기억을 회복했고, 이사 가기전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의 안부를 미리가 전해준다. 그러면서 2세들이 공유하는 그런 에피소드들, 말하자면 스테레오 타입의 부모 흉내내기, 한인 어른들의 말투에 이상한 격음이 섞이는 것들을 말하며 즐거워한다. 부모의 친구를 만나면 "너 키가 많이 크다" "잘 생겼다" "너무 잘한다" 등등의 말을 듣는데, 사실 저이들 세상에서는 "그리 큰편도" "잘생긴 편도" "잘하는 편도" 아니라는 말들을 나누는 것을 어깨너머로 듣는다.
한인 부모들은 칭찬도 과하게 하고, 흉도 과하게 보고, 외모 이야기도 다반사로 하니, 사적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는 이곳 문화와 틀린 것을 나도 들어 알고 있다. 말하자면, 내가 현이와 엽이를 만나 찬탄을 과하게 했던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한인부모들의 천편일률적인 표현으로 들려졌을 게다. 우리 아이들도 어른들이 외모와 태도를 훔쳐보듯이 주시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칭찬보다는 흉잡힐 일이 많아서일까?
현주와 이야기를 나누니, 아이들이 아직 한인교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했다. 나 역시도 아이들이 교회에 가면 "개밥에 도토리" 신세라고 말하니, 같은 처지라고 말해서 서로 웃었다. 한인가족들 중에서는 이민 역사가 짧던지, 집안에 한국풍습이 강하든지 아이들의 성향이 조금씩 다르게 결정되는 것 같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식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우리집 아이들처럼 케네디언의 냄새가 강한 아이들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조금 더 천착해 들어가자면, "내 멋대로의 가정"을 꾸려온 내게 가장 큰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결혼생활을 캐나다에서만 해서, 한국식 전통이 많이 부족하다.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형식"을 최대한 무시하고 살아온 내가 이제서 아이들이 "한국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리라.
스시, 마끼롤 한판과 매운탕, 치킨 테리야끼를 시켜서 아이들과 함께 나눴다. 현주가 미리에게 오늘 저녁 친구들과 영화구경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미리는 처음엔 그러자고 하더니, 다시 생각하더니 집에 가야 한단다. 대신 세아이가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근처에 서점이 있으니 그곳에 다녀오면 좋을 것이다.
드디어 현주와 둘이 남았다.
나는 그녀에게 시골살이의 재미없음을 들려주고, 현주는 토론토살이의 복잡함을 이야기한다.
토론토는 한국에서 있을법한 것들이 모두 모여있다고. 심지어는 매춘까지 성행하고 있다고 해서 나를 놀래킨다. 그녀는 역사문제와 여성문제에 관한 전문기관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영어와 한국어가 완벽히 되는 드문 재원이라서 그녀의 활약을 나도 신문에서 보곤 한다. 신문에 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녀를 통해 많이 듣게 됐다.
그녀는 사회 제도를 역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땐 회의가 오기도 한다고. 밑바닥 인생들을 많이 보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도 하고, 그런 일들을 조장한 사람들의 악함에 치를 떨게 되기도 한단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한인사회에 얼굴이 알려짐으로해서 얻어지는 명성앞에서 겸손을 잃지 않고 자신을 추스리는 게 필요하단다. 이런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와졌다는 것을 느낀다고도 말한다.
처음에 몇번씩 자리를 옮기라고 했던 식당측은 우리들의 시간을 방해없이 배려했다. 아이들이 다시 돌아올때까지 긴 시간 밀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공교롭게도 현주가 살던 마을에 그녀가 떠난뒤 2년뒤에 입성했다. 마을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살던 현주와는 다르게 나는 그저 내집안에서 산다. 노인처럼 우체국과 은행과 가끔 편의점에 들르면서. "그림자처럼 산다"고 말했더니 현주는 내게 "왜 그러구 살우?"하면서 한방 찌른다.
아이들이 찬바람을 묻혀서 다시 식당에 들어왔다. 현주의 큰애와 미리는 책을 몇권씩 골랐단다. 아이들이 한인부모 놀리는 것중에 "음식값을 먼저 내려고 싸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도 갈 시간이 되자 어떻게 하는 것이 싸움없이 해결하는 법인가 골몰하다가 화장실간다고 하면서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카운터에 가서 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서. 그랬더니 밖에 앉아있던 현이가 쫓아나와, "아줌마, 엄마가 낸데요.."하고 말린다. ㅎㅎ 현주도 나중에 따라나왔지만, 이번 싸움에선 내가 이겼다. 시골아줌마가 셀때도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실컷 회포를 풀었더니 미련이 남지 않는다.
엄마집으로 와서, 엄마와 언니도 잘알고 있는 현주와의 만남에 대해 브리핑을 한다.
엄마는 그새 떡을 쪄놓으셨다. 그 떡은 사위의 요긴한 간식거리가 될 것이다. 국물김치와 차이니스 브로콜리로 담은 새파란 김치도 싸주셨다. 이번 방문을 알리는 전화를 할때 "엄마, 내가 토론토에 있는 동안 하시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씀하세요"라고 여우같이 말했지만, 나는 막내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느라 엄마와 나눌 시간이 없었다. "엄마는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하셨지만 미안하다. 대신 언니는 이틀간 엄마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내가 들락날락하는 동안에 엄마의 말벗이 되어준 언니게게 고마운 마음이다.
토론토 여행은 여기에서 끝났는가? 아니다.
언니, 미리 그리고 나 우리 셋 모두가 관심있는 곳 한곳에 가서 피날레를 장식해야 한다. 엄마집에서 나온 것이 4시쯤, 한국식품에 들러 장을 보고 뉴마켓으로 향한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모처"이다. 샐베이센(salvation thrift store), 굿윌(good will), 밸류 빌리지(value village)가 그것이다. 샐베이션은 구세군을 운영하는 재단에서 차린 "중고품" 가게이다. 이 가게에서 모인 돈으로 구제활동등에 쓰게 된다. 가게 이름도 "샐베이션 절약가게"로 그 이름에서 가게의 속성을 짐작할 수 있다. 굿윌에는 "호의"의 뜻이 있고, 또한 "will"에는 유언이란 뜻이 있는데, good will을 의역하면, 좋은 유산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싶다. 사실상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남는 물건들을 기부하는 곳이기도 하다. 밸류 빌리지는 그야말로 가치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살수 있다는 말이렸다.
나보다 언니가 더 전문가이긴 하나, 우리들은 이 가게를 좋아한다. 손때묻은 것들 중에서 물건을 골라내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특히 뉴마켓에는 근방에 큰 스토아 세개가 포진해 있어서 시간을 내면 좋은 물건을 건질수 있다. "건진다"는 것은 중고가게를 애용하는 사람들이나 아는 "은어"이다. 이런 가게들을 좋아하는 우리들끼리 "건진 물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많이 나눈다.
결국 마감시간인 9시 확성기 방송을 들을때까지 머물렀던 이곳에서 나도 많이 건졌다. 편한 신발, 스웨터, 바지, 이불껍데기... 미리도 최근 들어서 쇼핑을 좋아하더니, 한정된 예산안에서 즐겁게 쇼핑할 수 있는 곳인 중고품 가게에서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언니는 이번에 무엇을 "건졌는지.."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신발이 20달러인줄 알고 집었는데, 나중에 카운터에서 보니, 7달러를 내라고 해서, 횡재했다며 좋아한다.
안목이 높은 언니는 사는 물건마다 얼마나 수려한지, 언니의 집은 "기묘한 물건"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은근하고 매력적이다. 일반 가게에서는 볼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들이어서 눈길을 끈다. 중고품 가게에는 "20달러면 당신의 모든 치장을 완벽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광고를 붙여놨다. 나는 가끔 범죄자가 이 가게에 들어와 변장을 하고 나가는 상상을 한다. 그야말로, 속옷부터 외투까지 모자부터 신발까지, 혹 우산이 필요한 날이라면 우산을 악세라리로 옆구라에 낄수 있는 중고품 가게의 미덕을 어찌 짧은 글로 다 쓰겠는가?
자취생활하게 되면 학생들이 한살림 마련할때 중고가게를 이용하는 게 지혜이다. 가구든 옷이든, 그릇이든, 장식품이든 집에 가져와서 잘 삶고, 빨고, 닦으면 손때까지 묻어 반질반질한 새 물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겨울캠핑을 준비하고 있는데, 2인용 침낭이 있어서 집어왔다. 상상하기에 좀 야하지만, 2인용 침낭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들고와서 빨아서 작은 가방에 넣었더니, 아주 유용한 캠핑도구가 될 것같다. 얼마전에는 안입는 옷들, 큰 가베지백에 6봉지를 모아 구세군에 갔다줬다. 내가 입지 않는 것, 쓰지 않는 것을 보내고, 내게 필요한 것을 싼값으로 가져오는 중고가게 사랑은 당분간 계속될 것같다.
미리는 이번 여행이 좋았단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좋았고, 야밤에 도시를 배회한 것과, 중고가게 나들이까지.. 나의 속셈은 그것이다. "엄마를 믿어서 나쁠 것 없다. 네 생각만 하지 말고, 엄마의 제안에 귀를 기울여라.."는 것. 이 목적에 맞는 알맞은 여행이 된 것 같다.
세인 마이클스 병원.. 미리가 태어난 곳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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