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시작전, 기말고사를 마친 막내에게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짧은 방학이 주어졌다.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그애에게 대학순례를 해보는 것도 유효하리라 생각했다. 제 언니가 있는 토론토가 유력한 후보지이니, 그곳에 있는 몇 대학을 돌아다니면, 약간의 힌트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된 여행계획이었다. 막내는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스케줄이 크게 흥미있지는 않았지만, 대학입학을 앞둔 딸에게 해줘야만 하는 "엄마의 책임감"도 한몫을 했다. 이제 대학보내는 일이, "지상의 큰 문제"였던 때에선 벗어났다. 위로 두 언니가 경험한 일이라, 시간이 흐르면, 약간의 혼돈은 있겠지만, 미리도 제 길을 헤쳐나갈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라고 끝내려니 무언가 발목을 잡는다. 그래, 미리의 비상식적인 출산이 생각난다.
자식을 많이 둔 엄마를 닮았는지, 아이들의 임신과 출산이 무척 순조로왔다. 드라마에서 새각시가 구토하는 증세로 "임신"임을 알리곤 했는데, 입덧이 없었던 내 경험으로는 그건 임신을 겪어보지 않은 남자 작가의 무지함으로 비치곤 했다. 그래서 셋째가 뱃속에 들어섰을때 정기검진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중에 "아이 낳는 일"도 포함된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랬는데, 세째는 정말 제 엄마의 예상을 깬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임신 기간이 40주라면, 임신 32주째 미숙아로 태어났다. 아이 출산을 위해 직장에 휴직계를 낸지 이틀후였다. 그날의 기억은 차가운 철판 침대였다. 아이를 빼내기 위해 산모를 철판위에 뉘여놓고 의사들은 산모에게 전신마취를 했다. 나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면서 그애를 세상에 내놓았다. 출생아의 계속적인 피흘림으로 앞날이 불투명하기까지 했었다. 캐나다 의료의 혜택으로 인큐베이터에서 1달간을 살고, 겨우 가족품으로 돌아온 아주 작았던 그애를 반추해볼때 언니들이 대학에 들어갔다고 세째가 "저절로" 그렇게 될것이라고 믿다간 큰코 다치는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대학탐방에 대한 내 제안에 미리가 흔쾌히 응한다. 처음 생각은 그랬지만 "내가 제안했다"는 것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대학탐방이 내키지 않는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스스로가 궁금해할때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스케줄을 조정한다. 오랜만에 토론토에 가서 하고싶은 일이 있는가, 물어보았다. 미리는 다운타운에 있는 이튼센터(Eaton center)를 가보고 싶단다. 그쯤 못해줄 것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여행계획 와중에는 내 코에 바람을 불어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 표시나지 않게, 은근히 내 스케줄을 그안에 첨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중에 하나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똑똑한 후배, 현주를 만날 마음을 품는다. 현주는 그레이 부루스에 살던, 우리보다 더 일찍 이곳에 정착해서 살아서 이땅에 낯설었던 우리들에게 길잡이가 되준, 고마운 친구다. 그녀와 가족은 2005년에 다시 토론토로 이주했고, 나는 아주 가끔 그녀와 연락하곤 했다. 그녀의 아이들과 우리집 아이들은 한인이 없는 이곳에서 어린시절 친구로 지냈다.
현주와 연락이 되었는데, 막내가 간다하니, 막내의 친구였던 현이를 데리고 나온다 한다. 이 상큼한 뉴스를 미리에게 전하자마자, 이애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너무 오랜만이라 만나기가 쑥스럽다는 것이다. 하기야 10살 이전에 보았던 친구를 이제 다시 본다고 하고, 그것도 두 엄마가 있는 자리라는 것이 좀 그럴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떠나기로 한 전날, 미리가 "토론토에 가고싶지 않다"며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처음 계획은 목요일날 가서, 토요일날 오는 것이었는데(내가 하고싶은 것들을 채워넣으려고), 그 긴 시간 토론토에 머문다는 것도 그렇고, 마음이 변했단다.
그래서 "다른때 토론토 나들이와는 다르다. 이번 여행은 60% 이상은 너에게 초점을 맞췄다. 무엇이 문제냐" 했더니, 한참을 있다가 "알았다"고 대답하긴 했다. 내 스케줄을 가능한한 끼어넣을려고 했던 마음을 급수정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미리를 위한, 미리가 원하는 스케줄만으로 짜여졌다. 아 고달픈 엄마여.
다음날, 오웬사운드 언니와 교회 권사님께서 동행자로 오셨다. 언니는 엄마와 시간을 보낼 예정이고, 권사님도 따님의 생일에 맞춰 토론토에 오실 일이 있으셨던 거다. 엄마집에 여장을 풀고 차를 두고 다운타운에 가기로 한다. 정말 오랜만에 타는 대중교통이라, 가격이 얼마인지, 토큰이 없는데, 어찌하나 걱정이 되었다.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현금으로 내도 되냐고 했더니, 6불을 내란다. 그렇게 버스에 올랐고, 서브웨이로 갈아타고 다운타운에 내려갔다. 도시 사람들은 참 다양하다. 세련된 옷차림도 눈에 띈다. 아주 예쁜 아가씨에게 시선이 꽂힌다. 나도 못말리는데, 남자들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던다스에 내리니, 이튼센터가 지하철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조차 신기하다. 미리는 옷집에 가서도 싼물건만 찾아다닌다. "짠순이 엄마" 밑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것인지, 조금 안스럽다. 50% 세일하는 가벼운 운동화와 제가 좋아하는 "각진 옷, 약간의 망사를 위에 두른 청쟈켓"을 골랐다. 인터넷에서 봤던 옷이란다. 이튼센터에서도, 영길에서도 미리는 "참으로 이상하고 괴기스러운 가게"에 관심을 보였다. 만화 캐릭터, 많은 몬스터들(도깨비들)들이 그려져 있는 검은색 옷들. 내가 알아챌 수 있는 건, 롹 스타들이 자주 입는 쟈켓, 티셔츠, 벨트 그런 것들을 파는 가게이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미리의 취미다. 나긋나긋하고, 알록달록한 빛깔의 귀여운 여성적인 이미지하고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이 아이는 어떻게 제 세계를 형성했는지, 가끔 당황스럽다. 물론 그런 물건들을 좋아한다고, 그애의 모든 것을 그곳에 꿰어맞추어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평범"에서 안도하는 엄마를 배반할때가 너무 많다.
그애가 어렸을때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준 적이 있다. 둘째가 너는 "주워온 애"라고 해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었다는 거다. 난 웃고 말았지만,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갈등했을지... 그리고 만화를 같이 시청하게 되면, 두 언니가 일방적으로 좋은 캐릭터를 선택하고, 나머지 안좋은 것은 자신의 차지가 됐었던 것과, 언니들이 분홍, 빨강을 선택해서 자신의 이미지 색으로 파랑 선택을 강요받을 수 없었던 일도 이야기하곤 했다.
그애들 셋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엄마인 나는 늦게 조금씩 얻어듣기만 했는데, 그런 만화같은 일들이 아이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다. 미리는 엄마가 언니들에게 빠져있는 동안, 언니들이 언제나 자신을 놀림감으로 대우해주는 동안 스스로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싶다. 엄마와 언니보다도 뉴욕친구와 스카이프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 저를 "존중"해주는 언니같은 친구에게 홀딱 빠져있는 이유이다.
미리를 조금 세심히 들여다보면, 소수자에게 관심이 있다. 이혼을 앞둔 부모밑에서 불안해하던 친구의 전격적인 후원자가 되어주던 것을 지켜보았다. 동성애자들, 흑인들... 그런 것들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오늘 저녁 식사중 동성애자에 대한 내 의견을 묻는다. 동성애자가 나왔던 한국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해서도 알고있다. 나의 대답은 역시 뜨뜻미지근할 수밖에. 그애는 동물들중에서도 "동성애"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한다. "그들이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렇게 되어졌을 것"이라는 내 의견에 대한 약간의 반론인 셈이다. 미리는 "그렇게 타고난 것"에다 주안점을 둔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그런 성향을 지킬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살아가기에 어려울 것이기에, 그들의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한국인들의 토픽에 그리 많이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미리는 "아주 가까이에, 그리고 꽤 많은 수가 그런 형편"에 처했음을 주지시킨다.
그날, 둘째가 다운타운으로 오기로 했다. 나는 두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 장소가 없었으면, 이 아이들이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을, 남편과 내가 장래를 위해 심각한 대화를 했던 추억의 데이트 장소를 말이다.
그곳은 파노라마 레스토랑. 블루어 55번 웨스트에 위치한 메뉴라이프 빌딩 51층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다. 그곳에 가면, 토론토 시내 전경을 바라볼수 있다. 레스토랑으로 안내하는 51층에서만 멈추는 엘리베이터앞에 이르자, 19살 이상만 허용된다고 나와있다. 그런 문구에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라, 그옆에 큰 사진기를 든 청년이 "괜찮을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아쉬었던 것은 창가에 빈 자리가 없었다는 것. 겨울이라 발코니에 내놓던 의자들도 없었고, 창가에 앉지 않으면 그 식당의 묘미는 절대로 맛볼수 없는데. 나는 계속 안절부절 창가 자리를 탐내고, 아이들은 괜찮다고, 편안하게 앉아있으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파노라마 식당 웹사이트에서 퍼온 사진.. 그 식당에서 볼수 있는 토론토 시내 야경)
어쨋든 메뉴를 보니, 비싼 디너들이 있었고, 중간쯤 10달러짜리 음식도 있다. 나는 두부 조린 것과 야채, 미리는 피자, 루미는 스프링롤을 주문했다. 메뉴판 위에 "양이 많지 않다"고 쓰여있긴 했는데, 나중에 나온 음식을 보고 우리 모두 까무라칠뻔 했다. 정말, 마음에 점을 찍을 정도의 작은 양의 음식. 칵테일 한잔과 어울리는 안주 몇점이라고 해야할까. 배고픈 두 아이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은 절대로 아니었다.
음식을 먹고, 발코니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제서야, "와우" 하는 아이들의 탄성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몇장을 찍고, 추억의 데이트 장소에서는 그렇게 미련만 남기고 퇴장할수밖에 없었다. 영으로 다시 걸어내려가, 타이 레스토랑에 들렀다. 안락한 그곳에서 쌀국수가 들어간 음식, 볶음밥 등으로 간신히 허기를 때웠다. 파노라마 식당은 "가족 레스토랑"이 아니라 "분위기"를 먹고사는 돈 아까운줄 모르는 "짝"들에게나 유용했던 자리임을 실감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발렌타인 데이에 2인 기준 풀코스 정식이 200달러란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런 음식을 먹게 되면, 돈에 취하고 사람에 취해서, 모든 것이 황홀해보일 것이 틀림없다.
발코니에서 찍은 사진.. 이렇게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야, 다음을 약속한다. 결혼 30주년쯤??
대학생 딸은 그전날 "데모"를 하셨단다.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토론토대학, 요크대학, 라이어슨 대학 학생들이 모여서 "학비 인하" 데모를 했는데 재미있었다고. 루미는 이제는 유연하게 토론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막내를 끌고 휘번덕거리는 촌스런 엄마가 마냥 우스운지 깔깔거린다. 전철은 새로 들어온 것인지, 깔끔한 디자인이다. 주차장에서 볼수 있는 있는 것과 같은 휠체어 전용구간도 따로 있다. 필요하면 앉을 수 있는 접이용 의자가 휠체어 전용공간에 설계되어 있다. 두 아이 다 토론토가 너무 좋다 한다. 아이들 때문인지, 늙음의 증거인지 나도 자꾸만 대도시 토론토를 흘끔거린다. 다만 다운타운에 갈때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토론토를 사랑할 수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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