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을 떠나요

1박2일... 심코 호숫가

하이퍼 택스트란다. 인터넷 용어가 하이퍼 택스트 문학이라는 장르를 발생시켰다. 링크를 따라 이리저리 훌쩍 뛰어다니는 것, 본류를 잃어버리기도 십상이다. 4살짜리가 장난감을 갖고 놀다, 다른 흥미로운 것을 보면, 예전의 장난감은 잃어버리고, 새것에 취해 노는 것과 같다. 생각을 따라서 정보를 수집해간다. 그 흐름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디에서 긴 시간 머물게 될지, 그안에 빠져있는 사람조차 모른다.


인터넷에 친숙한 사람들이라면, 이미 우리는 이런 경험들이 있다. 강의를 들으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에 자신을 띄워보는 것도 하이퍼 택스트의 한 유형이라고 강사는 말했던가? 인간들의 자의식은 순서도 없고, 무작위적으로 나타나니, 하이퍼택스트 문학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변화하는 문학에 대한 심도깊은 강의였다. 그러나 속으로 깊이 들어갈 마음은 없다. 문학 자체도 버거운데, 변화하는 문학이라니, 문학은 갈수록 내게서 멀어져간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문학이었다. 문학하는 이들을 곁에서 보는 "꼽사리" 여행이었다. 캐나다 한인 문인협회가 마련한 "호반문학제"에 참가했다. 나는 내 글을 문학적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문학의 도구는 글자여서, 글자를 조합해 글을 작성하는 사람들은 문학과 꽤 연관있는 사람처럼 여겨지게 마련이다. 나도 그런 시선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남들의 작품(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하고, 가끔은 문학적 표현들을 차용하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치지 않고 뭔가를 글자로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나도 그럴때가 있었다. 내 어줍잖은 글도 "수필"이라는 장르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혹 눈먼 심사위원이 내글에 방점을 찍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문학인이란 옷을 입혀주지 않을까 말이다. 그런 기대를 품고, 한두번 투고한 적은 있다. 물론 당선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글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욕구는 내게 있되, 그것이 문학은 아니라는 것에 확실하게 내 자리를 매김할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문학보다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문인협회 회장인 이상묵씨의 전화를 받는 순간, 꽤 고민이 되었다. 문학인들의 잔치에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었고, 앞으로 그 문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그런 바램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문협의 인터넷 카페에 내 지나간 글들을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문협 회원들과 인터넷 안면을 조금 튼 상태였기도 하다. 이상묵씨의 권고는 애써 차린 만찬을 즐겨주길 바라는 음성이었다. 그분의 부탁을 거절할만큼 내가 빳빳하지는 못하다. 1박2일 심코 호숫가로 차를 몰았다.


며칠전에, 바삭거리는 물기없는 나뭇잎들을 보고, 삭막하다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이번 여행길에 잎에 색이 든 나무들을 보자, "생명"에서 "색"으로 나뭇잎의 가치가 변화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나뭇잎의 신선함에서 잎의 색깔에 초점이 옮겨졌다. 생명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그 가치가 변했다고 해야 하나? 누구도 더이상 단풍을 보고, 촉촉한 생명력을 기대하지 않고, 색의 곱고, 빛의 찬란함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을의 위대함은 가치의 전도에서 시작되는 지 모르겠다.


약간 늦은 시간 도착했고, 심포지엄은 시작되고 있었다. 김준태씨의 "변화속의 문학"이 그 주 강의였고, 변화속의 언론(기원탁), 변화속의 현대인(홍순관)등이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변화속의 언론은 강의를 듣지 못했지만, 홍순관씨의 강의속에서는  "소유의 노예"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말등이 기억난다. 현태리 교수는 초기 번역문학에 대해, 유창한 한국말로 발표해서 놀라게 했다.


글자를 소리내어 읊으면, 뭔가 다른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번 모임에서 알았다. 시 암송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목소리에 감정을 넣어서 시를 읽으니, 그때서야 조금 시를 느낄수 있었다. 문학이 내게서 멀다고 했지만, 시는 문학중에서 가장 먼곳에 있는 장르였다. 감정에 겨워, 흥에 겨워, 시 암송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잠깐, 가라오케를 떠올리기도 했다. 가라오케가 자신의 감정에 빠져, 지루해질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암송에서는 출연자들의 진정성이 느껴져서 가라오케와는 물론 격이 다른, 문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잭슨스 포인트 컨퍼런스 센터(Jacksons Point Conference Centre) 셀베이션 아미 재단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숙소, 식당, 라운지, 강당, 운동장 등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서민적인 곳이었다. 심코 호숫가에 붙어 수영, 보트타기 등도 할수 있어 가족들의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겠다. 숙소는 호텔식과 카테지식이 있어, 음식을 직접 만들어먹을 수도 있게 되어있다. 난, 좋은 숙박시설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다. 


장작이 높이 쌓여지고, 이미 불이 붙은 그곳으로 인도되었다(진행자들에게 감사한다). 바로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수십년전에 경험했던 "MT"를 떠올린 것은. 술이 금지된 기독교 계통의 컴퍼런스 센터였기에, 무공해라고 혼자 생각하고 좋아했었다. 그런데, 옆자리의 소설가가 내게 "맛이 다른 물"을 권했다. 나는 그가 권한 물을 들이켰는데, 그건 다름아닌 "쐬주"였다. 술이 금지된 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고, 안주를 찾아, 술을 찾아, 친구를 찾아 밤새 헤매던 사람들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만, 어떤 상황에 가면 입력된 젊은날의 그날을 "재현"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홍순관 전 목사는 패류전문가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특별하다. 23년전 주례를 맡아주셨다. 그때는 목사였지만, 본인의 말로는 "목사"직은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목사로 기억한다. 목사직을 놓고 한국으로 미국으로 자유롭게 유영하셨으며, 대안학교 교장직을 오랫동안 맡아하셨다고도 한다. 그의 패류 수집은 유명하다. 패류들의 삶을 인간들의 삶과 접목시켜 들려주셨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신문사에 있을때 적었던 기억이 새롭다. 


 

 


20여년이 흘렀다. 그분은 그분의 인생을 살아오셨고, 나는 그려지지 않았던 나의 인생을 살아왔다. 20여년이 지나, 호숫가로 밀려나온 패류처럼 같이 만났다. 그분은 현재 미국 애틀란타에 사시고, 다음 방문때는 우리집에도 들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우리들이 살고있는 보금자리가 너무 융숭하다고 흉보실 것 같다. 내가 큰집에 살면 다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시면서..


심코 호숫가로 배를 타러 갔다. 이상묵 회장이 동생부부에게 부탁해서 참가자들을 위해서 호수를 가로지르는 보트 여행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려는 것 같았다. 강의듣고, 이야기하고, 느낀 것을 호수를 보며, 자신의 글로 엮어보라는 그런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트 여행은 "소유가 얼마나 불편한지"를 확인시켜며 끝났다. 동생부부는 이번 행차를 위해 배 수리를 2천달러를 들여서 해왔다는데, 그 배를 선착장에서 물속으로 밀어넣는데, 깨알같은 시간들이 흘러갔으며, 보트가 물속에 들어가자, 엔진이 꺼지는 등, 탄 사람들은 채 5분이 못되어 돌아와야 했다. "보트"를 산 사람은 이틀 행복한데, 그게 산날과 판날이라는 말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보트를 물속에 부릴때 프로펠러가 쭈글어들었다고도 하고, 마침내, 보트와 나머지 사람들은 호숫가에 남겨놓고, 내차로 왔던 8인의 여인들은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헤어졌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나는 교회도 가지 않고, 중간에 빠질수 있는데도 모든 과정을 완전히 마치고 혼자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해와 비와 바람들이 오락가락해서, 하늘은 최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구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그렇지 않았다면, 연 이틀 잠을 설치고 돌아오는 길에 졸음귀신이 왔을 수도 있었다.


아, 그리고 한분을 만났다. 내 글을 읽고있는, 팬이라는 그분을. 그래서 내 기분을 으쓱하게 해주던 그분을.


다시 하이퍼 택스트로 돌아오자. 이번 여행이 그랬다. 강의를 들으면서도, 나는 수많은 생각들에 시달렸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과거와 현재가 또 오락가락했다. 젊어서 신문사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대하는 것도 참으로 기분이 묘했는데, 사람들은 첫 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로, 사연많은 문학인이었던 그는 아직까지도 연민을 자아내는 삶을 살고있음도 또 알게 됐다.


문학에 최근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순수"해 보였다. 호기심과 열성과 배움으로 가득찬 그들에게서, 현실의 숙제를 끝마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그 마음들이 읽혀졌다. 또 문학인들 사이에 있는 알력들도 조금은 보게 되었는데, 그건 인간 사이에서 언제나 들쑥들쑥 일어날 수 있는 작은 기포같은 것이라고 축소생각하고 싶다. 저마다의 방식이 만나서 생기는 불협화음이랄까?


우리는 다같이 "박수"를 많이 쳤다. 단체에서 전체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유일하면서 신나는 방법, "박수"... 문학제를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이 박수의 의미를 알 것이다. 참 특별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