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족들이 집단적 삶을 추구할 때 삶의 질이 훨씬 향상됩니다. 일예로 유대인들은 이민 역사 초기에 이세들의 일터로 캐나다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이고, 집단적 힘이 표면화된 경우입니다. 이런 집단적 힘을 가지려면, 사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리 한인들도 이런 집단적 운동을 해야 합니다. " 나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이벤트와 집단적 무브먼트"를 통해 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민족이 힘이 있습니다.
이번 OKBOSS 프로젝트에 인터뷰어로 합류하면서 갖게 된 초입의 감동이라면,
노삼열 교수를 가까이서 대하게 된 점이라 말할 수 있겠다. 12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작업이 왜 필요한지 강의를 듣는 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민지에서 살아내야 할지, 다시한번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이제 은퇴를 앞둔 노(老) 교수가 되어있는 그분은 아직도 청년 못지않은
열정을 품고계셨다. 후배 학자, 김일호 박사에게 다리를 놔주는 작업이라면서, 인터뷰어들을 거침없이 연구단의 일원으로 끌어들이신다. 미력한 힘이지만, 그 팀의 일원이 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첫날, 트레이닝을 마치고 다른 인터뷰어와 함께 노교수의 차를 타고 퇴근하게 되었는데, 마침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려 상당히
긴 시간 함께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최근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김현영, 노성애 교수와 공저한 Korean Immigrants in Canada란 책도
소개받았고, 2세들의 현주소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좀 솔직해지자. 노교수와 대화하는 동안 나는 내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났었다. 어쩌면, 노교수와 비슷한 공부를 하는 둘째와 이제 토론토대학교 사회학과를 가게 되는 막내 생각을. 내 아이들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말이다.
근엄하고, 말을 아낄 수도 있을 것같은 노교수는 첫대면인 우리에게 생각을 나눠주시니, 그 어찌 아니
고맙겠는가.
그렇게 감동이 시작되었다.
김일호 박사는 이번 프로젝트의 연구기금을 승인받기 위해 거의 날밤을 새며 준비했다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우리는 설문지 문항 하나하나를 읽으며, 수정작업을 했다. "목숨을 걸고" 일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같다. "에이,
설문조사? 그런 것이 무얼 바꿀 수 있겠어?" 그런 속마음이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록 작아져갔고, 우리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중요한 학문적
과정인 이 프로젝트를 하찮게 여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캐나다 건강리서치의 기금 승인은 15%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노교수를 통해 들었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에스더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녀는 CAMH(Centre for Addiction and Mental Health)의 직원으로 이번 일의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척 보기에, 2세로 보였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1세와 2세는 겉보기에도 달라보인다는 점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미소가
순진하고, 눈빛이 천진한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그녀가 인터뷰어들에게 편지할 때는 영어로, 우리가 답장할 때는 한글로, 그렇게 우리와 소통하고
있다. 한국말도 잘하지만, 액센트는 있는. 김일호 박사는 "평생에 처음 만나는 완벽한 일 파트너"라고 그녀를 소개했다.
그랬는데,
트레이닝중의 어느날, 점심먹으러 가는 길에, 그녀가 내옆에 선다. "나 이민자씨 알아요." ㅎㅎ 이제 내 이름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이민자"가 내 실제 이름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남편 성을 따라사 송민자로 행세(?) 한다. "이민자의 정신건강" 프로젝트에서 내 이름은 수많은
혼란을 주므로. 어쨋거나, 그녀도 내 이름 때문에 20여년전에 나를 만났던 것을 기억한다 하였다.
때는 나의 이민초기, 캐나다 한인청년들이 "민주"의 이름으로 모였던 단체가 있었다. 그 단체에서 조금 활동했는데, 그때 2세들도 몇 끼어있었다. 그들만의 모임이 있었겠지만, 몇몇 행사에는 함께 모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나는 어쨌는가. 영어로만 말하는 2세들을 보면, 눈도 마주치지 못했었다. 말이라도 붙일까봐. 그렇게 피해다녔으니, 어찌 내가 에스더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 모임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했고 얼마후에는 공식적인 탈퇴를 했었다. 젊은 날의 나를 에스더가 불러낸 것이다. 그녀는 그후로도 더 많은 활동을 했던듯,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었단다. 2차 트레이닝을 마치고, 그녀가 "점심제안"을 했는데, 엄마의 피검사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리라 다짐한다. 에스더를 만나면서, 나의 전 생애는 그야말로 현재에 연결되어 있구나, 그런 깨달음이 온 몸으로 왔다.
에스더가 일하는 CAMH(캠 에이치라
읽는다)는 정부기관이다. 인터뷰어들은 이 기관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한 온타리오실업인협회 소속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1년 계약직이다.
인터뷰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면 1년 전에 일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CAMH의 일원인 것이 너무 황송하다. 캐나다땅의 직업환경에
있어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한국인회사에서 오랜 시간 일했고, 자영업으로 뛰어들어 그럴 기회가 없었다. 또한 능력이
없고. 그런데, 한인들을 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캐나다 정부 단체에서 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인터뷰어 훈련때마다, 다른 회의실이었고, 회의실 찾아다니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수많은 일들이 그 회의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감은 잡을 수 있었다. (에스더 말에는 비어있는 회의실을 잡기가 어렵단다)
점심시간을 넘겨서 진행되는 것에는 간단한 아침식사와 커피, 그리고 한식당에 미리 주문해서 점심도 같이 먹을 수 있었다. 별것 아닌 것에
감동잘하는 것이 내 특기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일꾼들을 배려한다고 할까. 일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목걸이...ㅎㅎ 큰 회사
사람들이 차고 다니는 사진이 들어있는 신분증들을 하나씩 받았다. 연구 주체인 토론토대학, CAMH, OKBA(온타리오 실업인협회) 로고가
들어있다. 빵빵한 단체가 내 뒤에 버티고 섰다고 생각하니 힘이 절로 난다. 전화번호는 내가 첨가한 것이다.
이제는 일만 하면 된다. 한국일보를 비롯, 많은
언론들이 이번 일을 보도해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머지는 인터뷰어들의 능력에 달렸다. 지금 살짝 고백하자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딴에는 공손하게, 그리고 연구의 이유를 잘 밝힌 것 같은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또다른 무엇이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천천히로 방향을 선회한다. 사람들의 이해와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설문조사 자격이 있는 분들은 30세
이상, 1년 이상의 현직 경험이 있는 한인1세 자영업자, 회사원들이다. 인터뷰 하신분들의 피드백은 좋다. 1시간,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면 어떨까. 만일 이 글을 읽고 인터뷰를
자원해준다면, 난, 로또맞은 기분일 거다. 송민자 519-901-0065 연락기다린다. 덧붙여 코디네이터 에스더씨에게 직접 연락해도 된다. (416)535-8501(교환4004) 소정의 감사비 "25달러"를 드리지만, 그것 때문에 인터뷰하시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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