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죄"를 싫어한다.
그 죄의 모양이 어떻든, 무조건 "죄"를 혐오한다.
잘은 모르지만, "죄"속에 파묻힌 사람도 "죄"를 싫어할 것이다.
왜 그럴까?
인간의 종교성 때문일 것이다.
"죄"와 가까운 인간은 본인은 신앙인이라 주장해도, 참된 신앙인일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개신교도이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처럼 했을지언정, 드러내놓고 개신교도라면서 기독교 냄새를 풀풀 풍긴 적은 없다.
어쩌면 나는 진실로 개신교도가 아니거나, 개신교도임을 공공연하게 읊고나서 내게서 떨어져나갈 나의 "독자"들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고리타분한 종교이야기를 전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 광고하면서, 누구나를 내곁에 붙잡아놓고 싶은 심정으로.
그런 마음은 크게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오늘은 냄새를 좀 풍겨보자.
"죄"를 언급하지 않고 종교를 논할 수는 없다. "죄"는 종교의 입구에 버티고 선 문지기이면서 종교의 끝에 선 문지기이기도 하다. 이 "죄"를 논한다는 것은 벌써부터 현기증이 치미는, 결코 그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이 글을 끝낼 공산이 큰 대단한 주제다. 그저 오늘은 "죄"를 끄집어내고 싶은 내 마음의 근저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채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나는 여러해 동안 "죄"에 대해 끊임없는 설교를 들었다. 설교시간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앉아있을 수도 없이, 언제나 푹 처져서, 내게 있는 죄성을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죄로 규정했다. 죄를 떠나 편안한 숨을 쉴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명도 없다는 설교를 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사회구조가 죄를 떠나 홀연히 살수 없음을 반증한다고 하기도 했다. 내 사업이 잘되는 것은 남의 사업이 망해가고 있다는 징조이며, 마음으로 짓는 죄는 또한 얼마나 큰지 그런 것들을 가르쳤다. 그는 신앙심으로 자신을 수양한다는 다른 종교인들을 비웃고 비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 속으로 비웃음을 키워나갔다. "죄"를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범상한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종교인들까지도 모두 한데 쓸어모아 비웃었다. 어차피 나 역시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지만, 그들과 내가 다른점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는 그런 점에서 차이가 났다. 그러니 나의 비웃음은 더욱 악의스러울 수밖에 없다.
참으로 그런 일들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죄"를 아는 나와, "살아가는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죄인"임을 아는 나가 "살아가는 나"를 움추려들게 하긴 했으나, 삶을 살아내려는 내 의지를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언제나 두개의 자아가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죄인된 자아"를 조금씩 감추며 살아내곤 했다.
그랬는데.... 3류 드라마같은 일이 벌어졌다. 설교자, 그는 교인들을 배반했다. 그가 행했던 악들을 이곳에서 나열할 수는 없다. 어쨋든 밝혀진 것들로 인해 작은 숫자의 교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너도 나도 죄를 짓고 사는데, 설교자도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그걸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교회는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 교리를 따르던 사람들은 휘청거렸다. 이제 여러달이 지나고나니, 조금 선명히 보인다.
나 역시 그 설교자를 후원했고, 따랐다. 그는 선지자같은 모습이었으며, 일반 교회에 홀로 맞선 싸움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반"교회의 부조리가 그의 힘을 키웠었다. 복음앞에 목숨을 내놓은 사람처럼 행동했었다. 나는 초기에, 내가 잡아낸 그의 작은 잘못을 덮어주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을 덮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겠다. 나처럼 그를 섬겼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를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는다.
로마서 6장에 보면,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더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엊그제 들은 말씀도 그러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셔서, 자녀들을 죄에 묶어두지 아니하신다고. 죄에 대해 혐오감, 구역질이 나야 한단다. "죄"를 보고 애통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죄인"이라면서 "죄"와 "죄 아닌 것"을 혼합할 수 없다. 내 양심에 꺼리는 것,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것,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않은 나의 모습들을 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들에게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그런 것이다. 죄에 순결한 사람이 되라는 것. 물론 우리는 "죄의 환경"에 처해있다. 이것을 어쩔 것인가? 그러나 주저앉지 말고, 싸워야 한다.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수년간 굽은 나무가 되어있었다. 잘못된 설교를 그렇게 오래 들었으니, 언제 굽은 나의 등이 펴질지 모르겠다. 그 가운데 알게모르게 "남을 비난하는 죄"도 많이 졌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온화한 얼굴로 그런 나쁜 생각들이 내 안에 있었는지.
교회안에만 회개가 있다고 목회자 없는 교회에 와서 설교해주신 목사가 있었다. 그 말이 위안이 된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까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혹독한 시련을 거쳤다. 남편은 아직도 나를 못믿는다. 아무에게나 믿음을 줄수 있다고, 그걸 경계하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내 인생이 끝나기전에 잘못이 잘못으로 판정받게 되었으니. 그것을 고쳐볼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을 회개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다.
하나님밖에 없다. 당신의 자녀를 잘 돌보는 목회자가 없다면, 나의 자녀들을 내가 직접 돌보겠다는. 이번 일도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지켜주신 결과다.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는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나는 이제서 개신교회 교인이 조금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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