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목표를 너무 소박하게 정했던 것 같다.
그것만 한다면... 그렇게 4년이 흘렀고, 바로 "그것만"을 성취하고 끝마쳤다.
큰애 나래가 대학을 졸업했다.
몇번의 위기가 있었다.
첫번째는 1학년때였는데, 시험을 끝마치고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왔는데, 성적표에 대해서 말할 생각을 안한다.
물어보았더니, 무서워서 조회를 해보지 못하겠단다.
기다려줄만큼 기다렸는데, 다시 학교로 돌아갈 날짜가 임박해서야, 성적표를 확인했다.
간신히 낙제를 면한 점수.
부모는 귀와 코가 막히는데, 본인은 낙제를 면했다고 희희낙낙이었다.
어쨋거나, 1학년때 그애를 보면서, 어찌 저리 겁이 많을꼬, 그리 겁나면 공부를 하지, 왜 그랬을꼬 하면서, 혀를 찼었다.
2학년 3학년때는 조금 정신을 차려서 공부를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공과목보다는 선택과목에 치중했다는 점.
K 교수의 수업은 꼭 듣고 싶다며 한두개를 끼어넣더니, 전공과목은 뒤로 처지게 되었다.
게다가 부전공으로 고전언어(그리스, 히브리어)도 수강해야 했으니, 해야할 공부는 자꾸 뒤로 밀리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더니 4학년쯤 되자, 전공과목을 한꺼번에 들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었다. 아무래도 전공이 본인에게는 부담이 많았던 듯싶다.
그때쯤 여름학기를 더 해야 졸업할 것 같다는 말을 몇번 비쳤었다. 꼭 그래야 한다면 어쩔수 없지만, 제시간안에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곤 하였다.
4학년 2학기때 급기야는 5과목 전부 전공과목들로 채워져서, 거의 초죽음이 된듯 싶었다.
한 과목 중간시험이 낮게 나와서, 교수에게 찾아갔다고 말했다. 다시 생각해 달라고. 그래서 얻은 점수는 겨우 1-2점 더 높은 점수였다고.
어쨋든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4년 전과정을 마쳤다.
나래가 다닌 구엘프 대학을 기준으로 보면 전공과목 전체 평점이 70점 이상이 되어야 Honours Program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이 된다. 나래는 전공 Psychology(심리학)의 학사학위를 받았다. 평점이 70점이 안될때는 제너럴 프로그램(general program)으로 대학을 졸업하거나, 재수강을 하여, 점수를 올려서 전공과목이 있는 학사학위를 받게 된다.
대학에 다닐때 직장 이야기를 하면, 나래를 고개를 흔들곤 했다. 전공과 관련있는 회사에 원서를 내야, 시작이 될텐데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아직 본격적인 직업을 정하기에는 "사회경험이 없는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더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생각을 하면서라도, 경험을 위해서 관련일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 평범한 나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매번 그런 나의 의사는 전진하기전에 그애의 막혀진 마음앞에서 찬바람을 맞곤 했다. 그래서 들어주기나 하자, 하면서 귀를 기울였더니,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콘서트 기획이나, 밴드결성, 음반판매 등등의 일에 관심이 있다. 어떻게 될지는 알수 없지만, 장래의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알수가 없다. 한동안 지켜봐달라"고 말한다.
말을 마치며, 그애는 "엄마가 이런 말을 들으면, 뒤로 넘어갈까봐 걱정"했는데, 멀뚱히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안심이 되었는지 빙긋 웃는다. 그 날은 대학 4년간 쓰던 맥프로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새것으로 교체해주던 날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남겨놓고, 컴퓨터는 더이상 말을 듣지 않게 된 것. (좋은 물건을 사고, 오랫동안 애지중지 쓰는 것이 나래의 특기라면 특기다. 애플 매니아중의 한명이다.) 음악회에 열심히 쫓아다니더니, 그것이 이유가 있었구나, 그런 생각만 난다. 레코트점의 음반판매원만 하면서 살아도 행복할 거라는 말을 하는 큰딸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엄마의 때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바보는 아니니, 그리 염려하지는 말라"는 말로 위로아닌 위로를 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때, 그날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가장 우중충한 날이었다.
엄마 아빠가 시골에서 대학졸업식을 위해 올라오셨다. 나는 누구보다도 빨리, 대학졸업전 취직이 된, 그당시 졸업예정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취업은 11월부터 시작, 겨우 3개월만인 1월에 파경을 맞았다. 그 3개월간 사회공부를 철저히 했으며, 지금 생각하니, 3개월안에 정리해버리는 것이 회사측 입장에서는 손쉬운 결정이었겠다. 졸업은 2월에 있었고, 나는 이미 한번 직장에서 "짤린" 경험이 있는, "경험있는 여자"가 되어있었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어째 이상한 투로 흐르네.. ^^)
그때 졸업식을 보러오셨던 부모님의 잔상이 떠오른다. 나의 정신적 기둥이셨던 그분들이 내 인생의 우상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면서 그날 깨져갔다. 왜소하고 볼품없이 초라한 부모님, 딸자식이 잘나갈줄 알았는데, 해고당해서 함께 의기소침해하시던 모습 등등과 어떤 것에도 활기를 찾을 수 없었던 나의 모습까지. 그날 학교앞 사진관에서 졸업식 가운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는데,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푸르딩딩하게 언 모습으로, 눈은 조금 충혈되고. 내일을 알수 없는 막막한 사회초년생의 모습이.
나래를 직업전선으로 마구 밀어넣을 힘도, 명분도 없는 것이 사실 당연하다. 졸업하기전부터 혈안이 되어 직장을 수소문하기를 바라는 것은 오직 부모 마음이지, 자신은 준비가 안되었다는 데 어쩌겠는가?
반면 나래 졸업식은 나와는 달랐다. 만면에 웃음이다. 4월말에 학교가 끝났고, 6월 11일 졸업식이 있었는데, 그애는 자신이 일하고 싶은 "아르바이트같은" "파트타임 잡"을 잡은 상태였다. 비건 베이커리에서 빵도 굽고, 팔기도 하는 일. 그녀는 "보잘것 없어 보이는 그일"에 취업결정이 되고나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느날 그애가 일하는 빵집에 가니, 각종 오븐의 열기 때문에 실내온도가 펄펄 끓는 곳에서 민소매에 큰 앞치마를 두르고 "아줌마"처럼 일하고 있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 캐시어로 동분서주하면서 열심이다.
일단은 독립이 제1의 목적. 친구들과 하우스를 렌트했고, 요즘은 돈달라는 말없이 견뎌내고 있다. 돈이 부족해서 음악회등에 못가는 것 외에는 큰 불편이 없단다. 자신이 쓰던 가구들을 다 날라다 주었다. 집에 있는 그릇들을 가져가라 했더니, 이제부터는 싸구려라도 자신이 사서 "내집"을 꾸미겠단다.
인문학을 공부해서 어떤 직업을 잡을 수 있겠느냐고, 여러 사람이 염려했던 대로 나래는 "직업을 잡느라 애써보지도 않고, 일단은 생존"에 뛰어들었다. 망망대해에 작은 조각배를 타고 떠난 셈이다. 어떤 튼튼한 배가 있어, 그곳으로 옮겨탈수 있을런지 모를 일이다. 혹은 가다가 작은 항구에서 한동안 쉬어갈수도 있고.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것도 생각안하는 바보는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하는 그애의 말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소박하다는 말이 그말이다. 대학졸업만 한 것.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써먹어야 할텐데, 종이 한장으로 끝나는 건 아닌가. 졸업식장에서 "네가 배운 것을 써먹어라. 너 자신을 위해, 사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이렇게들 말했던 것 같은데, 나래가 그런 생각을 하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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