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긴 여름이었다.
긴팔 옷이 어울리는 오늘은 가을의 첫날같은 느낌이다.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갔는가?
여름은 웅성거리는 저잣거리같았다. 한곳에 있어도, 떠나있는 듯, 모두의 눈이 다른데를 향하고 있었다.
떠돌이에게 어울리는 방랑의 계절, 그 여름 마무리를 해야한다. 그리고 나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여름은 지역신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학년 마무리로 바쁜 아이들에게 아르바이트를 구하라 닥달하고, 그들에게만 맡겨놓기엔 마음이 급했다.
사실, 작년의 달콤함이 있었다. 여름방학때 일했던 아이들이 그 돈을 학기중 소비하는 것이, 내심 대견하고 신기했다. 내 주머니에서 덜 나가서 좋았고, "우리 애들은 열심히 일해서 제 쓸만큼은 벌어" 하면서 난체하는 게 재미있었다. 방학이 한두달 인가? 무려 일년의 삼분지 일, 4달이나 된다. 그건 "학비조달의 날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부모에 대한 예의며, 준 사회인으로 감당해야할 그들의 책무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긴 넉달 동안 그애들이 무얼 한단 말인가? 죽도록 일해서, 부모를 좀 도와주면 좋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도 내뜻을 따라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기본원칙에 동의했다. 직업을 구하기로 마음먹으면, 일단 신문을 뒤적여야 한다는 게 별 신선할 것 없는 나의 방식이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이런저런 구인광고를 오려내기 시작했다. 이메일로 보내주기도 하고, 집에 왔을때 소개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일단 이력서를 써들고, 번화한 타운을 한바퀴 돌겠다고 했다. 두 아이가 차를 타고 갔다오더니 한 10여장 이력서를 돌렸다 한다. 어떤 곳은 두명이 같이 접수하기도 하고. 맥도널드, 팀호튼스, 월마트등 사람이 자주 바뀌는 그런 곳이라야, 구직의 기회가 있을텐데, 그런 곳은 응모하지 않는다. 저이들이 마땅치 않은 곳에서는 일하기 싫다 한다. 돈만 준다면, 어디로든지 보내버릴려는 시퍼런 엄마의 눈앞에서 아이들은 제 입맛에 맞는 곳에만 이력서를 뿌렸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직업을 위해서는 꼭 집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게 나의 소신이었다. 충분한 보상이 된다면, 토론토에 방을 얻어서라도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엄마의 기대 때문인지, 둘째는 어떤 곳에 전화를 했었는데, 그곳이 아마도 "은밀하고, 괴상한 곳"이었었던 듯, 화들짝 놀라 전화를 끊고 나서, "엄마는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친구들과 가족들을 떠나 낯선곳에서 4달 동안 있기를 원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진작에 동네 슈퍼마켓이나, 식당, 가구점등 경영주들과 친분이 있었다면, 내 아이들 아르바이트 구하는 것쯤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모두가 지인들의 자녀들에게 구직의 기회를 준다는 것, 나도 모를리 없다. 종잇장처럼 얇은 이사회에서 맺은 인간관계가 나를 서글프게 한다. 아니면 도시에 살았다면, 보다 많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거액의 샐러리를 요하는 직업이 아니고, 겨우 최소일당을 벌어야 하는 서비스직 구하는 것에서 벽에 부딪친 현실에서, 나는 고얀히 주늑들고,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 생각을 조금 바꿔보자. 현재 있는 상태에서 뭔가 일을 벌려보는 건 어떨까? 그동안 취급하지 않았던 꽃을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시작하든지, 아니면 아이스크림 가판대를 만들까? 인력이 남아도는데, 뭐래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생각은 이리저리 마음대로 굴려다녔다.
물론 연락온데는 없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은 시작되었다. 아이들 아르바이트 찾기에 마음만 바쁜 나에 비해 남편은, 아이들에게 가게에서 일하면 된다며 안심시켰다. 일하고 있는 헬퍼의 시간을 줄이면 된다면서.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계산한다. 헬퍼의 시간을 빼내는 것은, 일주일에 겨우 몇시간이고, 나머지는 제 아빠 일하는 시간을 빼서 아이들에게 줄 것이란 걸 안다. 그렇다면, 결국, 집안의 돈이 나가는 것밖에는 안된다. 아이들이 다른 사업체에서 벌어와야, 뭔가 남는 장사가 될 것 아닌가?
이러는 와중에 아이들은 제 아빠의 지휘아래, 가게일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침 가게 오픈은 예전처럼 헬퍼가 하고, 정오부터 하오9시까지 매일 두 아이가 번갈아가면서 가게를 지키는 것이다. 남편은 한의원에만 몰두할 수 있고, 나는 가게일에서 몇걸음 더 떨어질 수 있었다. 물론 매주 한번씩 도매상 쇼핑은 나의 몫이었다. 몇주 지나가니, 아이들은 아빠가 매일 이렇게 일해왔다는 것에 놀란 듯하다. 저희들이 나눠서 해도 벅찬 일을 아빠는 그동안 아뭇소리없이 해왔다는 것에 말이다.
다른 사업체에서 일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나의 바램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부모는 아이들로 해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부모의 고충을 몸소 익힌 셈이 되었다. "돈"에 눈이 멀었던 나는 그 모든 가치를 우습게 아는 실수를 범할뻔 했다.
아이들은 일하면서 친구들과 모여 놀기도 하고, 음악여행도 다니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지냈다.
조금 한가해진 남편과 나는 페이슬리 민박집 3호실 꾸미기를 마쳤고, 시간이 없어 하지못했던 집안팎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성실히 부모를 돕고, 미니멈 웨이지를 받고 다시 학교로 떠났다. 내 계산으로는 아이들이 가게에서 돈을 가져갔으니, 가게의 운영자금이 부족하여야했다. 그러나 덥고 쾌청했던 여름 날씨 덕분인지, 그럭저럭 아이들에게 돈을 지불하고도, 적자운영은 아니었다. 결국 아이들은 떳떳하게 일하고, 부모들은 모처럼의 휴가를 보낸 셈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간 뒤에 이틀 정도 저녁 시간 가게를 봤다. 남편의 배려로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지만, 이번 가을에는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손님이 있건 없건 낮에는 큰 문제가 없다. 손님이 없으면, 책을 읽든지 신문을 읽든지 한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손님들이 적조해지면서 문닫을 시간이 가까이 오면, 낯선 사람이 가게문을 열지 않기를 소망한다. 한번도 그런 일은 없는데, 나쁜 사람이 들어올 것만 같다. 그 몇분간의 스트레스가 마음과 머리를 쭈빗 서게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도 이런 시간들을 지내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 여름에 아이들은 돈을 벌지 못했다. 큰애는 그래도 그 돈을 저금해서, 얼마간 모여놨지만, 친구가 많은 둘째는 번것 거의 전부를 소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가면서 걱정이 태산이다. 학교 다니면서 일을 하겠다 한다. 아이들은 집안의 경제사정을 잘 모른다. 나도 잘 몰랐다. 그런데 올 여름 지내보니,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 정도는 보조할 수 있는 수준이 되더라. 그래서 둘째에게는, 장학금으로 받은 2,000달러를 다시 돌려주기로 했다. 모아놓은 돈이 없는 대신 장학금도 네가 열심히 해서 번 것이니, 다시 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학비와 기본생활비를 매달 보내주겠다 했다. 용돈은 있는 돈에서 쓰라고 했다. 다행히 온타리오 정부에서는 대학생들에게 학비보조금을 지원해준다. 일인당 1600달러 정도이다. 이런 것들을 모아, 용돈을 아껴써야 할 것이다. 큰애는 소도시여서 렌트비가 싸고, 교통비도 대학생 면제가 되어서 없고, 둘째보다 저렴하다. 그리고 알뜰한 편이니, 제가 번 돈에서 급한 용돈을 써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무서워서 쓰지 못하는, "작은 가슴"의 날들이 이어질 것 같다. 상관없다. 필요한 것은 거의 다 있고, 꼭 사야한다면 우선 세컨 핸드샵을 훑으면 된다. 그런데, 남편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도 오늘도 노트북을 사왔다. 너무 오래된 노트북을 이리저리 고쳐서 쓰다가, 다시 장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머리속에는 그밖에 더 많은 "구매 리스트"가 있다는 걸 안다. 아직은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아껴쓰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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