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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앨리스 먼로와의 만남

그에게는 익숙치 못한 일이다. 눈오면 눈을 치고, 낙엽이 쌓이면 그것을 긁어내야만 직성이 풀리지만, 집안에서 망치와 못을 들고 목수일을 하는 것은, 그의 사전에 나타나있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일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것을 오로지 친구가 도와주기로 하면서 과감히 용기를 내었다. 친구는 도와주는 것 이상이었고, 모든 일을 주도했다. 이층에 있는 얼룩진 카펫을 거둬내고 마루를 까는 일을 하기로 했을때, 그는 시다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친구의 도움없이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째방은 그가 하기로 하였다. 그러기로 한 첫날, 남자는 첫 움직임에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심신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처럼 벽난로앞에서 밥을 먹고, 영화와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기에, 그런 여유가 있긴 했다. 나는 그가 기지개를 켜면서 마음에 불이 들어오는 낌새가 보이자, 함께 쾌활하게 이층방으로 향했다. 그가 드디어 전기드릴을 들고 마루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을때 나는 그를 지켜봤다. 와 잘한다 하면서. 그가 친구와 일할때는 나는 세심하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죽이 잘맞는 것 같았고, 둘이 있으니, 나의 도움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 조각을 배열하고 그것을 한줄 깔아놓았던 다른 나무 조각에 맞추고, 망치로 끼어넣고 중간중간 구멍을 냈다. 그 다음에 그곳에 사선으로 못을 박아 나무를 고정했다. 마치 퍼즐맞추기 게임같았다. 남의 집 마루도 이렇게 한땀한땀 수놓듯이 놓여졌을까,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일하는 동안에 나는 스마트 폰으로 노래연습을 하기도 했다. 포도를 씻어와 그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한참 있다가 책을 가져와 카펫이 걷어져서 알몸이 드러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그는 간간히 나의 주목을 요구했다. 일하는 아빠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사진을 찍어달라고도 해서, 나는 사진기 대신 스마프폰으로 그것을 찍기도 했다. 어쨋든 나무 조각 몇줄을 까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게 기대된 역할이었다. 가까운 곳에 자신의 고독을 메워줄 다른 존재가 있다는 안온한 확신 속에서 혼자 행동할 때의 그런 확장되고 연장된 자아의 느낌을 그에게 제공하는 것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쐐기풀"에는 나의 저런 행동에 대한 적확한 표현이 나온다. "확장되고 연장된 자아의 느낌을 그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이런 것들의 연장선에 인간관계들이 있다. "나도 네가 하는 일에 관심이 있어."라는 것 말이다. 






앨리스 먼로와의 만남은 남편이 전해준 소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마도 10월 중순경이었을 것이다.

캐나다 여자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대.

그가 윙행 출신이라는데?


어쩌면 첫번째 소식은 아, 그래 정도에서 끝나는 관심이었다. 나의 청각은 윙행에서 크게 일어섰고, 무언가 큰일이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감지를 했다.

세계적 뉴스거리에 나도 끼어들 자격이 있는 것처럼, 이 뉴스는 조금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앨리스 먼로와 윙행.


그녀가 태어난 윙행(Wingham)이라는 동네는 우리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다. 자주 들리는 곳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가게를 경영하는 친구가정이 있어서 낯설지 않다. 내가 떠들어대는 그레이 부루스 지역은 아니지만, 바로 경계선에 있는 곳으로 휴론호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휴론 호수 근처에 있는 아담한 시골마을이다. 앨리스 먼로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앨리스 먼로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캐나다의 언론중에서 토론토 스타는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몇번에 걸쳐 82세 아름다운 할머니를 대서특필했고, 단편 한편을 몇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하여, 게재하기도 했다. 그녀의 단편은 그리 짧지 않다. 책으로 50여 페이지에 이른다. 나는 처음에는 영어로 된 소설을 읽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가장 나중 발간된 "Dear Life"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몇 페이지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토론토 스타에 게재된 소설도 단어를 찾아 읽다가, 나중에는 그냥 마구 읽다가 중단한 상태다. 그러는 중에 한국에 다니러 갔던 친구(그녀는 윙행에 산다)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집 두권을 사왔다. 물론 한글번역본이다. 그녀는 나의 마음을 읽고있었는지, 나보고 먼저 책을 읽으라고 빌려줬다. 줄을 치며 책을 읽는 나는 남의 책 빌려보는 것을 되도록이면 안하려고 하는데, 그 친구는 줄을 쳐도, 그 책에 낙서를 해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해서 우선 읽게 되었다.



그랬다. 내가 읽은 첫번째 작품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조금 뭐라 말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었던가 하는. 딱 한 작품만 읽고 먼로에 대해서 아는체를 하려던 계획이 포기되었다. 다시 작품들을 읽어나갔다. 그녀의 소설은 단편이지만, 장편과 같은 여운을 가지고 있었다. 단편은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하기엔 너무 짧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래서 나는 단편들을 피해왔다. 단편은 장편으로 가기위한 작가들의 습작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그런 고정관념을 갖고있는데, 그녀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단편에 대한 독자들의 제고를 요청해왔다. 아름다운 창작품으로서의 완성된 형식이라고 말이다.


30대 말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먼로는 50여년간 단편만을 써왔다. 총 14권의 책, 한 책에 10여편이 있다면 모두 140여편의 소설이 있다는 말이다. 

겨우 한권의 책을 끝낸 지금, 나는 조금은 먼로의 작품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사람들을 다룬다. 꽤 영리한 소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 결혼해서는 가정에 충실하지만, 한번의 진한 일탈을 하는 주부, 혹은 이혼한 여자, 이런 것들은 꼭 작가 자신을 연상시킨다. 병든 남자가 많이 등장한다. 꽤 까다롭고 권위적인 남자도 나오고,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인물과 몽환적이고 감성적인 인물이 또한 같은 비중을 갖고 나온다. 


옛 사랑과 우연치 않은 해후를 하고, 아주 진한 감정적, 혹은 육체적 교류를 하고 삶을 사는 여자들.. 또하나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모든 사람눈에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삶의 환희를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녀의 단편집을 관망할때 "언제나 자아를 찾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습관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 언제나 진정한 기쁨을 향해, 혹은 진실을 향해 마음을 열어놓는 사람들, 그들은 그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이 행복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쐬기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트리니다드에서 온 이민자 가족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무척이나 특이한 억양으로 말하는 그들은 집안을 매콤 달콤한 요리 냄새로 가득 채우곤 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결혼생활이라는 긴 여행끝에 마침내 진정한 변화를 발견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229쪽)


"그러나 딸들에게 거리에서 풍기는 냄새는 역겨웠고, 고함소리는 무섭기만 했다.(229쪽)


나는 이민자들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지를 못한다. 본토박이들이 이민자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그것이 언제나 알고싶다. 엄마의 눈에서는 우선 안심이 된다. 냄새를 풍겨도 될것 같다. 그러나 딸들의 시선에 오면, 이민자들은 "불한당"들이다. 언제나 사회는 이 두개의 시선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시선에 집중하는가는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들의 비위만 맞출것은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민자들을 보는 사람들을 내편으로 끌어들이면 된다. 나는 그런쪽으로 생각을 모은다.


"포스트앤드빔"에서 느낀 것이지만, 사람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이라는 "인정"의 화살에 쏘일때 아무리 누추한 인물이라도 광채가 솟아나오기 마련이다. 사랑은 그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먼로의 소설에서는 이 사랑으로 피어나는 인간들이 나온다. 사랑이 없이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다. 사랑이 있을때 그에게 꽃이피고 열매가 열린다. 


"기억"에서는 낯선 남자와의 동행을 그렸다. 가정적으로 안정된 여자의 일탈이다. 그 일탈은 그냥 단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갈망하던 그것을 누군가 알아주었을때, 그 일탈이 추억이 되고, 힘이 되었다. 추잡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추억속에서 갈무리되는. 

"그녀는 다른 삶을 살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삶을 더 좋아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다른 종류의 삶 역시 나름의 함정과 성공을 포함한 또하나의 탐구에 불과했으리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떠올랐다." 그런 문장에서 안도의 쉼을 내쉰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일단 멈춘다. 다른 삶도 별반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혹은 더한 희생과 고통이 따를 것을 알기에.


"퀴니"에서 보면 사랑에 헌신적인 여자를 본다. 보잘것 없는 외모, 배경을 지닌 어디서나 마주치는 여자지만, 그녀의 사랑은 숭고함을 뛰어넘는다. 그런 사랑으로 일어서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쉽게 지나치게 된다. 그들의 누추함만을 보고, 그들의 계산없음만을 보고 흉을 보게 된다.


"곰이 산을 넘어오다" 같은 작품은 잠시 외도했던 남자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는데 쏟는 눈물겨운 노력이 돋보인다. 먼로의 주인공들은 마음이 아름답다. 그래서 그들을 연상할때 작가 먼로를 연상하게 된다. 단순하지 않고 깊다. 조금은 몽환적이다. 


캐나다에 이민온 사람들이 놀라는 일들이 있다. 은행에 가거나, 마트에 가면 머리가 하얀 할머니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손에 익은 일이라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맡은 일들을 척척 해낸다. 젊은 여성들만 일하는 사회에서, 할머니들이 당당하게 일하는 캐나다가 내겐 참으로 신비하게 느껴졌었다. 먼로는 캐나다라는 나라의 성격에 꼭맞는 그런 작가임에 틀림없다. 늙어서까지 현역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여성. 그녀는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나는 그것도 지지한다. 이제는 그녀도 좀 쉬어야 할 것 아닌가?


온타리오 서부의 앨리스 먼로에게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보낸다. 아주 작은 인연을 붙잡고 늘어지는 심정이 있지만, 나의 이 절묘한 기쁨을 사람들은 알른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