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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엄마 미안합니다

무엇인가에 "고조"된 감정 그대로 글을 이어간다면, "이세상 삶에서 가장 다행스럽고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이다.

"고조"된 감정이라고 말한 이유는, 며칠전에 엄마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충격적으로 "엄마의 사랑"을 다시한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됐다.


지난 토요일 엄마의 여든일곱번째 생신잔치가 있었다. 엄마의 생일은 언제나 날씨가 따뜻한 초여름쯤이 되므로, 가족들이 이 핑계로 한번씩 모이게 된다. 올해도 한달전부터 모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우리집에서 하는 안이, 토론토 동생네의 이사시기와 맞물려서 취소되었고, 많은 숫자가 모이니,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공원에 가서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 이야기도 나눈 다음에, 1차 모임을 끝내고 시간이 있는 사람은 엄마집에서 회포를 풀기로 하였다.


너무 비싼 식당은 가지말고, 각 가족별로 음식값을 내기로 하자,고 의견이 모여졌고, 중국식당에서 음식을 먹은후 케잌을 자르기까지 무리없이 순순히 이어졌다. 그자리에는 딸과 사위들, 조카 부부, 손주들과 증손주까지 모두 23명이 모였었다.


엄마의 생일잔치 분위기는 미국의 세째언니와 형부가 시카고로부터 올라온다고 할때부터 무르익기 시작했다. 은퇴하신 형부의 다리가 아파서 올수없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을 때는 서운했지만,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세째언니의 캐나다행이 결정된 데에도 사연이 있었다. 엄마는 세째언니의 불참소식에 "흔쾌히 올 필요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막내딸과의 통화에서 서운함을 비치셨나 보다. 그랬더니 막내가 "엄마는 형부 다리가 아프다는데, 비행기타고 오라는 말이냐?"면서 따지고 들었고, 엄마는 "비행기는 운전이 어려울때 타는 것 아니다니?" 했던 말이, 막내를 통해 "엄마말에 세째네는 운전이 힘들면 비행기라도 타고 올수 있는 것 아니냐"로 와전되었고, 이런 루머는 이리저리 퍼졌다.


이번에 오신 형부는 "내가 장모님에게 안간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빼고 이야기가 진행되더니, 결국 처제들에게 한마디 듣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생신때 가서 할머니를 뵙고 오라"는 조언을 들어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엄마는 서운하셨지만, 본인들에겐 내색을 하지 않으셨으나, 이런저런 경로를 통하여 먼데 사는 언니네를 움직이게 하였다. 어쨋거나 1년에 한번 얼굴이라도 봐야 행복해지시는 어머니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나는 생일날 내려가서 엄마집에 머물며 지내다가 3일후 열리는 딸의 졸업식까지 보고오기로 작정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안에 오웬사운드 언니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렇게 되면, 성도가 몇 안되는 우리 교회가 너무 쓸쓸할 것 같고, 반주를 해야 하니, 당연히 오웬사운드 언니는 생일 당일날 올라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오웬사운드 언니는 엄마집에서 머무를 것에 대해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토론토 태풍주의보가 내린날, 엄마에게 주의를 주려고 전화했다가 그런저런 사정이야기를 하게 됐다. "교회 때문에 언니는 생각중"이라고 말하는데, 엄마의 자동반사같은 퉁명한 말투가 전화선 너머에서 건너왔다. "무슨 사정"이냐는 것이다. "그럴 때도 있는 것"이지 않냐면서. 언니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에 강한 의의를 제기하셨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엄마의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도 오고, 나도 내려가서 며칠 자기로 했으니 그정도면 "과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웬사운드 언니와 엄마는 각별하긴 하다. 결혼을 하지 않아선지, 엄마는 가끔 "내가 마지막까지 돌봐야 할 딸"로 생각된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챙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 나는 둘 사이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에 놀라기도 한다. 언니는 가끔 엄마집에 가면,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오는 그런 방문을 하곤 했다. 시간이 없어서 몇시간 머물다 올때가 많은 우리들과 조금 다른 관계를 유지했다고나 할까?


어쨋든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고, 오웬사운드 언니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언니가 잠을 안자고 갈수도 있다고 했더니, 엄마가 서운해하신다. 잘생각해서 결정"하라는 요지였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12일: 생일파티 전야제는 세째언니네가 미국에서 와서 하룻밤 엄마와 지낸다

13일: 생일파티, 모든 가족이 모인후 세째언니네, 오웬사운드 언니, 나, 막내부부 엄마네서 함께 잔다 

14일: 진짜 생일날.. 엄마와 함께 딸들, 사위가 엄마교회에 함께 간다

15일: 엄마와 뒹글뒹글 보낸다. 

16일: 엄마를 모시고 나의 둘째 대학졸업식에 참석하고, 헤어진다



대강 이런 스케줄이었다.


그 시간들은 꿈같이 흘러갔다. 엄마집에서 뒹굴 자식들을 위해 엄마는 오래전부터 밑반찬과 여러가지 먹을 것을 쟁여놓고 있었고, 서비스 담당자로 임명된 나는, 겨우 심부름이나 굼뜨게 해도 될 정도로 먹을것이 풍부했다.


풍부한 것은 음식뿐이 아니라, 오랫만에 모인 자매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이야기들로 점임가경이었다. 특별히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세째언니네가 안정된 노후를 보내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나에게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고, 지금 겪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용기를 주었다.


저녁 늦게는 한국의 언니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집에 있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자매들과 엄마는 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말은 땅으로 떨어지는 법이 없이, 의미를 갖고 공중에서 주고받으면서 모두가 색다르게 겪어온 삶이지만, 그안에 공통분모들이 꽤 많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오랜 훈련기간을 거쳐 이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가족도 있고, 아직도 헤쳐나가야 할 숙제들을 한아름안고 있는 가족들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잘 되어져나갈 것이라는 희망적인 마음이 들게 했다.


엄마는 딸들을 옆에 끼고 보내는 며칠간, 엔돌핀이 과다생성되는지, 약간의 "흥분상태"를 보이셨다. 이성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도, 언니들과 동생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그렇게 좋았는데, 엄마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엄마와 보내는 마지막 날에는 우리집 둘째딸의 대학졸업식이 있었다. 아침일찍부터 나갔고, 점심까지 먹고 들어오니 오후 4시쯤 되었었다. 스마트폰을 사놓고 잘쓰지 못하는 큰언니에게 스마트폰 강의를 하는데, 엄마는 그동안의 여정이 피곤했던듯, 소파에서 낮잠을 주무시기 시작했다. 큰언니도 간신히 카톡 공부를 다시 한 다음에 피곤하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과 나, 그리고 오웬사운드 언니가 이제 떠날 일만 남았었다.


3박4일 엄마와 잘 보냈으니, 엄마와 인사만 하고 헤어지면 되는 찰라에, 우리들은 아주 몹쓸 결정을 하게 됐다. 엄마가 모처럼 곤하게 주무시니, 깨우지 말고 조용히 떠나자, 하는 그런 결정말이다. 우리들은 자주 토론토에 나오니, 엄마와 헤어지는 인삿말을 하지않았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간의 피곤을 풀고계신 엄마를 깨우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어렵게 느껴졌던 게다.


보따리를 다 싸들고 떠나왔다. 토론토에서 3시간쯤 걸리는 집까지 가기전에는 언제나 한국식품을 들린다. 엄마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시장보기를 마쳤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울린다. 이사로 바쁜 동생의 책망소리다. "엄마가 지금 깨어서 언니들을 찾고 있으니, 빨리 엄마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 무언가 불안한 마음을 품고, 엄마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서둘러 "엄마가 주무셔서 잠시 시장보고 오려고 나갔던 것"이라고 변명거리를 만들었다. 엄마는 "자고 깼는데 아무도 없고, 짐도 없어서 밖으로 나가서 헤매면서 우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 엄마는 우리가 말도 없이 떠났으면, 다시는 오지말라고 하실 작정이셨다고 했다. 자식들이 가는데, 아무런 기척을 못느끼고 잠만 자고 있었던 자신에 대해서 큰 실망을 하셨단다.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서, 큰언니는 엄마에게 "애들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달래고, 곧바로 카톡에 올려서 동생이 내게 전화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식품점을 떠나기전에 그 전화를 받았고, 저간의 사정을 알고 사태에 대비할 수 있었다.


차를 주차하느라고 나와 남편은 늦게 들어갔는데, 문앞에서 기다리는 엄마의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들은 언니는, 엄마가 잘못되는 줄 알았다고 나중에 내게 말해줬다. 큰 충격으로 인해서, 거의 실신 지경으로까지 가셨던 게 분명하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돌아와서, 시장보고 곧 올 생각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과일도 깍아먹고, 커피도 마시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엄마는 우리의 말을 반은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자식들이 무언갈 잘못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고, 그건 실수일 것이니, 혼내도 되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실망하지는 말라"고 말씀드렸다. 지난 3박4일간 엄마와 쌓았던 사랑이 최대의 위기를 만나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엄마에게 큰 상처를 줄뻔한 사건이었다.


딸들이 많다보니, 우리들은 엄마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딸들"을 따로 뽑아놓고, 엄마를 놀리곤 한다. 막내라서 더 이뻐하고, 마음이 넓어 엄마가 기대기에 좋은 딸과 엄마의 관심이 필요한 딸까지, 그들만 이뻐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보니, 엄마는 나도 너무나 사랑하고 계셨다. 오웬사운드 언니말에 의하면, 뒤에 들어오는 나를 찾는 엄마의 눈빛은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의 눈빛"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를 버린 것은 우리들이었는데, 엄마는 이미 자식들이 가는 데도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나쁜 엄마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집스럽고 울퉁불퉁했던 엄마의 시기들도 물론 있었다. 딸들과 반목하고, 서로 맞지않았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거쳐 엄마는 "주는 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랑체가 되어있으신 것 같다. 모든 것들은 닳아서 없어지는 데 사랑이란 것은 쓰면 쓸수록 더욱 넘쳐나니, 그것처럼 신기한 게 세상에 있을까 싶다. 딸들은 이런 모든 것들 뒤에 "엄마의 약해지심"을 이야기한다. 생전에 안부리던 욕심을 부리신 것부터 말이다.


나는 "엄마의 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토끼눈처럼 붉어진 엄마눈자위"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엄마의 행복을 한순간에 악몽으로 만들뻔한 일을 겪으며, 우리들의 처신이 어때야 하나 뒤돌아보게 된다. 


이번 엄마의 생신은 특별했다. 딸들은 엄마의 사랑을 흠씬 느꼈고, 그것을 자산으로 간직하고, 받은 것을 어딘가에 쓰게 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자기 가족들을 위해 쓰겠지만, 그 사랑이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사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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