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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목소리

목소리 방송을 좋아한다. 귀만 열어놓으면 되는 그 친절함이 우선 마음에 든다. 팟캐스트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부분일 것이다.

 

팟캐스트를 듣다보면, 그들의 전문가적인 목청이 부럽다. 타고난 부분이 많겠지만, 알게모르게 많은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어떤 출연자는 진지한 내용을 담고있긴 하나, 제대로 의미가 전달되지 않아서 답답함을 느낄때가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방송에서 중요한 부분일지라도, 그를 주목하는 건 쉽지않다.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다지 목청이 좋진 않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금니 몇개가 사라진 뒤로 발음이 새는 것을 느낀다. 이가 없는 것은 먹는 것뿐 아니라, 이렇게 목청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하나 말하기에 공을 들이지않는 버릇이 있다. 잘몰라서 대화에 못끼어들기도 하고, 주제가 관심사가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고, 나 대신 누군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경우도 있고, 상대방의 관심에 따라 다음말을 먹어버릴 때도 많다. 한마디를 했을때 바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심한 성격에 다음말을 잇기가 어색해서 멈춰버린다. 그래선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설명이 너무 짧다" "실어증인가 했다" "자세히 똑똑히 말해줬어야 했다"는 등의 걱정과 지천을 듣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십대나 이십대에 섭렵했어야 하는 필수항목들인데, 아무래도 재교육이 필요한 시점에 왔나보다.

 

그래도 어떤때 나도 모르게 정확하게 신이나서 떠들때가 있다. 내 언어가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잘못말해진 어미나, 관사나, 억양을 고쳐서 읽어주는 사람들을 만날때이다. 그럴땐 내 목소리에 내가 반하기도 한다. 내게 생각해서 말할 시간을 주고, 추임새도 넣어주고, 맞장구도 쳐주는 그런 상대방을 만나게 되면, 내 목소리는 생기를 얻는다.

 

소리전화 애용자는 아니다. 다급할 때가 아니면 그다지 전화소통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장장 1시간 40분간 전화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전화는 침묵의 순간이 거의 없는 - 5초 이상 말이 없으면 라디오방송사고라 기록된다는데- 전화도 누군가는 말해야 하니, 알짜배기 시간을 이야기하는데 썼다. 나름 대견하다. 그것도 저멀리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친구와. 그 친구와는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전화가 최적의 소통방법일수밖에 없다. 물론 이메일이나 카톡이 있으니, 친구가 전화로 시도하지 않았으면, 느적지근한 이메일 안부가 오고갔을 것이다. 카톡에 있는 보이스톡으로 대화했는데, 거의 캐나다 반대편 그것도 남극에 가까운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친구와 옆집사람인 것처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1989년 이후로 그녀와 연락이 두절됐다. 그러니 26년만인가? 내가 한국을 떠난지 4년만에 온가족이 뉴질랜드로 떠났다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했다고 전화선 너머의 친구는 들려줬다.

 

그녀와 내가 가진 공통의 관심사는 대학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얼굴모습이 보이지않는 그녀의 전화목소리는 20대와 똑같았다. 어쩌면 그녀에게 들리는 나의 목소리도 그때와 비슷할 것 같다. 영락없는 아줌마들임에 분명한 우리들은 서로 20대의 풋풋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대화했다. 그 상상을 깰 현재 사진 보내기는 아마도 못할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녀를 떠올린다. 천상 여자, 다소곳했던 모습과 정갈했던 그녀의 필체, 그리고 취해가는 남자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대학앞 실비집에서 꼿꼿이 앉아있던 그 모습까지.

 

그녀와 서너번의 긴 통화에서 우리는 서로의 현주소를 설명해줘야 했다. 나는 나를 그렇게 소개했다. 자랑할거리가 남지않은 아주 홀쭉한 상태가 되었다고. 너와 몇년전에 소통이 되었다면, 나는 나를 걱정없는 유한부인의 모습으로 전할 수 있었을거라고. 그녀는 허허거리며 웃어주었다.

 

친구는 아픔을 거쳐 성숙해져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아픔에 들어가므로 시간이 지나면, 성숙해질수도 있을 것같다.

 

2015년을 돌아본다. 행동은 없이 한숨만 쉬었던 날들이었다. 해야할 목록을 머리속에 쌓아놓고 허물어뜨리는 일들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안주의 날들이 너무 오래되어서 발동걸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밧데리를 충전하지 않고도 마냥 굴러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나보다.

 

느슨해진 운동화끈을 조여매어야 한다. 그저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벌여놓았던 것들을 정리하고, 몰두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겠다. 애들이 남편이 나대신 무언가를 이뤄주기를 바랬던 "흑심"을 접기로 한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으로. 기대와 선망은 실망을 부른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지금, 하나님께 조금 더 다가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일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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