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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귀여운 엄마


오늘이 세계여성의 날이란다.

엄마와의 며칠을 글로 옮기려는 바로 이날이 여성의 날이라니, 뭔가 손끝에 떨림이 오면서, 글의 방향이 묘하게 튈것같은 생각이 든다.


우선 사진을 업로드한다. 오갈데 없는 엄마의 주름살이 보인다. 미수가 되는 만 88세를 앞둔 엄마의 모습이니, 어쩔수가 없다. 자식들 눈에는 아직도 예쁘고 고와보이지만, 사진은 속이지 못한다.




그녀는 마치 소녀같다. 자식앞에만 서면, 샘솟는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해, 웃음꽃이 널렸다. 갑상선에 암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 대단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수술권유를 보류한지, 석달째여서 다시 초음파 검사를 받고 의사를 만나는 약속이 정해져 있었다. 그때를 맞춰, 동생과 함께 병원을 방문할 계기로 겸사겸사 토론토에 내려갔다. 엄마를 빙자한 "1주일 휴가서"에 대한 허락을 남편과 딸에게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보관용이 아닌, 떼어쓰는 편지지에 성경필사를 해주신 것을 보여주신다. 한자 한자 공들여쓴 글씨다. 아마도 내가 10글자를 쓸때 엄마는 한글자를 쓰실까? 엄마의 글쓰기는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다. 성경도 읽으시고, 필사도 하셔서 글을 배우셨다고 생각했다. 막내동생이 가르쳤다는 소문(?)이 있어서 오늘 확인차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그런 적이 없으시단다. 어깨너머로 한글을 익혔지만, 읽는 것, 쓰는 것이 서툴러서, 혼자 성경을 읽고, 베껴쓰면서 깨우쳤단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글자를 배워주겠다고 제안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창피해서, 거부하셨다는 이야긴 들어서 알고있었다. 그런데 그후에 누군가에게 배웠거니, 그래서 읽고 쓰시겠거니 했는데, 엄마는 자식들에게 간간히 그런 언질을 주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해서 혼자 터득하셨단다.


이번에 엄마집에서 엄마와 성경을 한절씩 번갈아가며 읽었다. 마침, 다윗이 밧세바에 홀려 밧세바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 죽이는 장면을 같이 읽게 되었다. 엄마는 천천히 읽기는 하지만, 글자를 틀리지 않고 잘 읽으셨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을 것 같은 다윗의 범죄장면이라, 함께 나눌 이야기도 있어서 좋았다. 엄마는 손목이 아파서 글을 많이 쓰지는 못하지만, 편지지가 떨어져서 요즘엔 베껴쓰기를 못하신다 하셨다. 보관할 수 있는 공책에 쓰지, 왜 편지지에 쓰시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 보여주기 창피하다며, 그저 연습용이지 누구에게 넘겨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셨다.


엄마의 한글공부는 성경책을 읽는데서 시작되었다. 답답한 때가 많았지만, 친구와 함께 성경통독에 도전해서 한권을 다 읽었던 즈음이 캐나다에서 이민생활을 할때, 60대 중반쯤이었는가 보다. 어떤 해에는 1년에 4번을 읽었던 적도 있으시단다. 


"요즘 같으면, 늦게라도 공부시켜주는 곳이 있고, 배웠으면 되련만, 이제는 한많은 세상이 다 지나갔다. 홀로 독학하는 것은 글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글 소리만 들으면 주늑이 들었다. 애들을 할수있는한 공부시키겠다"고 다짐을 하곤 하셨단다. 그리곤 이어 말씀하신다. "그래도 나처럼 못배운 사람도 여러 사람에게 귀염받는 것을 생각할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집사님은 교회를 나올때 권사님이 앉아계신 그 자리는 나중에 제가 앉을께요, 그래도 되지요? 라면서 귓속말을 해주기도 한다. 그 정도면 되지 않나" 하신다. 나는 "그 권사님이 엄마를 닮고싶다는 말씀인가 보네, 모범이 되신다는 이야기겠지" 맞장구를 쳐준다.


엄마의 음식은 유명하다. 특별히 게장. 간장 게장은 엄마집에 가면 언제나 맛볼 수 있다. 매년 게가 나오는 철이 되면 중국, 한국 식품점을 뒤져서 게를 사모으시고, 그걸 손질하셔서 게장을 담가놓고 드신다. 게장이 있으면 그래도 밥한술 수월히 넘기신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다. 그 게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금씩 주는데, 언젠가 게장 타령을 하는 어느분에게 몇개 보냈더니, 그 부부는 "평생에 맛보고싶었던 그맛"이라며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으시고, 엄마의 입맛에 맛는 찰밥을 맛있게 해서 주셨다고 하셨다.


그 다음에 유명한 것은 엄마의 떡. 그 떡찌는 솜씨를 이어받고 싶은 일인이 바로 나다. 나도 제법 팥떡, 녹두떡 등을 만들어낸다. 계량을 하지 못하는 나의 속성상, 2번중 1번은 실패하지만, 언젠가 엄마에게 멋진 떡을 선사할 꿈을 갖고있다.


이번에 엄마집에 가서 둘이 작당을 했다. "만두를 만들어 팔자"라는 것. 엄마와 시장을 돌며 만두재료를 함께 샀다. 엄마와 함께라면, 나도 무서울 것 없다. 그런데, 병약한 엄마와 손이 서툰 내가 감당하기에 좀 벅찰만큼이 되었다. 그래서 3일간 만두를 같이 빚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친구를 만나러 하루 나갔다 오기도 하고 말이다. 엄마는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손을 놀리지 않고, 계속 만두를 빚고 계셨다. 2틀이면 끝날줄 알았던 만두빚기가 그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지는 몰랐다.


엄마와 같은 모양으로 빚으려 노력해도 잘 안되었다. 모양이 훨씬 예쁘고 정갈해보인다. 또한 빠르기는 얼마나 빠른지. 내가 1개 빚을때 엄마는 1.5개쯤 빚는 것 같다. 온갖 재료를 잘잘이 썰고, 삶고, 짜내고, 양념을 넣어 치덕치덕 했다. 엄마가 하기 힘든 일은 양념을 섞어 치덕거리는 것. 내가 힘들어했던 것은 재료를 모래알갱이처럼 잘게 썰어서 다져야 했던 것. 엄마는 만두는 자고로 입안에서 호르륵 넘어가는 수준으로 잘게 다져야한다고 하셨다.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이번에 모든 재료중에 실패했던 재료는 소고기. 간 고기로 하면 안된다고, 양지머리인가를 샀는데, 고기를 싸고있는 얇은 막이 아무리 다져도 없어지지 않아서 아주 혼났다. 양념을 다 섞어놓은 다음에 잘 다져지지 않은 고기를 골라내는 일 때문에 작업이 더디어졌다. 가는 기계에서도 막은 없어지지 않고, 서로 뭉쳐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와 나는 고기에 대해서 잘 모른다. 엄마는 평생 육고기는 입에 대지 않으셨다. 나도 엄마를 닮아 고기 종류를 좋아하지 않고, 어떤 고기를 사야 하는지, 잘 모른다. 간 고기는 품질이 좋지않다고 엄마가 주장하는 바람에 그리 되었는데, 오히려 일이 많아지고, 나중에 두고두고 힘들게 했다. 두번째는 만두 피의 문제. 이것도 엄마가 주장하는 것을 골랐는데, 피가 약간 두꺼워 맛이 없다는 후문이 있었다.


만두를 다 만들어놓고, 가족들에게 판매를 했다. 엄마는 내게 이문을 남겨주려고 그리 애쓰신 거다. 나도 가족들에게 인심을 확 쓰고 싶지만, 엄마와 "장사"의 재미를 보느라, 돈들고 오라고 했다. 그래봤자, 큰언니와 동생네 두 집에 팔았고, 내가 한보따리 가져왔으니 이문은 무진장 남은 셈이다. 엄마는 몇개를 만들었는지, 세워보고, 다시 이것을 다 팔면 얼마가 남는지 계산하느라 분주하셨다. 엄마와 나는 계산을 스무번도 넘게 했는데, 그럴때마다 웃음이 나와서 죽는줄 알았다.


엄마는 70이 가까와올 즈음, 다른 사람의 돈을 받는 "직업"이란 걸 잠시 가졌었다. 현대자동차에서 자동차 시험 테스트를 위해 캐나다 북쪽 아주 추운 지방에 가서 여러가지 시험등을 하는 프로젝트에 따라가셔서 그 팀의 밥을 책임지셨던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출장 집밥 담당자"였던 셈이다. 그때 거진 6개월 정도를 집을 떠나 그들과 함께 살며 직원들의 세끼를 책임지셨었다. 집을 떠나 그 일을 해서,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생의 학비를 충당하셨었다. 이제 그 동생이 심리상담사가 되어 제 길을 잘 열어나가고, 엄마의 집 부근에 살며 엄마를 살뜰히 살핀다. 


직장을 다닌 적은 없지만, 엄마는 한시도 놀아본 적은 없으셨다. 한국에서는 다방을 운영하시기도 하셨다. 커피를 만들어내는 주방일을 직접하셨다.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아버지의 월급으로 모든 식구가 편안히 생활하신다고 생각하신 "철없으신 양반"이셨다고 말하곤 하셨다. 그 많은 자식들의 입고 먹고 교육시키는 일이 거진 엄마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엄마를 도와준 친구들을 엄마는 잊지 못하신다. 옷집을 경영하던 친척 언니집에 가서, 돈을 꾸지 못해 몇시간이고 앉아있던 이야기는 "응답하라 88"에 나오는 스토리랑 닮았다. 옷 파는 것을 도와주다 보면 하루해가 지나가곤 했다고 하셨다. 그곳에서 돈을 얻어다가 급한 것을 막기도 했고, 친구들이 함께 계를 들어, 엄마에게 먼저 계돈을 타게 해주어 해결했던 적도 있다고 하셨다. 엄마는 살면서 "인심을 잃지말아야 한다"고 노상 강조하셨다.


엄마때에 시골집에 이층집을 지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내가 아주 어릴 때였는데, 최초의 2층집이 탄생했는데, 바로 우리집이다. 엄마는 그집 짓는 것을 진두지휘하셨고, 그 2층집에서 아버지가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하셨고, 나중에는 다방을 개업하셨다. 그후에 동네에 대로길이 만들어지면서 그집이 헐리게 되었는데, 전에 알지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층집이 있던 자리에 길을 내게 되고, 그 주변의 땅들도 길에 포함되게 되었는데, 여러 가구에게 일년에 쌀 한가마니 정도 내주었던 그땅도 포함되게 되었었단다. 우리집 땅이 조금 되었었다는 이야기. 그때 아버지는 애국이 충천하셔서, 면사무소에 무상으로 땅을 헌납하셨다는 말씀. 우리들은 땅을 치며 울다 웃다 하였다. 엄마는 그것이 너무 억울하여, 혼자 방방 뛰었지만, 아버지의 결심이 확고하여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으셨단다. 2층집을 헐고, 아래쪽에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양옥집을 지으셨는데, 밤새 지반이 깊어지고, 탄탄하라고 땅에 물을 주시면서 그집이 지어지는 내내 그곳에서 살으셨다고 하셨다. 설계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무식한 엄마에게 어떤 비범한 힘이 있었는지 지금도 가늠하지 못하겠다.


아이들이 어렸을때 큰딸에게 옷을 만들어 해입히셨다 하였다. 간단한 디자인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한두 사람이 부탁해서 한벌씩 만들어주다가 주문이 쇄도하여 재봉을 들이고 본격적으로 아이들 옷을 만드셨단다. 교복이 없던 그때에 학교의 교복이라 할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학생들의 옷을 만들어서 입히셨는데, 어느날 학교 행사에 엄마가 만들어준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고싶어 가셨는데, 아이들이 입은 옷을 보니, 주머니가 모두 떨어져 너덜거리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죽을뻔하였다고 회고하셨다. 재봉도 혼자 배운 것이라, 두번 박음질 해야 할데를 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고 말씀하셨다. 재단이란 단어도 모르면서 재단을 했고, 아이들의 주문에 따라 대충 대중소로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배분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하셨다. 그 당시만 해도 전교 1,000여명의 대형 학교였는데 한 500여명은 엄마가 지은 옷을 입었다니, 장관이었겠다. 나는 아버지가 교사여서 그 빽으로 그렇게 된것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이번에 보니, 순전히 엄마가 개척한 사업이었다. 


엄마의 자매가 4명이었는데, 엄마가 성격이 제일 억세고, 욕심이 많아서 언니들을 이겨넘겼다고 말씀하신다. 하나 있는 남동생은 집안의 귀한 보배여서 4명의 누나들과 부모가 애지중지하였는데, 그 동생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원통하고 슬프다고 하신다. 이제 엄마의 형제자매중 막내이모와 엄마만 생존해 계신다. 우리 사촌들은 요즘까지도 카톡대화를 이어갈 만큼 서로 애정이 각심하다. 부모님이 주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갑상선 암의 크기가 커졌나 조사하러 갔다. 지난번에는 보조의사가 있어서 모든 질문을 하고, 내용을 종합하더니, 이번엔 수술의가 우리를 맞는다. 수술전 엄마의 의견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가장 큰 소원은 자식들 걱정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며 "나이도 많이 들었는데,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지만, 보다 문명적인 동생은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것같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녀의 표정에서 간절히 엄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는 집요함이 보인다.


수술의는 그런 우리들의 의견을 듣고나서, 심상한 표정으로 엄마의 목을 초음파로 검사한다. 종양은 크기가 그대로란다.  "노인이기 때문에 수술을 저어한다"는 것에 대해선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겠단다. 3개월 후에 오겠느냐 해서, 6개월후에 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라 한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서도 우려할 하나의 일을 넘기고 왔다.


토론토에서는 종종 한국영화를 상영해준다. 관객이 없으면 바로 종영되는게 흠이다. 나는 호시탐탐 토론토가서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볼 계획을 가져본다. 이번에 만두후 파티로 영화관람을 같이 하기로 언니, 동생, 엄마와 이야기되었는데 그 영화가 "좋아해줘"라는 제목의 젊은이 영화다. 영화 내용이 SNS에서 일어나는 일에 기반을 두었다 한다. 엄마가 좋아하실지, 이해하실지 걱정이 되었다.


병원은 다운타운에 있어 전철을 이용한다. 그곳에 갔다와서, 기독교 서점에 엄마와 다녀오고 나니, 힘들어서 영화는 못가신단다. 좋으려고 나갔다가, 오히려 힘만 들고 실패할 확률도 높아서, 영화관람은 포기하기로 하고 집에서 엄마와 세딸이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집에는 텔레비전이 노상 틀어져있다. MBC, SBS, KBS, MBN 방송들을 편집해서 2채널에서 내보내는 한국방송이다. 나는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인데, 이번에 엄마집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정말로 텔레비전은 소음일 뿐으로, 어떤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만 골라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과의 차이도 있을테고, 텔레비전을 보는 내내, 엄마와 대화도 해야함으로, 집중이 되지 않아서 일수도 있을게다. 엄마에게 없어서는 안될 문명이 자주 방해물처럼 여겨져서 엄마가 관심이 덜해보이면 자꾸 텔레비전을 껏다. 엄마는 시간만 있으면 다시 켜고.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는 말을 아주 실감한 일주일이다. 그래도 엄마곁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텔레비전이기에 엄마앞에서는 그다지 나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텔레비전은 이제는 혼자 즐기는 시대가 되어선지도 모르겠다. 둘이상이 되면, 텔레비전보다는 다른 일들을 하는 것이 더 가치있게 느껴진다고 할까.


갑상선암 말고는 그다지 큰 질병은 없으시지만, 노쇠하셔서 이런 저런 곳이 아프시다고 하신다. 그리고 특별히 밤에 잠을 못주무시는 것을 호소하시는데, 이번에 가서보니, 첫 이틀은 잠을 설치셨고, 나머지 3일은 그래도 주무셨다. 내가 곁에 있으니 잠이 온다고 좋아하셨다. 나는 밤에 잠을 주무시기 위해 낮에 자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겠더라. 때때로 낮에도 잠을 주무시라고 말씀드렸다. 저녁에 못주무셨으니, 잠이 올때 자야될 것 같아서 말이다.


엄마와의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엄마 이야기는 매번 듣지만, 또 다 흘려보낸다. 이 글을 쓰면서 엄마의 한글깨우친 이야기는 전화를 통해 들었다. 사진도 많이 찍는다고 하고는, 몇장만 찍었다. 그나마 건질 것도 많지 않다. 나중을 기약하게 된다. 언제나 "나중"이 있기를 소망한다. 엄마와의 시간은, 마치 천진한 어린아이와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몽실몽실한 느낌으로 남는다. 되돌아 생각하면 젖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엄마가 귀염받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하나마나한 걱정"을 하면서 오늘도 엄마는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소식을 잘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른 자식에게 전화가 오면 다시 전해주신다. 여자 한월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아참, 그녀의 최종학력은 노인대학 졸업이다. 그리고 영어학교 수강까지. 그러니 무학자라는 딱지는 벗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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