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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왜냐면

글로 엮어내지 않고, 마음속에서 글을 떠내보내는 날들이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다. 글쓰는 공간을 잊어버린 날들도 많았지만, 추억의 한페이지처럼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언젠간 그 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비밀글방을 하나 열어서 부담없이 한번 달려볼까도 생각했었다. 다른 아이디를 만들고, 다른 주제로 말이다.


나는 많이 아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누기 힘든 그런 마음의 병이었고 나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데, 그걸 열어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열어보이지 않는한 글쓰는 일을 다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다. 모두다 아픔들을 가지고 있지만 나의 아픔이 가장 크다고 꾀병을 하고 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의 크기를 나는 모르니까. 지금은 조금은 엷어진 나의 아픔은, 막내의 아픔때문이었다.


나의 인생 사전에, 우리 가정의 인생 사전에 없던 단어가 불쑥 들어와 지금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단어가 되었다. "우울증".


막내가 대학으로 떠난 뒤 둘만의 인생후반전이 찾아온줄 알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름 왕성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때 막내는 심각한 질병에 걸려있었다. 고등학교 말기부터 시작되었던 우울증이 대학을 들어가면서 더 심각해져 가는 것을 우리는 전연 몰랐다. 집을 떠난 대학생활은 언니들이 이미 거쳐온 길이라 잘 알아서 헤쳐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토론토대학교 사회학과를 들어가, 우리들의 어깨를 세워주었던 것도 잠시, 학과와 학교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해서 1년을 마치고 원하던 미술대학으로 재입학을 하였다. 백번 양보해서 별다른 잔소리없이 미대로 옮겨주었으니 부모 노릇을 잘하는 것이라 자위했었다. 


미대에 들어가서 2년간 병은 더욱 깊어만 갔다. 2년을 마치고나니 더이상 대학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이 아이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구나 느끼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의논을 하기보다는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 것 같기는 하다. 문제가 심각할 때 원인을 모르고, 아이가 변해가는 모습에 제자리를 찾게하려고, 여러가지 잔소리를 했었다. 밖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무책임성, 자기안에 빠져있고, 게으름, 정리정돈의 문제 등등이 있었다. 제방에 틀어박혀 안나오기도 하고, 수시로 식사도 거르고. 나와 대화를 하지 않는등. 


2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려할 때쯤, 가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상태로 다시 보낼 수는 없다고. 본인은 부모의 감시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학습능력도, 생활능력도 바닥을 보이는 아이를 다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아이는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차츰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느낄때쯤 이미 여러가지 문제로 우리와 다투었던 그애는 더이상 부모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모와의 사이에 철벽방어를 치기 시작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우리에게 적대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세상이 온통 흑색이었다. 학교로 복귀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지냈던 2016년 여름부터 적대적인 관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내 딸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곁을 주지도 않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속시원히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때부터 상담을 시작했다. "mental" 상담이 시작된 것이다. 그 마음의 병이 어느정도인지 진단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나름대로는 파트타임 잡도 잡아서 일하기도 했는데, 새벽부터 시작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데려다주는 일을 6개월 정도 했고, 또 3달 정도 풀타임 잡을 잡기도 하였다. 방사선복을 만드는 옷공장이었는데,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서 해고를 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가정의를 한인으로 바꿨다. 이 아이를 제발 고쳐주십시오, 그 아이가 듣지않게 의사에게 부탁했다. 가정의로부터 시작된 정신과의사를 만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또 흘렀다. 백인 정신과 의사를 처음 만나게 된날, 아이는 의사에게 들어가고 옆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던 젊은 여성이 나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치료받으면 된다. 본인도 우울증이었는데, 이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며 몇가지 정보를 종이에 적어주었다. 


그때쯤부터 나도 우울증에 대하여 알아보기 시작했다. 2017년 10월쯤 드디어 한인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신과 상담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아이의 병명은 우울증과 성인 ADHD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젠가 성인 ADHD를 다룬 다큐물을 시청한 적이 있다. 그것을 보니, 아이는 남들과 다른 뇌구조를 가지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제대로 못하느냐, 닥달하기만 했었던 우리를 반성하며, 옆에서 일거수 일투족 감시하는 경찰처럼 아이를 대해왔던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와 상담을 다니면서, 많이 관계가 부드러워져가는 중이었다. 


아이에게 잠시 와달라고 "공손하게" 부탁을 했다. 그전에는 "이야기좀 하자" 하면 언제나 몇마디 하지 않아서, 결렬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대화좀 하자" 하면 이미 마음문을 닫아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아이 아빠는 꽃다발을 사왔다. 그리고 성인ADHD에 대한 다큐물을 본 내용을 말하며, 너를 전적으로 오해했던 것에 대해서 너무 미안하게 생각한다. 왜 다른 사람과 다르냐고, 너를 닥달했던 것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너를 너무 사랑한다. 곁에서 돕겠다, 무엇을 하라고, 하지말라고 하지 않겠다, 그런 요지였다. 화해의 꽃다발을 주었다. 아이는 "나도 잘못한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라면서 우리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그간의 대체적인 경과다. 내가 긴 터널을 걷고있었던 거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다. 아이와 내가 베스트 프랜드가 될수있었던 그 시간들이 소중하다. 딸이 아니라, 한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캐네디언 동양인으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어린 숙녀와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가려면 2시간 30여분 차를 타고 가야 한다. 가는 동안 그리고 오는 동안, 또 많은 외식과 쇼핑까지 그 어린 숙녀와 나는 온전히 서로에게 의지하며 집중한다. 갈때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그 아이를 보면서 천천히 나의 마음도 풀어져갔다. 어린 숙녀는 자신의 아픔에 대해선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문가와의 상담으로 해결하는 듯싶다. 어떤때는 왜 더 깊은 이야기를 나와 하려고 하지않나 싶기도 하지만, 그건 그 숙녀의 결정사항, 나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