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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38년전 7박에 1박을 보태다.. 모국방문(3)

첫 모습?


한 친구는 16년전에 얼굴을 봤다. 또한 친구는 38년전이라고 누군가 말해줬다. 두 친구와 일단 먼저 만났다. 흔히 말하는 남자사람 친구들이다. 대학2학년때 7명의 친구가 제주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3명의 여자와 4명의 남자. 그중 2명의 남자였다. 제주 7박 여행은 거지꼴로 다녔고,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여행이었다. 사자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이던 친구 B는 올백으로 뒤로 머리를 넘겼다. 롱다리로 비척거리듯 걷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다. 한 친구는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는데, 머리가 성글어지고 있다. 고등학교 선생님 Y. 느긋하고, 능글하고, 푸근하다. 둘이 일찍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면서 나보고 식사했냐고 묻는다. 파마를 하느라, 점심은 건너뛰었다.


양평 휴양림에서 필요한 것을 사야한다면서 다시 홈플러스를 들어갔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간곳이 홈플러스인 것 같다. 없는 게 없는 그곳을 좋아한다. 캐나다에도 10여년전부터 한국의 마켓문화가 들어왔다. 한곳에서 쇼핑하고, 식사도 하면서, 문화행사까지 할 수 있다. 


내 점심용으로  그곳에서 파는 떡볶이와 오뎅을 사준다. 떡볶이는 또한 한국에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든지, 배가 고플때 눈에 띄면 이것을 먹었다. 길거리 떡볶이는 내가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넘버1 리스트이기도 했다. 다음에 방문하면, 떡볶이를 정복했으니 다른 음식에 도전하겠다. 아직도 최고의 떡볶이는 먹어보지 못한 듯하기도 하다. 즉석떡볶이를 먹었어야 하는데.. 당면사리가 들어간 매콤한 그맛이 그립다.


친구들이 나를 처음 본 소감은 "괜찮다"라는 평이었다. 너희들을 위해 오늘 아침 파마까지 하고 왔다고 했더니, 그것 때문만도 아니고, 무언가 꽤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 사실 16년전에 왔을때 꽤 몸집이 불었었다. 아마도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으리라 믿는다. 작년 둘째 결혼시키면서 신부엄마 역할을 잘하기 위해 몸관리좀 했다. 걷고, 식단조절하고, 스쿼트하고 그것이 지난 1년여 동안 내가 지속했던 일인데 이게 생각외로 큰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찍고싶지 않았던 사진찍기를 이번 한국방문에선 즐기기까지 했다. 60% 이상은 좋은 걸 건졌다.  특별히 나래의 최신폰에서는 얼굴까지도 하얗게 나오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물사진은 뽀샵을 통해서건, 조명을 통해서건, 필터 효과를 이용해서건  무조건 잘나와야 건강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약간 잘못된 환상을 갖더라도, 잘나온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붙는다. 어떻게 찍어도 화보가 되는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중년의 소소한 행복은 실물보다 나은 사진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유치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니, 내 나이에 맞는 폼을 부리지 않아도 즐거웠다. 친구들도 20대 초반의 딱 그 수준으로 생각된다. "웃기는 짜장면"을 처음 퍼뜨린 것이 아닌가 하는 친구 B는 여전히 "웃기는 짜장면"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고, 말마다 웃게 만드는 그애는 꼭 저다운 직업, 카피라이터와 홍보를 하고있다고 했다.


휴양림에는 어두워져서 도착했다. 가는 길에 남자애들 전화목록에 남성이름으로 저장된 여자 동기 H를 태우고 갔다. 그녀는 제주도에 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16년전에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양산을 쓰고 나타났었다.  이번에는 내가 "웃기는 짜장면"이 되어 16년만에 나타났다. 여자동기와의 1박에 불려나온 H를 처음봤을 때 몰라볼뻔 했다. 체격은 그대로인데, 인상이 변했다. 그녀도 내가 달라졌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몇마디 나누니, 어색함이 가신다. 여전히 사려깊고 고느넉하다. 


휴양림에서 먹을 음식은 남자친구들이 챙겨왔다. 찌개거리는 식당에서 끓여먹을 수 있도록만 해달라고 주문해서 가져온 것은 좋았는데, 쌀도 없고, 먹을 생수도 없다. 늦게 들어오는 C에게 들어오면서 사오라고 문자폭탄을 보내니 C가 씩씩거리며 들어온다.


양평에 모두 모인 시각은 저녁이 꽤 깊을 때였다. 숙소를 예약하기도 하고, 만나자마자 너무 반가워한 제주여행 동료였던 C는 곱게 나이든 축이었다고 보면 되려나. 제주여행에서도 궂은 일을 맡아했던 그는 감기가 콱 걸려 불편해 보였다. 부인을 동반하고 나타나겠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아내가 아파서 할수없이 혼자왔다고 했다. 우리가 모인 날은 부인의 생일이어서, 함께 오려고 했다는데. 생일잔치는 그전날 잘 치렀다고 하기도 했다. 가만히 보니, 모두 가정이 있는 가장들로서 멀리서 나타난 여자동기와의 1박 여행을 집에서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모두 약간의 "구라"를 치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보지않을 수 없었던 친구들이었다.


그날 알게된 새로운 사실이 몇개가 있다. 젊은날의 짝사랑, 혹은 첫사랑이야기. 그 주인공들은 내가 아는 친구들. 38년전 우리들은 그런 사랑의 열병들을 앓았었다. 그리고 과 MT는 지도교수에게는 당일여행이라고 보고하고, 1박을 계획했었단다. 그때만 해도 전두환 정권때 집회가 자유롭지 않았던 때였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오지 못했던 여학생들을 위해 조교로 있던 복학생 형이 부모님에게 교수도 함께 하는 안전한  1박 여행이라고 전화하는 소리를 지도교수가 들어버렸다. 교수는 약속대로 모두 돌아가야 한다고 했고, 그럴 수는 없다고 그때 과대표를 맡았던 C가 막아서, 그날 교수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단다. 나는 다 잊어버렸는데, 교수가 몇몇 여학생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갔는데 그중에 H도 끼어있었단다. 군대를 갔다와서 그 교수 강의를 나중에 들은 B는 교수에게서  "왜 그때 1박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그렇게 말렸던지, 조금 후회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래도 남자아이들은 결혼할때 주례도 부탁하고 했다고 하니, 교수와 학생간에 오해들은 "시대탓"으로 서로 풀었던가 보았다.


과 친구들과 하지말라는 1박을 하고 싶어했던 젊은날의 우리들이 있었다. 부모 허락을 맡아야만 하룻밤 외박할 수 있었던 요조숙녀들이 우리 과에는 있었다. 물론 나는 아니다.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나가는 자식을 지닌 중년이 되어 만난 우리들의 대화가 조금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자기안에 있는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였다. 나는 이 여행 내내, 말의 물꼬를 트는데, "나의 아이"를 언급했다. "내 이야기"여야 하는데, 나의 이야기보다 더 드라마틱한, 나를 강하게 흔든 "내 아이의 아픔"은 모두들 자신을 드러내보이는데 인색하지 않은 물꼬가 됐다. 


메생이 황태국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공수해온 B는 메생이 황태국에 대한 찬사가 기대만큼 터지지 않자, 좀 서운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음식보다도 더 맛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나 역시도 음식은 어떤 맛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새벽 2시가 넘어서까지 서로의 아픈손(자식 혹은 부모) 이야기들을 했다. 휴양림 역시 온돌방이 거실과 방에 골고루 들어가 있어,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장소 예약자 C는 어느 곳에 가면, 나이가 많아 받아주지 않는데도 있고, 편하게 긴시간 이야기를 나눌 장소가 마땅치 않아 예약했다고 설명했다. 38년전 제주도 7박에 이은 양평1박이 보태지는 참이다. C는 임무를 완수한 것이 기쁜지, 술몇잔에 혀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거실 뒤편에서 잠이 들었다. 


2시 이후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H와 나는 방에서 자기로 했다. 그녀와 마치 대화를 처음 시작하듯 말문이 터졌다. 잠자러 들어가서 거진 5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C는 그 담날 일어나서는 "어제 정말 좋았다"고 연거푸 말해서 우리를 웃겼다. "기분좋게 술 몇잔 마시고, 곯아떨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란다.


다음날, 종로에서 세미나가 있다는 H를 따라서 먼저 나왔다. 나 역시도 호주 친구 S를 만나 순천을 가야한다. 서울역에서 12시 만나기로 했으니, 조금 일찍 도착할 예정이다.


그녀와는 30여년만이다. 나 홀로 이민의 삶을 사는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 되니 내가 나오고나서 몇년후에 뉴질랜드로 떠나왔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수소문해줬다. 처음에는 이메일이 왔었고, 카톡이 생기고부터는 카톡대화를 했다. 문자 메세지가 대세인 카톡인데, S와는 처음부터 음성통화를 했다. 그때는 써클이라고 불렀다. 문학동아리에는 같은 학번 여자 동기가 S와 나뿐이었다. 대신 남자 동기들은 꽤 많았다. 


그녀는 아주 조그마했다. 그애 옆에 서면 내가 거인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목소리도 조용조용하고, 미소도 그렇고 나와는 조금 달랐다. 서울역에 내려 그 주변의 거대함에 놀라면서 중소기업 제품들을 전시해놓은 가게등, 어디나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천지로 널렸다. 내가 일찍 도착해서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저멀리  두리번거리는 그녀가 보인다. 조금 커보이는 긴 자켓을 입은 아주 작은 그녀가. 예전과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유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