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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환경주의자가 된 그녀석..모국방문 (4)




총알처럼 빠르다고 했던가? 말로만 듣던 KTX 기차를 탔다. 순천까지 가는 무궁화호였다. 한국에 있던 S가 그의 언니에게 부탁해서 내가 오기전 예매해놓은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촌에서 온 아줌마 두명이 긴 여행길에 나선다. 친구는 여전히 소근소근 정말 조용히 말한다. 아줌마에서 아주머니가 된지 한참 된 사람치고는 함량미달이다. 미소짓는 것까지도 20대 초반 그때를 닮았다. 


S는 기억의 저편에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빠져있는듯 싶었다. 이과 계열 학생으로 문과 아이들이 많은 문학동아리에서 그녀만큼 문학에 천착한 이도 드물었다. 졸업과 함께 모두가 제갈길로 뿔뿔이 헤어졌고, 그녀와 나는 한국을 떠나오기까지 했으나, 그시절을 그리는 마음은 그녀에게 따라올 자가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순천 방문은 그 근방에 새 보금자리를 만든, 문학동아리의 동기집을 방문하기로 해서였다. 나는 그녀석과 이민후 첫 만남이지만, S는 그간 두어차례 만난 듯싶었다. 


"그녀석"은 "그녀석"이라 부르기로 하자. 젊은 시절 어쩌면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녀석이다. 캐나다에 돌아와서 "그녀석"에 대해 아이들에게 말하니, "히피"라며, "엄마에게 히피 친구가 있다"고 놀라워한다. 내가 그녀석에 대해 제대로 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도 하나,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친구이긴 하다.


기차가 순천에 도착할 즈음해서, S가 가방속에서 삼성패드를 꺼낸다. 여행내내 간간이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것은 그 패드에서 흘러나온 전화기 소리였다. "그녀석"이 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나와 방문한다고 말해놓고는 연락을 하지 않아서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중에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하는 전화였다고 했다. 몇번 전화했지만, 받는 사람이 없어서 이제 막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단다. 그는 전화는 있지만, 카톡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는 전화 사용이 좀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석이 사는 곳은 순천도 아니고, 1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이었으니, 마중 나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면 꽤 열이 날수도 있는 상황이었겠다.


그녀석의 첫인상은 "조금 메말라보이고, 더 도전적이고, 약간은 화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카락은 회색이 반반 섞여있고, 수분을 발라주지 않았을 피부는 좀 까칠해 보였다. 젊은날의 팽팽했던 모습은 없어졌지만, 자신감은 그때 이상인 것같았다. 


언제 올지 모르고 기다려서인지, 얼굴빛이 경직되어 보여 혹 화가 난것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서울까지 오기 힘들테니, 어차피 우리야 한국을 귀경중인 여행객이니 여행중에 잠시 틈을 내서 얼굴볼 수 있을까, 그렇게 운을 떼봤던 S에게 자신이 살고있는 곳에 오는 것은 환영이라 했다고 전해들었다. 나는 S를 중간에 두고, "그녀석"과의 해후 일정에 "우리 한번 흔들어보고, 흔들려보자" 하면서 여행계획을 같이 나눴다. 근방에서 묵을 생각을 하고, 만날 생각을 했는데, 그런 S의 계획에 "거의 욕할 정도로, 집에 방이 많은데, 다른 데서 왜 자냐?"는 타박을 들었다고 했다. 어쨋든 순천과 그가 살고있는 시골 여행계획이 그렇게 해서 세워졌고, 나는 방문 이틀째 순천땅에 내렸다.


순천만 습지로 가는 길에 우리를 사진에 담아주기도 했지만, 본인은 사진에 담기기를 원하지 않아했다.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다. 한가지 더 이유가 있다면, 우리들이 남자동기가 아니어서 였을 수도 있다. "그녀석"의 아내는 우리도 아는 문학동아리 후배이다. 마침, 그녀는 집을 비우고 있어서, 우리 셋의 동기모임이 될 예정이었다.


오른쪽 상단에 있는 까만 것, 카메라가 뭔가 말을 안듣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카메라와 씨름하다가 많은 순간을 담지 못했다.

순천만은 갈대가 끝없이 펼쳐진 습지대였다. 이제 "그녀석"을 "그"로 지칭하기로 하자. 조금 친해졌으니 말이다. 그는 갈대보다는 갈대가 있는 펄에 있는 작은 게 이야기를 했다. 게들의 집이 그곳에 아주 많다는 것이다. 갈대는 솟아서 보이지만, 게가 많은지는 아는 사람만 알 일이었다. 그가 "게" 이야기를 하니, 나는 최근에 읽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그 책의 주인공이 살고있을 만한, 습지였고 바다 냄새가 났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꽤 멀었다. S는 약간씩 숨차하는 게 보인다. 갈대밭에 사람이 다닐 수 있게 긴 나무다리를 조성했다. 갈대밭에 세워진 긴 나뭇길은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산책로로 기억될 거 같다. 


산등성이가 몇겹으로 포개져 있는 순천만의 아름다움을 머리속에 많이 담지는 못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낙조를 볼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삼각대를 세워놓고, 해가 넘어가는 순간을 찍으려 대기하고 있다. 서로 나누는 대화로 짐작하니, 사진클럽에서도 많이 나온 것 같았다. 그는 그안에 내가 끼어들게 주선하고는  S와 뒤로 물러서있다. 카메라를 메고다니는 내가 꽤나 폼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는 언제나 어떤 메세지를 보낸다. 이날은 50mm 단렌즈 하나를 장착하고 나왔는데, 낙조는 더구나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포커스가 안잡힌다. 해가 넘어갈 때까지 꽤 긴 시간이 흐르고, 넘어가는 순간 다른 사람처럼 셔터를 누르기는 했는데, 망작이라는 짐작이 이미 들었었다. 사진찍기를 포기했다면, 조금 더 아름다운 낙조의 풍경을 마음속에 간직 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쨋든 그는 나를 위해 뒤에서 기다려주었다. 


가는 길에 시장을 봐야한다고 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월남쌈이라면서. 거의 날라다니듯이 물건을 고른다. 그의 집까지 가는 길이 가깝지 않다. 터널도 몇개인가를 지났고, 직선도로가 아닌 구비구비 휘도는 길이다. 그는 아주 최근에서야 차를 구입했다고 했다. 차가 없이는 살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구입했지만, 차를 사랑해주진 않고 있노라 말했다. 그의 차는 뒷좌석에 사람이 탈수 있는 트럭이었다. 


나중에 이야기하면서 알게 됐지만 그는 철저한 "환경주의자"가 되어있었다. "운동권"을 10여년 한후에 그와 작별했다고 했다. 나와 같은 과에 다녔는데, 내 과 동기중에서도 그를 모르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제대로 수업을 들어온 적이 없었으므로. 그래도 2년간은 수업료도 갖다바치며 학교에 적을 두었었는데, 군대를 갔다오고 난뒤(아마도 짧게 끝나는 병역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해 수업료는 삥땅쳐서 공장에 취직해서 우리를 떠났었다.



그는 2년간 대학에 적을 두었던 것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정식 교사는 아니지만, 대안학교 강사 등은 충분히 할 수 있었으므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많이 배우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더 대단한 지식인은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자신감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선생이었을 것이라고. 그가 두루 섭렵한 사회과학 서적과, 최근에 관심갖게된 환경과, 그의 내면에 저장된 시적인 문학적 소양까지.. 그의 주장이 괜한 오만함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차로 돌아가자.  산속에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차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두번째 생계수단이었던 "노가다"에 다니면서 집짓는 기술을 익히게 됐단다. 그래서 택지를 구입할 기회가 생겼을때 망서리지 않고 구입했고 그 땅에 자신의 부인이 설계한 대로 집을 지었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환경친화적으로 만들었겠다. 그러나 보기에는 현대적인 전원주택이었다. 그런 집을 지은 친구가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거실에는 나무난로가 있었다. 가족만 있을 때는 거실 온돌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지만, 방문객이 오면 거실온돌에 불을 지핀다고 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녹지 않았다. 온돌이 따뜻해지면서 내 마음도 녹기 시작했다.


친구가 살아온 삶은 그야말로 잘 쓰여진, "이 남자가 사는법"에 나올만한 흥미를 유발했다. 과외 한번 시키지 않은 막내딸은 꽤 좋은 학교를 장학생으로 다녔고, 지금은 괴짜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되어서,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온순온순하게 모범생으로 살지 않아도, 이 정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칭찬이 있었다.


그가 만든 월남쌈은 맛있었다. 오리고기와 새우, 그리고 야채들이었던가? 그가 내온 야채중 속배추가 아주 맛이 달고 시원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농사짓고, 지금 방금 뜯어온 것이라 하였다. 그 다음날 그의 밭을 나가보니, 배추, 마늘, 파 등이 자라고 있고, 온 가족이 먹고 나눠줄 정도의 고추와 배추등을 매년 재배한다고 했다. 산속에 있어, 해지는 모습과 해뜨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는 집돌이가 되어,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농사지을 때 즐겁다고 했다. 환경에 치명적인 비행기를 자신이 탈 이유는 거의 없을 것이라니, 보고싶으면 한국에 오라는 말로 들렸다.


그는 크게 할말이 없어 더듬거리는 내게 "넌 정말로 좋은 애다. 그런데 깊게 생각해라. 그리고 네 이야기를 해라. 네 자식, 네 주변이 아닌 네 이야기를." 하고 말해서 나를 울렸다. 나도 모른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는. 그저 나를 알던 내 친구가 "너 가벼워, 조금 무게를 주어야 해" 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나? 


만나자 마자, "야 우리 반말하자"며 내게 악수를 내밀때부터 그는 도전이 되는 사람이었다. 선배들에게도 고분하지 않았고, 교수들에게 존경을 바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성을 쌓고, 행복을 제조해나가고 있다. 쌈꾼이었던 삶이 조금은 진정된듯 보인다. 무던히도 부모속을 썩히든 "망나니" 아들이었음이 분명했는데, 부모님과 잘 지내는 듯 보였다. 나는 그가 사회부적응자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 같은데, 그는 나를 걱정했다. 나에게선 "종교" 냄새가 너무 난다고 했다. 아마도 "사랑"을 말해서 그런가 싶다.


그와 나는 다른 길을 걸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날은 친구가 만든 집, 손님들이 많이 머물다 갔을 책들이 많이 있는 방에서 S와 잤다. 그담날, 남쪽 바닷가를 구경시켜 주었다. 톳이 바위에 붙어있는 곳, 파래들이 물과 같이 노니는 곳, 따개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바닷가를 갔다가, 시장 근처를 지날때 양파자루 같은 데에 껍질째 굴이 한포대씩 쌓여있는 모습에 신기해했더니, 바로 내려 그 포대를 산다. 구워주겠다고 한다. 


그는 나름 대로 친구들을 위해 계획을 단단히 세웠다. 운전하기 싫어한다는 차에 두동기를 태우고 가파른 산길을 구비구비 도는데,  급경사가 많아서인지,  S는 그후부터 안색이 별로 안좋다. 며칠전 가슴쪽에 담이 왔었는데 다시 도지는 것 같단다.


그날은 메생이를 넣은 떡국과 굴구이를 먹었다. 또한 굴을 까서 떡국에 넣기도 하였다. 두 끼니를 그가 해준 음식을 앉아서 받아먹었고, 설겆이조차 하지 말라고 해서 그 전날 남은 음식도 상에 있기도 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남은 음식 처리방법이 있을 듯싶기도 하다. 무조건 남은 음식 랩에 싸서 냉장고에 보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보통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환경주의자가 된 친구네 옆집은 그야말로 "자연인"에 나올만한 사람이 산다고 알려준다. 자신은 자연인은 아니라면서. 다음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다. 나에겐 아직도 그의 연락처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는 옛친구에 대한 책임감으로 우리를 만났던 건 아닐까? 그런 이야기를 S와 했다. 그것은 그를 깍아내리려는 우리의 음모일 수도 있다. 


나는 조금 흔들렸는데, 그는 흔들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