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2주간의 휴가가 끝났다.
영악한 두뇌로 님도보고 뽕도 따려고 여름들어서면서부터 머리를 많이 굴려서, 얻어낸 휴가였다.
그래서 둘째의 한글공부 도와줘야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나는 덤으로 옆에서 놀게 됐다.
첫 일주일은 참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동안 하고싶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것을 중심으로 훑어나갔으나, 사실은 그런 것들은
이차적인 것이지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누가 나를 오라고 손짓하는 것도 아니니, 밀렸던 쇼핑과, 큰언니와 엄마와 노는 것으로 일주일을 채웠다.
생각해보니, 시간이 많이 남지도 않아서, 용기를 내서 전화를 하니 모두 반갑게 맞아줘서 그들을 만나면서 휴가의 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세상은 역시나 “쓴 바다(고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지않은 나이에 벌써 세상이 먼지같음을 느낀 친구는 그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 자식들을 그렇게 기르는
일”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을 떠나보내고 그 충격으로 엄마까지 보낸 그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눈물이 나왔다.
인생이 그렇게 보잘것없는데, 우리의 삶은 또 왜 이리 무거운가!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을 또 한 친구를 만나면서 느꼈다.
7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머리스타일은 그대로여서 마치 며칠전에 만난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을 좋아하고, 살림을 좋아하는
그는, 사주팔자 신봉자이기도 한데, 역시나 사주에 좋지않은 곳에서 장사를 해서 그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푸념했다.
책에 등한했던 나에 비해 최근의 도서들을 꿰고 있는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니, 문학을 전공했으나 직무유기했던 것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살면서 낡아버린 옛 영광을 그 친구라도 기억해주니, 굼뜬 언어로라도 소감을 나눴다. 이름도 모르는 많은 작가들. 더 처지지 않게 열심히 읽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조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아마도 더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을게다.
또한곳, 옛교회를 방문했다. 일요일 대예배를 보면 좋으련만, 일요일에는 집에 와야 하니, 수요 밤예배에 참석했다. 내가 떠날적에 그 교회의 목사님의 비전세미나에 참석했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이렇지만, 20년후에는 어떤 모양일까를 상정하고, 그에 맞추어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여러분도 여러분 가정의 20년후 비전을 준비하십시오", 해서 토론토를 떠나는 나에게 희망의 메세지로 들리기도 했다.
그 당시 교회는 다운타운에 있어서 건물만 있을뿐 주차장이 없어서 매주일이면 도로에 주차하느라, 애를써야 했다. 교회 바깥에 있는 큰 식품점 주차장을 이용하기도 하고, 공공주차장에 차를 대고 멀리 걸어서 와야 했다.
그때 듣기로는 목사님의 비전이 너무 멀고 대단해서, 가능성이 희박해보였는데, 이번에 새로 지은 교회를 가니, 비전 10년이 채 안돼 거의 절반 가량이 이뤄진 것을 발견했다.
"주님 아름다운 성전에서 대대로 영광받으소서,, "(정확하진 않으나)라는 표어가 적절하게 보이는 그런 훌륭한 건물이었다.
아직 대예배당은 지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빈터를 보여줬는데, 소예배실도 6백여명이 앉을 수 있는 작지않은 규모였다.
그날은 그 교회의 “촌”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는데, 친구 따라서 나도 같이 참석해서 교회성장의 비밀을 나눠가질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랑과, 적극성이 아닐까?
온 교인이 단단한 믿음의 기반으로 서있는 것을 목격한 것 같았다.
큰 교회를 짓고 시험에 드는 교회가 많아서 여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데, 나의 옛교회는 그런데서 초연, 잘 성장했으면 좋겠다.
내가 노래를 부르다시피하는 “나 하나만을 위한 대접”을 또 달리 받았다.
아이가 한글학교가고 남은 시간에 방문한 이 선생님의 집에선 나홀로 영광을 다 받고 돌아왔다.
그래도 됐을까?
남편 대신에, 아이들 대신에 많이 먹는다며 이선생님 부인이 차려준 5가지 풀코스를 섭렵했다. 우리의 중매자 이선생님 댁에서의
일이다.
이선생님은 “꽃들이 얼마나 목이 마른데..”하시며 설겆이하고 남은 물을 받아서 꽃에다가 퍼다주고 있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랑많은 시인 다운 일이다, 하면서 감동한다.
점심을 준비하는 당신의 부인께, 수박을 한쪽씩 포크에 찍어서 날라다 먹여주시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선생님이 떠난 후 “집에서 많이
도와주시죠?”했더니, 너무 쫓아다니면서 필요없는 것까지 챙겨서 어떤땐 서로 엉덩이가 부딪친다고 말하시며 웃으신다.
30여년간 한집에서 살아오신 두분은 이제 아이들이 모두 출가해, 작은집으로 옮기실까 생각중이라신다.
집을 나오는데 두분이 가꾼 아름다운 화단이 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무슨 일이 있었나?
엄마의 집에서는 다른 일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와 엄마와 둘째 루미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새롭다.
거의 한국산인 엄마,
케네디언반, 한국인인 나,
거의 케네디언인 나의 딸,
이렇게 모녀 3세대가 한자리에 모여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품평회를 한다.
거실에 이불을 펴고, 앉거나 누워서 서로의 다리를 비비며 드라마 “환생”을 봤는데, 둘째는 의사인 남자주인공에게 자꾸 달라드는 여자주인공이 너무 “바보”같다고 아우성이다.
루미의 한글공부가 그런대로 성공적이어서 간단한 말들은 한국말로 하려고 애쓴다. 한글학교에서 친구도 사귀고, 어린 동생들이 둘째에게 누나, 언니 하면서 따르니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면서, 내년에도 다시 공부할 것같다고 귀뜸했다.
늙으셔서 다리가 많이 아프신 엄마는,
나와 달콤히 잘 지내시다가도, 다른 자식에게 전화가 오면 아픈 다리와 많은 일거리를 하소연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리더니, 그건 관심을 바라는 엄마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라도 더 해먹이시려고 애쓰신 엄마가 귀엽게 느껴질때도 있었지만, 살림을 어설프게 한다고 혼구멍을 내시기도 하니, 아직 엄마의 권위가 팽팽하니 감사한 마음이다.
한인촌 한바퀴 둘러보면서 기웃거리기, 피씨방에 가서 인터넷도 하고, 책도 고르고..
그러다보니, 예전에 우리가 했던 도서대여점이 그간
많이 생겼다. 책과 함께 컴퓨터도 할수 있고, 만화도 보고, 비디오까지 보여주는 멀티 미디어 시스템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도서가, 그 가치가 하락된 것같은 느낌도 있지만, 문화는 저들끼리 그렇게 퍼져가야 하나 보다 하고 생각한다. 나도 회원에 가입하고 책을 빌려왔다.
인종전시관이라 불리는 토론토는 길거리에도, 가게에도 백인보다는 각색 인종들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어색한 발음으로도 당당하게 경제전선을 일구고 있는 토론토의 사람들이 조금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한글학교 끝내고, 큰형부의 생일파티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넘어간다. 그때부터 오늘 이시간까지 정신이 없었다. 집안일에, 가게일에..
이렇게 바쁜 일상에서 2주간 나를 빼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다시 한번 허리를 길게 늘이고 낮잠을 자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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