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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 루미 미리.

The best family member of the year

집에서 내가 매일 신고사는 보라색의 슬리퍼가 있다. 어떤때는 슬리퍼 바람으로
가게까지 내려가, 물건들을 날라오기도 한다. 슬리퍼가 없으면, 영 허전한 것이,
겨울이 되고서부터는 한발짝도 슬리퍼없이 움직이기가 싫다.
아이들이 목욕하고 나서 흥건해진 목욕탕에 슬리퍼 바람으로 들어가면,
큰 문제가 없고, 바닥에 흘린 물과, 음료수, 과자 부스러기(이런게 유난히 많다 우리집은)들도 슬리퍼가 있으면,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된다.
대신 그 슬리퍼를 벗고 맨양말로 있다가 발바닥 봉변을 당하면, 잠시 기분이 상한다.
어쨋든 그렇게 끌고다니다 보니, 이게 거진 생명이 다됐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밑창이 자주 바닥에 끌리는 중간 부분이 다 닳아서 없어지고,
안에서는 솜이 삐져나오고 있다.
그를 보고, “참 다른 것도 아니고, 이 값싼 것 누가 선물해주면 내 마음에 얼마나 기쁠까?”그런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주고받는 것도 많은데, 내 몫으로 돌아오는 선물중에
내 마음을 알아채고 작지만 큰 선물을 할 사람이 없나 잠시 허망한 생각에 빠져본 것이다.
아이들이 다 잠들기 시작하고, 오늘 배가 아파 하루종일 음식을 안먹은 남편의 배를 쓸어주고 있는데, 둘째가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엄마, 슬리퍼 필요하면 말해요. 월마트가면 슬리퍼가 값이 싸던데..”하고 말한다.

.............

감기기운의 여파로 등뼈있는 데가 자꾸 아파왔다. 갑자기 들어눕다가 나도 모르게
“아~아~ 아 악!”하는 큰 비명이 나왔다. 한걸음에 두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달려온 녀석은 또 둘째였다. 청소며 설겆이며 제가 맡겠다며 나를 들입다 침대에 밀어넣는 것도 그 작은 애였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둘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 가족들 선물을 샀다. 밖으로 쇼핑하러 가지 못해서, 비록 우리 가게에서 산 물건이지만, 모두 제 돈으로 지불했다.
친구들에게는 캔디케인 사탕과, 호루라기, 어떤 아이에게는 캔디케인과 스티커, 일일이 이름을 써붙이고 학교방학하는 날 가지고 갔다.
작은 선물이라며 친구들에게 주었더니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아빠는 일을 많이 하는데,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나에게 자문을 구한다.
얼떨결에 “아빠가 좋아하는 것은 가족”이니까 가족이 들어있는 사진액자를 주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 애가 찍은 가족사진 필름이 있다. 지난 여름부터 내가 보관하다 잊고있던 필름을 그래서
급하게 현상하게 되었다.
우리의 결혼기념일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은 못쓰게 나왔고, 괜찮은 것이 나 혼자 찍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그래도 아빠가 최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엄마 사진을 떡 넣어서 선물하기도 했다.

4학년에 올라와서 반대표를 뽑는 선거가 있었다.
그 전날, 자신이 뽑힐지도 모르겠다고 흥분하더니, 선거가 끝나고 얼굴이 발그래해져서 돌아왔다.
반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저도 제 이름을 써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선생님이 그래도 된다고 했다며 변명하면서. 그날부터 올라간 내 어깨는 오늘까지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성적표 마지막, 선생의 코멘트에도 “다른 학생들의 롤모델”이 된다는 문구. 학생들에게 인기없기로 소문난 꼬랑지머리 남자 담임선생을 대하는 나의 어깨가 또 한번 올라간다.

그애는 또한 무대체질같은 게 있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교회 컨서트때 담당하는 이가,
<나래>(큰애)가 피아노를 치게 될 것인가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때 내 옆구리를 마구 찌르는 놈, <루미>도 하고싶다고 나는 주섬주섬 말한다.
그날 결국 큰애는 감기기운으로 못하고 루미가 못치는 피아노지만 교인들앞에서 연주했다.
학교 음악회에 가봐도 그애는 뾰족히 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모든이에게 보일 양으로 어깨를 쭉 펴고, 턱을 약간 들고, 눈을 초롱히 빛내며 지휘자를 응시한다. 옆사람의 치마꼬리를 잡아당기며 괜히 실실웃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엄마가 생각하기엔..).

그에게도 어려움이 있다.
“엄마, 나는 동생과 언니에게 잘하는데, 모두 나보고 “척”한다고 해”
“자꾸 나만 따돌려.”
오늘 몇번째 와서 나에게 하소연이다.
나도 안다. 저이들 사이에 있는 문제들을.
“걱정마. 네가 잘하면, 반드시 후에 보상이 있는 법이야.”

매년 이맘때가 되면, 올해의 뉴스와 올해의 인물등이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나도 맘속으로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The best family member of the year를 뽑는 것이다.
가족중에 가장 1년간 성실하고 훌륭하게 산 사람을 뽑아서 이를 기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눈치챘을 것이다.
올해 베스트 오브 송패밀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내년엔 내가 받기 위해 나도 노력할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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