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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어느덧 3년째

한국에서부터 전화가 왔다.
어렸을때 나와 가장 친했던 내 바로 위의 언니에게서.
그게 4년전쯤..
언니의 아들, 딸을 이곳에 유학보내면 안되겠냐고. 당시 옷가게하던 언니는, 자신은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너무 없고, 아이들이 주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데, 그 할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큰애가 공부에 관심이 많고 해서, 이곳에 보냈으면 한다는..

당시 나는 페이슬리에 이사와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있던 참이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다른집 아이>도 맡아서 기르는 사람도 있는데, 내 조카들인데, 그리 힘들게 생각되지 않았다. 당시 중학교1학년을 마친 남자조카와 중학교를 졸업한 여자조카가 우리집에 오게된 사연이다.

당시 우리를 빼고는 모두들 반대했다. 그런 일은 그렇게 쉽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래도, 어떻게든 <받은 은혜를 돌려주고 싶던>나는, 그것이 젊은 내가 할 수 있는 한가지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제대로 보살펴줄 수 없다면 이모인 내가 하는 것도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애들이 우리집에서 있던 그해 늦봄쯤, 캐나다 서부의 리자이아라는 지역에서 유학생활하던 남편쪽 사촌누나의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을 방문했었다. 그중 남편의 조카는 똑똑해보였다. 그가 있는 학교는 한국아이들이 40여명이 넘어, 기숙사에서 한국아이들끼리 지내고, 여러가지 안좋은 점들이 많다하였다.
당시 10학년으로 들어간 여자조카에게 학교이야기들을 듣고,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 조카가 돌아간 다음 한국의 사촌누나에게서 남편에게 여러차례 전화가 왔다. 아들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친정쪽 조카는 맡고있으면서, 시댁쪽 부탁을 내편에서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듯했고, 그때까지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애와 그애의 친구까지 한꺼번에 맡기로 했다. 그 애들이 온 것은 그해 9월 새학기가 시작된 날이었다.

그래서 2000년부터 시작된 하숙아줌마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우선 우리집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1층에 우리가족의 젖줄인 <가게>가 있다.
가게 옆에 <사무실> 공간으로 사용하는 부분이 가게 크기만큼 있다. 이곳엔 물건들도 있고, 우유를 넣어놓는 <워킹 쿨러>도 있지만, 테이블과 커피도구가 있어, 식사때마다 음식을 날라다 먹는다. (사무실 공간이 넓은 것이 여러모로 이용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2층, 이곳에 세채의 아파트가 있다.
조금 큰 곳에 우리 가족이 살고, 우리가 2호실이라고 부르는 아파트에는 남편의 한의원이 꾸며져있다. 그가 부업으로 하는 한의원엔 이 근방의 주민들이 가끔씩 찾는다.
그리고 3호실로 부르는 2베드룸 아파트에 남학생 세명이 유학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내 조카와 현재13학년인 2명의 남학생.
여자조카는 우리와 함께 우리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공간이 넉넉한 것이 이런일들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그때 한 결정이 옳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향상되어가고, 친구도 사귀고 발전하는 부분들이 보이긴 하지만, 부모의 사랑과 훈계안에 있어야 할 청소년기를 타지에서 이렇게 보낸다는 게 아이들에게 마이너스가 될 것이란, 우려가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사실, 나도 유학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 당시, 시골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우리 가족중에서 나를 제일 먼저 서울로 유학시키셨다.
결혼안한 큰언니집에 있었던 것을 시발로 이 언니, 저 언니집으로 옮겨다니면서 생활했다.

그때는 정말 생각하고 싶지않은 우울한 청소년기였던 것 같다. 나를 돌봐주던 언니들에게도 고마움은 커녕,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멀미를 느꼈었다.


<아이들에게 전폭적인 사랑이 가지 않는다>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하듯 할 수 없다>가 두번째 고민이다.
<아이들도 나를 밥집아줌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대한 변명이 된다.

첫해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모든 일을 같이, 우리 애들에게 해주는 것(여행하고, 쇼핑하고, 외식하고…)을 같이 하고자 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우선 유학생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좋지 않다. 한번 나가고자 하면, 아이들 마음이 왔다갔다한다.

점차로 마음이 멀어져간다. 이제는 그들만의 독립된 생활을 보장해준다.
집안일에서 제외시켰음은 물론이고(처음에는 이런일도 시켰다), 웬간한 것이 아니면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작은 울타리에서 넓은 울타리 개념으로 옮겼다.
이것이 지난 3년간의 요약된 내용이다.


이제 올6월이면 하숙집 아줌마 생활의 큰 부분이 일단락될 예정이다. 큰 아이 셋이 대학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다 대학에 무사히 갈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막내조카 한명만 남게 된다.

아직 갈길은 멀다. 때문에 회고하기엔 아직 빠르다.
<사랑>을 주지 않는 것보담, 주는 것이 훨씬 쉬움을, 그런대도 그렇게 되지 않는 나의 이중성에 가끔 괴로와하면서, 오늘 저녁도 밥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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