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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살아쉼쉬고 있다는 것----------이영월

한국의 아버지 선산이 있는 고향에 사는 둘째언니가
우리집의 해묵은 <고통>을 들춰냈습니다.
지난번 칼럼(25호)에 올린 엄마이야기에 뒤를 잇는 이야기가 될듯합니다. 언니글을 읽을때는 이곳에 올려야지 했는데, 막상 <잘하는 짓>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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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이영월

나머지 生 마감까지는 정리할 일들 한가지씩 풀어나가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 가신지 16년이나 되었고 울엄마께서는 노할머니가 되시어 자식들 뒷바라지에 온 정열을 쏟았던 시기 지나,
혼자의 좁은 공간 두리번 거리시며(카나다 가족들, 미국 가족들, 소련가족들, 한국가족들)
남은 가족 소식에 귀 기울이신다.
좋은 소식 있거들랑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 드리고 아픈일들일랑 젊은 세대끼리 위로해 보자.

오빠 한분에 딸 열(10명)을 두신 울 엄마...
아버지와 오빠 엄마께서 결혼하시어 오빠한분 낳고 돌아가셨다.
그 뒤 엄마께서 결혼하시어 딸 10명을 낳은신거다.

교육자이셨던 자상하신 아버지 교육아래 사랑 훔뻑 받으며 유년기를 거쳐 성장하여 오빠(한국)60세, 큰언니(카나다)57세, 나 세실리아(한국)55세, 동생들... 종호, 종숙, 종화, 승자, 민자, 미원, 미자, 경미..
자식 11명에 손자 손녀 22명 증손자 손녀 14명을 둔 대가족이 되었다.

어릴적 아버지 오빠 언니 동생들과 추석이든 설이든 차례 지내고 나면 산소로 갔다. 망일산 능선 꼭대기 힘겹게 올라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할머니? 엄마?
이상하다 하면서도 늦게서야 철이 든 후 큰 엄마(오빠 엄마)무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빠댁에 저녁제사때 얼마전 남편과 간적이 있었다.
아버지 곁에 계신분 오빠 엄마(큰엄마).. 울 엄마께서는 카나다에 계신데 아버지 곁에 밥과 국을 받으시고 절을 올리는 오빠를 보며 남편도 나란히 절을 했다.
온 정성 다 바쳐 차례 지내는 새언니 오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를 16년 지난 지금에서야 듣게 되었다.
굳게 입다물고 계셨던 새언니, 시누이 10명 거느린 언니의 참을성, 지금까지의 긴 세월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울엄마 슬픔 가눌길 없었고 우리 형제들도 모두 슬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친척 어르신께서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큰 엄마와 합장을 해야지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 한다고 하셨는데 오빠께서는 울엄마 생각에 동생들 생각에 후회해도 좋으니 지금은 하지 않겠다고 버티셨다 한다.
낳은 정과 기른정 사이에서 어린나이부터 혼자의 고통을 우리들은 생각지도 못했다.

오빠 결혼하여 새언니 시집와 살면서 이민가기 전 재산정리하면서 서로의 불편한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고 낳은 자식 아니니까. 아버지 돌아 가신 후 오빠 새언니께 기대보려던 엄마와 딸 10명들도 기대에 못 미치고 서로의 서운한 점만 내 새우며 이토록 아까운 긴세월을 어정쩡한 상태로 지내온 것이다.

미국의 동생부부가 아들 결혼시키러 한국 나왔던 차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잔듸가 잘 자라지 않고 곳곳이 패이고 자손들 없는 산소처럼 황량하게 있어, 할말들을 잊고 한동안 멍해 서 있었다.
자손들이 해야한다. 비석 세우고 다듬고 이렇게 결정을 하고 떠났다.
아들 하나에 딸10명이 성의껏 돈 모아 해보자는 뜻이었다.
한국에 나왔던 종화 동생이 카나다 떠나기 전날 깊은 밤에 새언니와 나눈 대화내용을 들었다.
아버지 묘만 할것이 아니라 큰엄마와 합장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자는 척 했지만 서운한 마음으로 자신을 주체 하느라 힘들었다.

카나다 동생들은 떠나고 새언니와 나는 시골에 오는 버스안에서 산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해서 이해도 안되고 합장한다는 이야기에 울엄마 얼굴이 떠오르며 남편 떠나 카나다에서 딸들과 남은 생 마감하려는 엄마의 마음을 읽는 듯 했다.

새언니께 말했다. 난 절대 동의하지 못하겠노라고!
이제까지 참은 것 엄마 세상떠나시면 하던지 말던지 내 속 마음은 반항하고 있었다.
낳기만 하고 돌아가셔 울 엄마께서 이렇게 키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가정의 가장으로서 교육공무원으로 아버지 뒤를 이어 떳떳하게 내 놓았는데, 카나다 가신 후 16년 세월동안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지도 않았고 따뜻한 부모에게 주는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외로워 하시는 울엄마.
늘 행복해하시면서도 어느 한구석 그리움으로 애간장 녹이시던 모습 떠올라 큰엄마, 아버지 합장한다는 것에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낳은정 기른정을 놓고 아파하는 사람들 보았는데 돌아가신 큰엄마와 울엄마 사이에서 갈등되는 순간이다.

카나다에서 민자 결혼식때 오빠 모시고 가려고 여권까지 만들어 수속 밟았는데 결국 새언니 반대로 가시지 못했고, 울엄마 칠순때도 오빠 언니가 가셨으면 간절이 설득했는데 그때도 그대로 넘어가고 엄마의 자식 그리움으로 꽉차있는 모습!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가슴 맺혀 있었다.

울타리에 갖히어 꼼짝할 수 없는 오빠가 한없이 안되보이면서도 마음대로 못하는 오빠의 입장은 ......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늙고 힘들어 하고 혈기에 넘쳤던 지난날들이 언제였느냐로 바뀌어 우리가 아버지 세대로 돌아 온 것이다.

내 감정 억누르며 갈등 겪으며 누구와 의논할 수 있는 사람 찾는 중 나의 곁에는 4년을 같이 지내신 주방 아줌마께 말씀드려 보니 카나다에 계신 엄마께 여쭤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큰엄마 합장하면 어떻게 생각하시나?
아무 말씀 없으시고 마음대로 하여라 이면 엄마께서 NO하시는 것이고 쾌히 승낙하시면 OK 라고,

울엄마께서 상처 받으실까 두려워 전화 다이얼도 살살 돌리고 조심스레 엄마께 여쭙고 내 감정부터 토해냈다.
이런 서운한 일이 있냐고?
울엄마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나는 화가 난다고?
내 마음 진정시키며 엄마께서는 도리어 나보고 나무라신다.
엄마께서 벌써 너희들에게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지금에서 이야기 하게 됐다고, 오빠 고통을 생각해 보라고!
당연히 아버지와 큰엄마께서는 합장해야 된다고!
화곡 돌아가신 이모님 이야기를 꺼내시며 날 설득하시기에 이르셨다.
화곡이모 일찍 돌아가셨었고 이모부 돌아가시니까 곧 이모부와 합장 하시고 그것이 생각난다고!
친정가족들은 행복해 했고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도 않고 울 엄마는 하늘에서 금방 내려오신 천사인가?
속이 없으신가? 나도 모를 일.....
동생 종화도 이제까지 큰 엄마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아버지 위함과 같이 울엄마께 하는 것과 같이 큰 엄마께도 대접함이 마땅하다고!
늦은 지금이지만 울엄마의 진정한 마음이니 언니가 마음을 바꾸라고!

위로 드리고자 했던 것이 거꾸로 나한테 위로의 말이 되돌아 오리란 생각도 못한 일...
울 엄마와 내동생 종화는 번갈아 전화바꿔가며 설득 작전.
오빠 한분이시니 딸 열명이 동참하여 엄마 살아생전에 아버지 큰엄마 합장하는데 힘써주면 큰 기쁨으로 알겠노라고!
전화 통화한 후 2달 걸쳐 생각해 봤다.
어른들의 깊으신 생각, 조그마한 내 감정 튀어나와 참지 못햇던 일.

남편께 의논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니 가족 모두에게 알리어 성의껏 형편대로 오빠를 돕자고!
울엄마께서는 카나다에 묘지 사 두셨고 비석도 돌아가시기 전 울엄마께서 준비하셔야 된다기에 준비중에 있다.
나중 자손들이 엄마 둘레에 서 있을 방향까지 옮겨 보시며 기뻐하셨다 한다.
비석도 세우고 그러고 보니 2년전인가 한국에서 핑크색 본견으로 돌아가시면 입으시려고 목실로 예쁘고 편하게 속치마 속바지까지 만들어 보내 드렸다.
(나 혼자 하려 했는데 미국 카나다에서 돈 모아 보냄)
울엄마 계실 곳은 편안히 만들어져 자손들이 훗날 엄마의 뜻 깊은 사연 알게 되리라.

이제 남은 일.
오빠 한분, 우리 열 자매는 아버지 큰엄마, 울엄마 받들 듯...
힘껏 도와 오빠의 늘어진 어깨 추켜 세워 바로 올려 놓고 아버지 큰엄마 합장하여 편히 잠드실 수 있게 비석 세워 다듬어 드려야겠다.
오빠 아들 3대독자 승태 어려서 산소에 갈때 하는말(참초하러 가면서) 왜 할머니는 나 힘들게 높은 곳에 심어 놓아 나만 힘들게 하는지?
올해는 승태 30세가 되었는데 아버지 산소에서 오빠께서는 기다리시고(몸 불편해 높이 못 올라감) 승태만 할머니 산소 보냈는데 한참만에 헐레 벌떡 뛰어 오더니만 구두신고 간것이 잘못되어 미끄러져 올라가다 올라가다 되돌아 왔다면서 오빠의 두 눈에 눈물 고인것을 보았다.

찌르는 풀 몇개 산소에 붙어 있는 큰엄마 산소, 능선 꼭대기에서 가파르게 누워 계신 큰엄마, 60년 기다리신 긴 세월에 이제 곧 자식들이 아버지와 편히 영원히 계실 아름다운 비석과 함께 다듬고 어루만져 행복하시기를....

사랑은 서로 많이 나눌수록 많아진다는 것을 고통 통해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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